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aS 산업의 구조적 전환과 생존 전략
2011년, 넷스케이프를 창업하고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벤처캐피털 a16z를 이끌던 마크 앤드리슨은 월스트리트저널에 한 편의 글을 기고했다.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서점의 거인 보더스는 아마존에,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에, 전통 레코드사들은 스포티파이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프트웨어는 인간의 업무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 과정에서 SaaS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탄생하여 수천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025년,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이 예언했던 "AI is eating software"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 SAP의 주가가 17개월 내 최저치를 기록하고, 세일즈포스와 워크데이, 어도비 같은 SaaS 거인들의 시가총액이 수천억 달러씩 증발하고 있다. 스웨덴의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는 1,200개의 SaaS 구독을 해지하며 'SaaS 독립'을 선언했고, 카카오는 6년간의 대장정 끝에 오라클로부터의 탈출을 완료했다.
이 글은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조적 대전환을 분석한다. 왜 20년간 승승장구하던 SaaS 기업들이 갑자기 위기에 처했는지, AI가 어떻게 소프트웨어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지, 그리고 이 격변의 시대에 어떤 기업이 살아남고 어떤 기업이 도태될 것인지를 살펴본다. 실리콘밸리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벤처 투자자의 통찰과 함께,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2025년 1월 24일, 유럽 테크 산업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SAP의 주가가 17개월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독일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별명답게 한때 유럽 시가총액 1위를 차지했던 이 전사자원관리 소프트웨어의 대명사가 불과 11개월 만에 시가총액 1,300억 달러가 증발하는 충격적인 하락세를 보인 것이다. 주가는 고점 대비 25%가량 떨어졌고, 새롭게 유럽 시총 1위에 오른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과는 두 배 가까운 격차가 벌어졌다.
SAP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스닥 100 지수가 상승세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SaaS 기업들의 주가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고객관계관리 소프트웨어의 절대 강자 세일즈포스는 52주 최고가 367달러에서 228달러 수준으로 38%가량 하락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대명사 어도비는 466달러에서 300달러로 36% 떨어졌고, 인사관리 시스템의 선두주자 워크데이 역시 284달러에서 191달러로 33% 하락했다. IT 서비스 관리 플랫폼 서비스나우는 더 극적이어서 240달러에서 132달러로 45%나 폭락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형 SaaS 기업들이 줄줄이 30%에서 45%에 달하는 주가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주 전반이 호황을 누리는 시장에서 유독 소프트웨어 구독 서비스 기업들만 역주행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2V 리서치의 애널리스트 조르디 비서는 이 매도세를 "AI 주도 수요 억제의 초기 단계"로 진단했다. AI가 화이트칼라 업무를 자동화하면서 전통적 SaaS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구조적으로 감소한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바노르 SIM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안젤로 메다 역시 "AI로 인해 많은 모듈의 개발과 복제가 쉬워지면서 서비스 평균 판매가격과 청구 가능 시간이 감소할 위험"을 경고했다.
이러한 동반 하락의 배경에는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일시적 조정이 아닌 보다 구조적인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SaaS 산업의 근본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주가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더 이상 고가의 구독료를 내고 외부 소프트웨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AI 에이전트가 기존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 투자 심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 하락이 실적 부진이 아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SaaS 기업들은 여전히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이들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CNN 비즈니스는 "소프트웨어 주식이 침체에 빠졌다. AI를 탓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현상을 조명했고, CNBC는 "소프트웨어 주식이 AI 공포로 폭락하며 혁신가의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SAP의 주가 폭락은 단일 기업의 위기가 아니라 수십 년간 기업 IT 인프라를 지배해온 소프트웨어 왕국 전체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신호탄으로 읽혀야 한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킨 시대가 저물고, 이제 AI가 소프트웨어를 집어삼키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SaaS가 무엇인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SaaS는 Software as a Service의 약자로, 소프트웨어를 구독 형태로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말한다. 과거에는 기업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려면 CD나 디스크로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각 컴퓨터에 설치해야 했다. 이를 온프레미스 방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SaaS 모델에서는 소프트웨어가 클라우드에서 운영되고, 사용자는 인터넷을 통해 접속하여 월간 또는 연간 구독료를 내고 서비스를 이용한다.
1999년, 오라클 출신의 마크 베니오프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아파트에서 세일즈포스를 창업했다. 그가 내건 슬로건은 "No Software"였다. 더 이상 복잡한 설치 과정이나 값비싼 하드웨어 구매 없이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고급 영업 관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이 SaaS 혁명의 시작이었다.
