Sepafuturism과 동시대성

2023.08.

by Arborepeary is elsewhere

Sepafuturism과 동시대성

2023.08.
Arborepeary



세계관을 여는 질문


이 세계관은 인식의 한계와 지속가능성에 관한 고민으로 시작되었다.


1. 인식의 프로세스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시간의 관한 물리학과 양자역학 같은 직관에 위배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누군가 연구한 내용을 단지 수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내가 본질적으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직관은 거시 세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이마저도 실제를 왜곡한다. 인류는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

2. 우리는 한정된 정보만을 인식하고 이를 완전한 것으로 재구성한다. 우리가 보는 것, 기억하는 것, 판단하는 것 모두 뇌에서 재구성된 것임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는 개체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나의 뇌’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신체를 공유하고 있는 수많은 미생물을 고려하면 우리는 단일의 생명이 아닌 생명의 집합체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라는 단일의 존재가 있다는 개체 관념은 신체의 생리 작용의 일부로 해석되는데,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

3. 나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종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 감각 또한 결국 진화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지난 <Project Team Pearl, 당신의 현재 위치 - The Door, 예술청 아고라, 서울, 2022>에서 구체화시킨 바 있다. 인간이 만든 세계, 도시를 비롯한 인공적인 것들은 자연과 다른 이질적인 것 같고,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 연구 결과도 인간 문명이 생태계 평형을 깨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물이 만든, 이를 테면 잎꾼개미가 만든 버섯 농장과는 다르게 왜 인간이 만든 도시는 생태계 균형을 깨뜨릴까?

4.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의 인프라와 사람들의 상호작용과 같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든 것을 진화적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도시화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혁신의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동시에 시간 또한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Web3.0 시대와 블록체인, 인공지능, DAO 등의 새로운 개념들은 어떤 진화적 맥락에서 나타난 것일까? 이 복잡한 상호 작용이 나타내는 환경적 압력이 어떤 흐름을 나타내고 있을까?

5.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삶을 구성하는 프로세스는 개인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해졌다. 그 결과 우리는 분권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전체 프로세스 중 개인이 인식하는 비중은 점점 작아지고 내가 인식하는 범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렵다. 식자재 유통부터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분류되고 판단되는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발전과 점점 분권화되는 세상은 마치 인간이 없이도, 물리적 공간과 상관 없이 내 삶이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식의 범위 밖에 있는 인간과 물리적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6. 우리는 노화하고 죽도록 진화되었다. 노화와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생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렵고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균류 또한 죽음을 찾기 어렵다. DNA의 작동 기작을 비롯해 생의 시작과 끝을 살펴봐도 죽음은 생명에게 필연적이기 보다는 유성생식 생물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죽음을 인식하고 두려워하도록 진화했을까? 마찬가지로 인류는 지속 가능한가? 생명체가 사는 지구와 그 속의 지적 생명체 인간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만약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그 끝은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SEPAFUTURISM 세계관은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고민과 SEPAFUTURISM 세계관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마 의아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Separation’과 ‘Futurism’ 두 단어가 나온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Separation’에 관해 내가 강렬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다. 모든 물체에 입자와 파동의 성질이 공존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써 이해해보자면 질량에 따라 미시 세계의 범주에 속하면 파동의 성질이, 거시 세계에 속하는 입자의 성질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후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개념과 성질로 나타낼 수는 없을까? ‘이중성’이라는 더 혼란스러운 단어를 사용해야 했을까? 이중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마치 입자가 되었다가 파동이 되었다가 변하는 느낌이지만 실제는 스펙트럼에 가깝지 않은가? 언어의 문제인가? 이 한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언어 자체에 있는 분절성은 왜 필요한가? 인식 자체의 메커니즘에서 기인했다면 언어의 분절성은 필연적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단 앎의 방식과 언어와 인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어는 인식을 제약하고 우리는 말하는 대로 생각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요점은 인식하는 방식인 언어는 그 속에 분절성이 내제되어 있고, 언어에 내제된 분절성은 우리 사회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요즈음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거대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때문일까?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사용하는 컴퓨터 언어 또한 결국 분절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속 가능한가? 이 질문이 대한 답을 하기 위해 ‘futurism’이라는 단어와 증명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인 귀류법을 사용했다. ‘이대로라면 인류는 극단적으로 분절된 미래를 맞이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분절된 미래를 상상해보자. 이 미래가 괜찮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할 것이고, 괜찮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분절할 대상을 고민했다. 가장 큰 축으로 현실과 가상을 분리하고 ‘기존 인간으로부터 조작되던 가상 현실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한 사건, PT-BANG’으로 명명했다. PT-BANG 이후 생겨난 가상 현실, 가상 현실 속에 사는 생명체 ‘피어리(Peary)’. 피어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피어리는 어떤 생태적 특성을 나타낼까? PT-BANG 때 어떤 환경 변화가 있었을까? PT-BANG을 야기한 환경적 압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SEPAFUTURISM’이라는 이 장난스럽고 간접적인 논증에서 결론에 다다르지는 않을 예정이다. 그것이 아마 위에 열거한 내 모든 고민에 대한 나의 잠재적인 결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의 목적은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 혹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세계관 선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SEPAFUTURISM은 옳고 그름이 아닌 극단과 분절성 그 자체에 대한 Science Fiction이다.


