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피지기
지금 돌아보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20대의 나는 대단히 오만한 자였다. 지금과 그때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내가 오만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 그때는 몰랐다. 사관학교 졸업앨범을 제작할 때 본인의 증명사진 옆에 각자 추억이 담긴 사진을 5장씩 실어주기로 했다. 앨범이 완성된 후 나는 사뭇 놀랐다. 다른 동기들이 제출한 각자의 사진들에는 단체 사진이나 동기들과 삼삼오오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으나, 내가 제출한 사진은 5장 모두 나의 독사진이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어떤 성향인지 알아차렸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군 시절 중 나는 어느 직책을 맡길 원했는데, 선발 면접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면접관들에게 "다른 지원자들은 군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이 직책에 지원했으니 내가 적임자다"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그 직책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다. 결국 그 마음가짐 때문에 다른 지원자들도 나와 같을 것이라고 편협한 시각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우물 안에서는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그걸 인정할 그릇이 되지 못했고,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나보다 무능한 사람들로만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스스로가 군 조직과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착각했었다. 군 생활 중에만 고발을 두 번이나 했고, 가혹행위를 자행한 예하 병사의 계급을 강등시키겠다고 경솔하게 설친 적도 있었다. 함께 했던 동료들과 상급자들께서 얼마나 부담을 느끼셨을지 참 부끄럽다.
손자병법에서는 ‘능력이 있어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잘못된 선택을 강요하라는 전략적 교훈이기도 하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본인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고요히 숨기고 있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이 구절을 실생활과 개인적 수양 차원에서는 겸손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실력자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고수는 고요하다. 굳이 나서서 내가 잘났다고 주변에 알리지 못해 속을 태우며 본인이 거만을 부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논어에서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오히려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걱정하라고 가르친다. 나만 잘 났다는 생각에 공명심이 앞서면, 진정한 나와 상대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면 다른 팀원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주변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남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에서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과 연계될 수 있겠다. 이 이론의 창시자인 로버트 그린리프는 ‘먼저 섬기는 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동방순례의 주인공인 레오는 하인으로서 순례자들이 여행에 차질이 없도록 봉사한다. 그러나 레오가 귀족 순례자들의 불평불만을 참지 못하고, 순례 집단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동안 순례자들은 레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레오가 없어지자 일행은 우왕좌왕하며 결국 여행은 미완으로 중도 종료된다. 머슴이었던 레오가 사실 집단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진정한 리더였던 것이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조직의 구성원이 성장하도록 돕고, 조직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권위를 통해 지시하기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팀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더 강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 섬기는 마음은 겸손함이 팀원들에게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듣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도움을 제공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 팀원들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팀원들은 상호 신뢰가 깊어지며, 팀원들이 스스로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수 있다. 겸손함은 개인의 성과보다 팀의 성공을 우선시하고, 단순한 명령을 넘어 팀 전체의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창업의 과정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리임을 상기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인접 회사의 대표님들은 평소에는 다소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위기의 순간이 오면 평정심을 잃지 않고 명쾌하게 조치를 취한다. 나 같았더라면 평소 잘난 체하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허둥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들은 겸손 속에서 진정한 실력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노자에서는 화광동진이라 하여 자기의 재능을 감추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동화하라고 한다. 도덕경에서는 광이불요라 하여 빛나되 너무 번쩍거리지 말라 한다. 고수의 처신을 이르는 격언들이다. 겸손이 지나치게 치우쳐 중용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렇듯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고 팀을 섬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건강한 자신감과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겸손하지 못하면 쉽게 타인의 상황을 오판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생도 생활과 소대장 부임하며 시작했던 군 생활 초기에 종종 상급자들에 대해 불평을 하곤 했다. 나 스스로조차 잘 살피지 못하면서, ‘내가 연대장이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따위의 불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결국 자신의 직책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대장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그런 태도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와 같은 건방진 태도는 설령 실제로 높은 직책이 주어지더라도 그 위치에 맞는 성과를 낼 수 없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자기 일에 정성을 보이지도 않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불평을 입에 달고 살기 마련이다.
또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위기 상황이나 희생에 대해 쉽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며 “나였으면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늦게 태어난 행운으로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국방대학교의 2023년 6월 범국민 안보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18세~75세 성인 남녀 중 13.9%만이 전쟁 시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지금도 당장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의도가 없는 경우라면, 그 사람의 미래 각오나 과거에 대한 가정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나? 겸손이란 나와 내 위치를 제대로 바라보고, 내 주변을 위해 당장 무엇을 섬길 것인가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내가 얼마나 주변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하는지가 진정한 겸손의 시작이다. 지금 당장 나의 일과 주변 사람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떤 순간이 와도 마찬가지다.
나는 29살이 되던 해에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다시 읽으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조금이나마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카네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상대방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이때 겸손은 상대방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고, 그들이 가진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바탕이 된다. 나만 잘났다고 내 얘기만 떠드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겸손한 태도는 그 자체로 타인과의 신뢰를 쌓는 데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겸손은 솔직함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도구다. 초임 소대장 시절 소대에 부임하고 보니 우리 소대는 박격포 3문을 운용하고 있었고, 나는 박격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습니다. 생도 과정에서는 배우지 않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자부심 드높은 초임 소대장이 병사들에게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분대장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지만, 내가 박격포를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전문성을 칭찬했다. 나에게도 포 방렬부터 정비하는 방법까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분대장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함께 부족함을 채워가며 서로 더욱 숙달 정도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때 함께 했던 소대원들과 아직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소대장 보직을 마친 후 교육장교 임무를 맡았는데, 군대 행정 실무와 보고서 작성 등 아무것도 몰랐다. 잘난 척을 하며 혼자 작성해서 보고한 첫 업무는 엉망이었고, 호되게 질책 받았다. 덩달아 우리 부서 모두 내가 벌인 업무를 뒤처리하느라 고생하게 되었다. 팀에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피해를 준 것이다. 이후 경험 많은 행정병에게 내가 처음 하는 업무라는 것을 알리며 도움을 청하자, 내게 보고서 별 기안 양식, 기존 보고자료들과 전자결재 시스템 사용법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렇게 되자 시행착오의 기간과 과정을 줄이고 서로를 이해하며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또한, 카네기는 "상대방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주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돋보이고자 남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태도 대신, 팀원들에게 자발적으로 의견을 내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습관적으로 ‘저는 잘 모릅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말을 하고자 의식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런 말을 들은 상대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 반응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며 나를 무시합니다. 두 번째 반응은 나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을 찾아주려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후자의 반응을 보인다. 사람은 진실로 타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고, 특히 겸손한 상대에게 마음을 더 쉽게 여는 것 같다. 만약 나의 겸손에 전자처럼 대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겸손은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존감도 높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남을 돕고 싶어 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 겸손한 태도로 타인을 대할 때, 상대방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는 신뢰와 유대를 쌓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더 깊고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치우침이 없는 마음가짐을 수행하는 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