SaaS 모델은 기업들에게 여러 가지 장점을 제공했다. 첫째, 초기 도입 비용이 크게 낮아졌다. 과거에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구매, 서버 설치, 전문 인력 고용 등에 수백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SaaS는 월 구독료만 내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둘째, 업데이트와 유지보수가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사용자는 항상 최신 버전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었고, IT 부서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셋째, 확장성이 뛰어났다. 사용자 수가 늘어나면 구독을 추가하면 되고, 줄어들면 해지하면 그만이었다.
마크 앤드리슨이 2011년 "Software is eating the world"라는 글을 기고한 배경에는 이러한 SaaS 모델의 급성장이 있었다. 그는 "컴퓨터 혁명 60년, 마이크로프로세서 발명 40년, 현대 인터넷 등장 20년이 지난 지금, 소프트웨어를 통해 산업을 변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술이 마침내 작동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서점의 거인 보더스는 아마존에 무릎을 꿇었고,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전통 레코드사들은 스포티파이에 시장을 빼앗겼다.
SaaS 산업의 성장세는 폭발적이었다. 2010년 약 100억 달러 규모였던 글로벌 SaaS 시장은 2025년 3,150억 달러로 성장하여 15년 만에 31배 이상 커졌다. 평균적인 기업이 사용하는 SaaS 애플리케이션의 수는 106개에 달하며, 대기업의 경우 수백 개의 SaaS를 동시에 구독하는 경우도 흔하다.
대표적인 SaaS 기업들을 살펴보면 이 산업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세일즈포스는 고객관계관리, 즉 CRM 분야의 절대 강자로 영업팀이 고객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능을 제공한다.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야의 전통적 강자로, 기업의 핵심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인프라를 제공한다. SAP는 전사자원관리 즉 ERP 분야의 선두주자로, 기업의 재무, 인사, 생산, 물류 등 모든 업무 프로세스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어도비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이미지 편집 도구를 구독 모델로 전환하여 크리에이티브 분야의 SaaS 혁신을 이끌었다. 워크데이는 인사관리와 재무관리 클라우드 솔루션을, 서비스나우는 IT 서비스 관리 플랫폼을 제공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지배적 위치를 구축했다.
이 SaaS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기본적으로 직원 한 명당 구독료를 받는 시트당 과금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서 세일즈포스를 100명이 사용한다면 100개의 시트에 대한 구독료를 지불하는 식이다. 이 모델은 SaaS 기업들에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수익을 보장했다. 고객 기업의 직원 수가 늘어나면 구독도 늘어났고, 해지율만 낮게 유지하면 매출은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 황금기의 모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구독하는 SaaS가 늘어나면서 구독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서로 다른 SaaS들 사이에 데이터가 분절되는 파편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를 보통 '스위블 체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회전의자에 앉아 여러 대의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를 조작해야 하는 불편함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AI의 등장이었다. AI가 소프트웨어 개발을 민주화하고 에이전트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SaaS의 핵심 전제였던 "소프트웨어 개발은 어렵고 비싸다"는 명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8월, 스웨덴의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의 CEO 세바스찬 시미아트코스키가 투자자 콜에서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우리는 세일즈포스를 종료했다. 내부 추산으로 약 1,200개의 SaaS를 해지했다." 클라르나가 SaaS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클라르나는 바이나우페이레이터, 즉 먼저 사고 나중에 결제하는 시스템을 대중화한 핀테크 기업으로, 전 세계 60만 개 이상의 소매업체와 1억 5천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한 거대 기업이다. 이런 규모의 기업이 수천 개의 SaaS 구독을 해지하고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나선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시미아트코스키 CEO의 설명은 명쾌했다. 그는 "구글 검색과 AI는 지식 그래프로 구동된다. 위키피디아의 인류의 집합된 지식은 지식 그래프다. 이제 클라르나의 조직 지식도 지식 그래프다"라고 말했다. 클라르나는 Neo4j라는 그래프 기반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Kiki'라는 자체 지식 그래프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 위에서 AI를 활용하여 기존 SaaS들이 제공하던 기능을 내재화한 것이다.
시미아트코스키는 "AI 덕분에 가볍고 품질 좋은 기술 스택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AI 코딩 도구를 활용하여 기존에는 외부 서비스에 의존하던 기능들을 직접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선스 비용 절감도 중요한 목표였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데이터의 통합과 표준화였다. 수백 개의 SaaS에 흩어져 있던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함으로써 AI가 더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클라르나의 직원 수는 2022년 5,527명에서 2025년 약 3,000명으로 46%가량 감소했다. 신규 채용을 중단하고 자연 감소를 기다리는 전략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였다. 클라르나의 AI 챗봇은 첫 달에 월 230만 건의 고객 상담을 처리했는데, 이는 700명의 풀타임 상담원이 처리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놀랍게도 고객 만족도는 인간 상담원의 4.2점보다 AI 상담원의 4.4점이 더 높았다. 평균 문제 해결 시간도 11분에서 2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재무적 성과도 극적이었다. 연간 4,000만 달러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었고, 2024년 클라르나는 2,1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는 2023년 2억 4,400만 달러의 적자에서 극적으로 반전한 수치였다. 직원 1인당 생산성은 네 배 이상 향상되었다.