이 글은 2023년 여름에 작성되었고, 아마 올해 안에 어딘가에서 게재될 것이다. 2022년 나는 프로젝트 팀 펄의 기획자로서 ‘Sepafuturism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프로젝트 팀 펄은 Sepafuturism 속 가상의 사건인 ‘PT-BANG’ 이전 ‘The Door’ 시점의 기획 전시 ‘Project Team Pearl, 서울문화재단 ‘UnfoldX기획자캠프’ 선정작, <당신의 현재 위치 - The Door>, 예술청 아고라, 2022’를 진행하였고, 2023년 ‘PT-BANG’ 이후 가상 환경에서 우세 종으로 자리 잡은 가상 생명체 ‘피어리(Peary)’를 현실로 불러내는 <PPP(POP-UP! PEARY)> 시리즈를 3번째 에피소드까지 진행하였다. 또한 다가오는 10월에 ‘The Door’ 시점 분절된 인간 세상을 다루는 <Separium> 시리즈 첫 번째 에피소드인 ‘Project Team Pearl, 서울문화재단 ‘UnfoldX기획자캠프’ 선정작, <Separium : Monotypic Humans>,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2023’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리서치로 앞으로 세계관 확장을 위한 방향성을 잡고자 한다.




인식의 분절성


1. 개체로서의 나


나는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를 진화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에 관심이 많아 학부는 생명과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학창시절과 대학 입학 초기, 학부 시절,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3단계로 주 관심사가 달라진 것 같다. 대학 입학할 때는 인간의 제한된 감각에 의한 인식의 한계에 관심이 많았고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V.S 라마찬드란의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와 같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학부 시절에는 미생물이나 식물과 같이 다른 생물의 생활사life cycle가 흥미로웠고, 그들의 생활사로 하여금 인간의 개체 관념이 흔들리게 되는 지점과 그렇다면 그 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에드 용의 <내 속에는 미생물이 너무나 많아>를 비롯해 ‘장-뇌 축’과 마이크로바이옴과 같이 당시 활발하게 연구되던 주제였던 미생물의 메커니즘, 꽤나 우아하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인식 체계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관심이 많았고 졸업 작품도 미생물에 관해서 다루었다. 최근에는 생태계 전반에 작용하는 환경적인 압력이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문화나 개인의 일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나의 관심사는 지난 10년 동안 보다 거시적이고 다학제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나의 개인적인 관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실 최근 많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연구도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아마 나의 관심사 또한 은연중에 동시대에서 진행되는 연구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 또한 동시대적 맥락이며 내가 느끼는 의문이나 생각의 방향 또한 환경적인 압력 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융복합 예술 프로젝트의 기획자로서 나는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까? 개체로서의 나는 어떤 인식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특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최근에 동물분류학 황의욱 교수님과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 중간 쉬는 시간에 ‘단순성의 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 지구 상에는 단세포 미생물처럼 단순한 생물과 인간처럼 복잡한 생물이 존재하지만 먼 과거에는 인간처럼 복잡한 생물은 없었다. 이 사실은 마치 단순한 생물에서 복잡한 생물로 진화해 온 것처럼 느껴지고 진화가 단순함보다 복잡함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복잡한 생물이 더 고등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단순성의 벽’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오해다. 최빈값은 변함이 없는데 평균값이 좀더 오른쪽으로 변한 이유는 왼쪽에 벽이 있기 때문(생명임을 유지한 채 더 작고 단순해질 수 없다)이지 그것이 진화의 방향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고등생물로서 인간은 오른쪽 긴꼬리long tail에 불과하다. 진화로 인간과 같은 고등 생물이 나타난 이유는 고등 생물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 아닌 진화가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하여 ‘랜덤 워크random walk’의 결과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다. 다른 예로 2006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데이비드 페니 교수 팀의 연구 결과에서도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진핵류가 박테리아나 원시 세균의 후손이거나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라는 기존 이론과는 다르게 박테리아나 원시 세균이 진핵류가 진화 과정을 거쳐 단순화된 결과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생물 세포가 진화를 통해 점점 복잡해진다는 통념과는 반대로 점점 단순해지는 과정을 밟은 세포도 있음을 나타내며 진화가 전진적인 과정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복잡성은 생존에 불리한가? 이러한 진화에 대한 개념의 혼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단순한 생물과 상대적으로 복잡한 우리가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까지의 생존을 위해 그들은 단순함을 전략으로 삼았고 우리는 다른 전략을 택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복잡계는 전체가 부분들의 단순한 선형의 합보다 더 크며, 때로 상당히 다르기까지 하다는 보편적 특징을 지닌다.[i]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자면 어떤 의미일까? 전체가 개별 구성 단위들의 구체적 특징과 거의 동떨어져서 나름의 생명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사례를 생각해보면 개별 세포로 이루어진 ‘나’라는 개체가 있을 수 있다. 그 외에도 개미의 집단이나 사람과 인프라의 합으로 이루어진 도시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세포-개체(나)-도시’로 이어지는 창발적 행동emergent behavior[ii]이라는 특징(경제학 용어인 ‘규모의 경제’와 비슷하다)은 마치 프랙털적 연결을 연상시킨다. 이 연결망을 상상하기 위해서 나는 브누아 망델브로Benoit Mandelbrot가 사용한 방법처럼 결이 거친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해야 했다. 결이 거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개체 간 차이는 없어지고 생명의 보편적인 특징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 진화가 이룩한 이 찬란한 세계 속에 생명을 구성하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원칙이 있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러한 계산을 위해서는 평균적이고 이상적인 생물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마치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물체 각각의 형태와 질량을 무시한 채 점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체 간 변이와 같은 개체 간 변이는 상대적인 규모 의존적 관점에서 보면 극도로 작고 사소하다. 그렇다면 이 변이는 의미가 없을까? 이런 일탈과 변이 또한 차이를 나타내고 이후 언급할 근삿값의 ‘더 높은 차수’ 효과를 낳게 된다.[iii]


거시적인 관점에서 복잡계 물리학자 ‘제프리 웨스트’는 우리가 사는 복잡한 세계에서 자기 유사적 프랙털성과 4분의 1 제곱 스케일링 법칙을 찾아 냈다. 이러한 법칙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가장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에서 동시에 찾을 수 있는 규칙적인 패턴인 자기 유사적 프랙털성은 무척 흥미롭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거시와 미시가 같다는 것은 공간 차원이 결국 연결된다는 것, 나아가 시간 차원의 연결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즉 과거와 미래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4라는 숫자도 매우 흥미로운데, 통상적인 망의 삼차원이 프랙털 특성에서 비롯되는 추가 차원으로 확장되어 4라는 숫자가 나타났다.[iv] 그러나 프랙털성이 왜 생기는 지를 알 수 있는 이론이나 그 차원을 계산할 수 있는 근본이론은 아직 알 수 없다.