물론 클라르나의 사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클라르나가 IT 기업이기 때문에 이런 내재화가 가능했던 것이며, 일반 기업에서는 재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클라르나가 2025년 기업 공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AI 기업, AI를 잘 다루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기업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실제로 시미아트코스키 CEO 본인도 이러한 소식을 외부에 알리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히며, 세일즈포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클라르나의 성공 사례는 시장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AI를 활용하면 기업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입증된 것이다. 클라르나 쇼크 이후 많은 기업들이 SaaS 구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SaaS 기업들의 주가 하락이 본격화되었다.
클라르나의 SaaS 독립이 클라르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AI 모델 기업인 앤스로픽이 AI 에이전트 도구인 클라우드 코워크를 공개한 것이다.
클라우드 코워크는 컴퓨터를 AI 에이전트가 직접 조작하도록 하는 도구로, 오픈AI의 오퍼레이터와 비슷한 개념이다. 사용자가 자연어로 지시하면 AI가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여 파일을 정리하고, 영수증을 스프레드시트로 만들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자동으로 수행한다. 수십 개의 스타트업들이 각자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을 하나의 도구가 기본 기능으로 번들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품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충격적이었다. 앤스로픽은 클라우드 코워크 개발에 1주일 반, 그러니까 열흘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보통 소프트웨어 하나를 만드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속도다.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이런 기술적 해자를 바탕으로 다른 기업들이 쉽게 만들지 못하는 것들을 제공해왔는데, 이 해자가 AI 코딩 도구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앤스로픽은 자사의 클로드 오퍼스 4.5라는 AI 코딩 도구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주는 함의는 두 가지다. 첫째, 과거에 개발자 10명 정도가 작업하던 것을 이제 한두 명이 개발하고 나머지는 AI 코딩 도구에 맡겨 생산성을 극도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어로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변화는 '바이브 코딩'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2025년 2월 6일,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이자 전 테슬라 AI 디렉터인 안드레이 카파시가 X에 이 개념을 소개했다. "바이브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지수적 성장을 받아들이며, 코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새로운 코딩 방식이라는 것이다.
바이브 코딩에서는 개발자가 코드를 한 줄 한 줄 직접 작성하지 않는다. AI가 생성한 코드의 차이점을 일일이 검토하지도 않고 그냥 "모두 수락" 버튼을 누른다. 에러가 발생하면 에러 메시지를 복사해서 AI에게 붙여넣기만 하면 대부분 해결된다. 카파시는 커서 컴포저와 클로드 소넷 같은 LLM이 너무 좋아져서 이런 방식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 개념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었는지는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Y컴비네이터 2025년 겨울 배치 스타트업들의 25%가 코드베이스의 95%가 AI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밝혔다. 2025년 3월에는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되었다.
AI 코딩 도구의 발전 속도는 놀랍다. 깃허브 코파일럿은 1,5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고 포춘 100대 기업의 90%가 채택했으며, 개발자 생산성이 55% 향상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커서는 99억 달러의 기업가치와 5억 달러 이상의 연간 반복 매출을 달성했으며, 8개의 AI 에이전트를 병렬로 실행할 수 있다. 데빈은 세계 최초의 완전 자율 AI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표방하며 골드만삭스가 최초의 AI 직원으로 도입했다.
클라우드 코워크 출시 다음 날 SaaS 주식들이 15% 하락했고, 인튜이트는 2022년 이후 최악의 주간 성과를 기록했다. AI 코딩 도구가 소프트웨어 개발의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기존 SaaS 기업들의 기술적 해자가 빠르게 침식되고 있음을 시장이 반영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IT 기업이 아닌 기업들에게도 소프트웨어를 내재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물론 전산 팀이 한두 명 있는 회사에서 모든 영업 시스템을 AI로 만들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전산 팀을 갖춘 회사에서는 스스로 AI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클라르나의 사례가 해외의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전자신문은 카카오가 6년 만에 탈오라클을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야의 전통적 강자로, 기업의 핵심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인프라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오라클은 기업들에게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소프트웨어 도입 비용의 22%를 매년 유지보수 비용으로 가져가는 구조다. 5년이면 초기 구매 비용을 초과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탈오라클을 해야 한다는 열풍이 2000년대와 2010년대에도 불었다.