세포가 모여서 ‘나’라는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개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래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여기서 ‘독립적’이라는 단어는 내 몸에 있는 세포나 미생물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마치 부분과는 다른 별개의 개체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다. 내 몸 속에 있는 세포와 미생물은 나의 생각에 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부연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나와 같은 개체들이 모여 도시를 만들고, 이 도시가 마치 생명과 같은 특징을 갖고 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있음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도시가 아닌 ‘개체-생태계’ 합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직관적으로 느껴지기에도 도시는 물리적 기반기설을 훨씬 초월하는 무엇인 듯하다. 결국 도시의 진정한 핵심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도시는 본래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그럼으로써 착상과 부를 만들어내며 대도시가 제공하는 비범한 기회와 다양성은 사람들의 창의적으로 혁신적인 사고를 이끌어낸다. 이를 고려[v]하면 도시가 거대해질수록 증가하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화는 가속 팽창하는 우리 우주처럼 마찬가지로 지수적exponential으로 팽창하고 있다.


지수적 팽창은 어떤 의미일까? ‘자연 세계’의 다른 생물들, 과거의 우리를 포함해서 우리 행성의 생명은 태양에서 직접 오는 에너지를 생물학적 대사 에너지로 전환하도록 진화했고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산업 혁명은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체계 변화를 초래했다. 에너지를 외부의 태양에서 공급받는 열린계에서 회석 연료를 통해 내부적으로 공급하는 닫힌계로의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닫힌계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과 그 요구 조건인 엔트로피가 언제나 증가한다는 원리가 엄격하게 적용된다. 지하 화석 연료에 저장된 에너지가 지표면으로 방출되면서 대기가 따뜻해지는 것 또한 열역학 제2법칙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다.[vi]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 도전 과제, 위협 중에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모두 적어도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 곁에 있어왔다. 그러나 현재 그것들이 우리를 뒤덮을 잠재력을 지닌 거대한 지진 해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도시화가 지수적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vii]



2. 도시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


올해 봄부터 시골 집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다. 근처 농장에서 시즌 별로 나오는 식물을 고르고 내가 원하는 위치에 심는다. 이곳은 겨울이 추운 편이라 겨울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을 주로 고른다. 화분에서 키울 때와는 다르게 언제 물 주고 햇빛을 어느 정도로 쬐어야 하는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최근에 비가 안 온 것 같으면 물을 주고 자주 온 것 같으면 물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외에는 자연에 맡긴다. 최근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인지 일렬로 나란히 심어두었던 바위초롱이 다 죽었다. 그래도 정원에서 크는 식물은 화분에서보다 확실히 기운이 좋다. 농장 주인은 ‘땅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몇 주에 한번씩 정원에 갈 때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잡초를 뽑는 것이다. 정원 앞에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있고 그곳을 오가는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의 미숙한 정원을 보고 조언을 해주신다. 잡초를 뽑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에는 멀건 흙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이 그저 기뻤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무섭게 번지니 반드시 뽑아야 한다’는 말에 잡초를 뽑기 시작했지만 반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심은 식물보다 많다.


결국 정원지기로서 내 일상은 내가 심은 식물이 보다 잘 자랄 수 있게 대신 경쟁자를 없애주는 것이다. 땡볕 아래에서 혹은 비를 맞으면서도 잡초를 뽑는다. 문득 ‘왜 얘네(내가 심은 식물)들은 번식력이 이렇게 좋지 못할까’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아마 그들은 나 같은 노동력이 있으니 굳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잡초처럼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대신 나와 같은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인간과 공생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이전에 도시에서 경험했던, 상상했던 ‘가드닝’과는 사뭇 다르다. 분권화된 도시에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인공적인 정원과 사과나무가 가득한 과수원.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인간에게 그들이 베푸는 미덕과 같은 식물과 인간의 공생 관계는 도시에서는 알기 어렵다. 이처럼 도시화에 의문을 갖는 것은 시골과 도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디지털과 물리적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viii] 이를 테면 도시에서 자연은 ‘바깥에 있는 어떤 공간’에 있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자연은 ‘바깥에 있는 어떤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안에 있는 바로 이 공간’에도 존재한다. 좀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사과와 감자에 있고, 정원과 부엌에 있으며, 심지어 튤립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대마초를 피우며 황홀경에 도취되는 인간의 뇌 속에도 있다.[ix]


최근에 진행한 식물분류학 김승철 교수님과의 인터뷰에서 ‘Mother Tree’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숲 속 나무들이 균근 네트워크로 스트레스 신호와 자원 정보 등을 공유하고, 특히 이 네트워크 중심에는 ‘Mother Tree’가 있어 주변 어린 묘목의 생장을 돕는다는 것이다. 즉 숲을 관리할 때 이러한 네트워크, 특히 ‘Mother Tree’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이전 개체 단위로 다루었던 나무의 개념을 공동체로 확장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균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나무들이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 정말 나무들이 소통하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하게 다가온다. 나무와 균은 다른 생명체인 것 같은데, 균을 활용하는 것이 정말 나무 간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인 나 또한 내부에서 균을 활용해 소통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즉 나무의 소통 방식이 나에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 또한 나무와 나의 감각 세계가 다르고 나무와 균을 분절해서 인식하는 인식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수적인 성장을 하는 도시와 그 속에서 점점 한정된 영역만 인식하는 나. 매년 다른 ‘혁명’이 나타날 때마다 도시의 성장 속도에 놀라곤 한다. 작년에는 웹3 혁명이었는데 올해는 인공지능 혁명이다. 이런 디지털 혁명은 어떤 환경적인 압력을 의미할까? 위 변조가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탈중앙화를 그리는 블록체인과 방대한 데이터 셋을 소유한 대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인공지능의 교차점을 고민해본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의 인식 범위는 오히려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분권화된 사회, 보다 효율적이고 편리한 이 사회가 제공하는 한정된 인식 범위는 사회 전체 시스템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한다. 도시의 어느 식당에서 맛있는 파스타를 먹지만 나는 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해가 되어도, 사회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도 한정된 인식 범위 하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는 인간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침대에 누워 유투브 알고리즘으로 만나는 웹3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은 마치 코드로 자동화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관여하지 않아도 매끄럽게 작동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은 얼마나 빠르게 올까? 알리바바의 ET Agricultural Brain은 이러한 고도로 최적화된 프로세스가 야기하는 분절성과 인식의 한계를 보다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전환과 블록체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블록체인과 인공지능(AI)의 결합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된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식자재의 유통과정을 ‘볼’ 수 있으니 우리는 앞으로 안심하고 분권화된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결국 인간, 특히 도시에 살지 않는 인간은 필요하다. 이를 테면 기계가 학습하는 동안 농부 또한 그를 학습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x] 이러한 AI 모델을 작동하는데 필요한 계산 시간, 데이터, 인프라 및 비용을 고려하면 현재로서 AI 모델은 대규모 농장에만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는 또 다른 규모의 경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농부를 아예 AI농부로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AI는 사례들의 대규모 훈련 집합으로부터 일반화하고 훈련 데이터 집합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관찰 대상을 정확히 분류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말하자면 기계학습 시스템은 기존 분류 체계를 바탕으로 일종의 귀납을 수행할 수 있다.[xi] 분류는 강력한 기술이다. 분류는 시스템의 하부 구조 속에 끼워 넣어짐으로써 그 힘의 어느 부분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귀납적 권력이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AI 훈련용 데이터 집합에서 이미지에 라벨을 다는 것이든 얼굴 인식으로 사람들을 추적하는 것이든, 분류는 권력의 행위다. 하지만 하우커와 스타가 말하듯 분류는 ‘하부 구조 속으로

, 습관 속으로, 당연시되는 것들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우리는 기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무심하게 선택되는 분류 방식이 우리의 인식 체계, 사회와 문화를 포함한 사회적, 물질적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망각하기 쉽다.[xii] 이를 테면 ET Agricultural Brain은 농부의 역할이 단순히 도시 사람을 위한 식량을 생산하고 그 식량을 저렴하고 이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가정한다.[xiii] 그러나 실제 농부의 역할은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그들의 공동체, 지역 생태계, 땅에 대한 책임과 헌신과 책임으로 생태계를 관리한다. 즉 기계과 달리 농부는 땅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역할을 수행하며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위해 헌신한다.[xiv]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 외에도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의 편견’과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다루듯 AI가 우리 삶에 만연한 만큼 그 하부 구조에 있는 분류 체계는 강화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Web 3.0, AI 시스템과 같은 디지털로의 전환은 불가피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미 우리 삶에 만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고민은 ‘가능한 일은 실현될 것’이기에 ‘왜’ 도입하는 가를 묻는 것보다 어디에 적용할지를 다루는 것이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로의 전환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어느 문제에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해법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기술 유토피아주의나 혹은 환경인 맥락을 문제 삼지 않은 채 마치 기술이 독립된 행위자인 양 부정적 결과에 대해 기술 그 자체를 비난하는 기술 디스토피아적 관점은 지양하고자 한다.[xv]


시골에서의 밤은 낮과는 장르가 다르다. 해가 지면 야행성 생물이 깨어나고 내 방 틈새로 새어나가는 불빛으로 테라스에는 온갖 곤충들이 모인다. 무서울 정도다. 이 장면은 직관적으로 느껴지기에 기이하게 다가온다. 빛이 없어야 할 시간과 장소에 빛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도 물론이고 이곳에서도 나는 진정한 어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연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끼쳤고 많은 부분 크게 의식하지 못한다. 이를 테면 밤에 내 방 틈새로 나오는 빛 공해처럼,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매끄러운 수직 표면은 ‘탁 트인 야외’인 것처럼 들리는 메아리를 되돌려준다. 박쥐들이 종종 창문에 부딪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수 있다.[xvi] 물론 우리가 모든 생태계 구성원에게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은 현대의 풍경과 소리를 견뎌내도록 진화했고, 심지어 어떤 동물은 그 와중에서 번성하기도 한다.[xvii] 그러나 적응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고 적응에 성공한 종은 생태계 전체 관점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규모가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도시에 살고 있고 수명이 길고 진화 속도가 느린 종은 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진화할 수 없다. 게다가 다른 감각 세계의 사는 생물의 입장을 알기 어렵기에 더욱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인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대 도시 속 분절된 세계 속에서는 다른 부분의 존재나 시스템 전체를 알기 어렵다. 인식할 수도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결국 피할 수 없는 디지털로의 전환, 새로운 혁명의 더 짧아지는 주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도시화와 삶의 속도는 현재 어떤 면에서는 생태계 우세 종이며 수명이 길고 진화 속도가 느린 종인 Homo Sapiens의 적응 가능성을 불확실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i]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41

[ii]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42

[iii]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171

[iv]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188

[v]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349

[vi]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328-329

[vii] 제프리웨스트, 『스케일』, 이한음, 김영사(2018), p21

[viii] Xiaowei Wang, 『Blockchain Chicken Farm』, FSG Originals x Logic(2020), p8

[ix] 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이경식, 황소자리(2007), p32

[x] Xiaowei Wang, 『Blockchain Chicken Farm』, FSG Originals x Logic(2020), p66

[xi] 케이트 크로퍼드, 『AI지도책』, 노승영, 소소의책(2022), p156

[xii] 케이트 크로퍼드, 『AI지도책』, 노승영, 소소의책(2022), p152

[xiii] Xiaowei Wang, 『Blockchain Chicken Farm』, FSG Originals x Logic(2020), p76

[xiv] Xiaowei Wang, 『Blockchain Chicken Farm』, FSG Originals x Logic(2020), p74

[xv] 케이트 크로퍼드, 『AI지도책』, 노승영, 소소의책(2022), p253

[xvi]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양병찬, 어크로스(2023), p521

[xvii]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양병찬, 어크로스(2023), p521



매거진의 이전글SEPAFUTURISM 선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