카카오는 2019년 상반기에 글리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글리제는 지구에서 20광년 떨어진 적색 왜성의 이름이다. 지구 밖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요건을 갖춘 행성으로 알려진 이 별의 이름을 프로젝트명으로 삼은 것은, 오라클을 벗어나 다른 시스템으로 간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데이터베이스를 옮기는 것이 마치 행성을 옮기는 것처럼 어렵다는 뜻도 담겨 있다.
실제로 데이터베이스 마이그레이션은 기업 IT에서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작업 중 하나다. 핵심 데이터가 저장된 시스템을 교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해도 전체 서비스가 중단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카오는 6년간의 대장정 끝에 탈오라클을 완료했다. 카카오톡을 포함한 100여 개 시스템을 MySQL, PostgreSQL, MongoDB, EDB 등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로 전환한 것이다.
카카오는 연간 수십억 원의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했고, 이를 AI 등 신기술 연구개발에 재투자하고 있다. 오라클이라는 외부 의존성을 제거하고 자체 기술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향후 AI 시대에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이런 움직임은 글로벌하게도 가속화되고 있다. 클라우드 송환이라 불리는 트렌드다. 클라우드 송환은 퍼블릭 클라우드로 이전했던 워크로드를 다시 자체 데이터센터나 프라이빗 클라우드로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바클레이스의 2024년 CIO 조사에 따르면 86%의 CIO가 일부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를 온프레미스로 이전할 계획이며, 이는 역대 최고 수치다.
대표적인 사례가 37시그널스다. 베이스캠프와 헤이 이메일을 만든 이 회사는 AWS를 탈출해 자체 서버로 이전하며 연간 200만 달러, 5년간 1,000만 달러 이상을 절감할 것으로 예상했다. 창업자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핸슨은 "클라우드의 환상에서 벗어날 때"라고 선언했다.
모든 기업이 탈SaaS를 추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클라르나나 카카오처럼 자체 개발 역량이 있는 기업,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기업, 데이터 통합과 AI 활용이 핵심 경쟁력인 기업에서 이런 전략이 유효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SaaS 내재화가 AI 시대에 점점 더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SaaS 시장의 변화는 기존 대기업들의 약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스타트업들이 등장하여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컴파운드 스타트업이다.
컴파운드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은 리플링의 CEO 파커 콘래드가 만들었다. 기존의 스타트업 조언은 "하나에 집중하라"였다. 한 가지 문제를 잘 해결하는 제품을 만들고, 그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확보한 다음 인접 시장으로 확장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콘래드는 이 조언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기존 조언 때문에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미개척 제품 시장 적합성의 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컴파운드 스타트업은 단일 포인트 솔루션 대신 여러 통합 제품을 병렬로 개발한다. 리플링은 HR, IT, 재무를 통합하는 13개 이상의 제품을 단일 플랫폼에서 제공하며 12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달성했다. 직원 온보딩 한 번으로 급여, 복리후생, 장비 지급, 앱 접근 권한이 모두 자동 설정된다. 퇴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델이 등장한 배경에는 SaaS 파편화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균 기업이 106개의 SaaS를 사용하고, 대기업은 수백 개를 구독한다. 클라르나처럼 1,200개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구독이 늘어나면서 소프트웨어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파편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인사 시스템의 데이터가 재무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고, 영업 시스템의 고객 정보가 마케팅 시스템과 동기화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스위블 체어라는 표현이 이 상황을 잘 묘사한다. 회전의자에 앉아 여러 대의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를 조작해야 하는 불편함을 말한다. 컴파운드 스타트업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의 통합된 플랫폼에서 여러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데이터 사일로를 없애고 업무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AI 네이티브 스타트업의 등장도 주목할 만하다. AI 네이티브 스타트업은 처음부터 AI를 핵심으로 설계된 기업을 말한다. 기존 SaaS에 AI 기능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AI가 제품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인 기업이다.
이들 기업의 성과는 놀랍다. 직원당 매출이 평균 348만 달러에 달하며, 유니콘 기업가치 도달 시간은 기존 9년에서 평균 2년으로 단축되었다. 투자 밸류에이션도 매출 대비 15배에서 150배로, 전통 SaaS의 10배에서 20배를 크게 상회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고객관계관리 분야에서는 리보라는 스타트업들이 세일즈포스가 하던 일을 AI로 대체하겠다고 나섰다. 고객 발굴, 아웃리치, 판매, 관계 관리까지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이다. 쇼핑몰 관리 분야에서는 리본이 쇼피파이 플랫폼 입점 매장에게 고객 관리, 멤버십, 추천, 로열티 등 다양한 기능을 한 번에 제공한다.
이런 스타트업들이 기존 SaaS 기업들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과거에는 세일즈포스, 워크데이, 서비스나우 각각에 구독료를 내야 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통합 플랫폼으로 같은 기능을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I가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을 낮추면서 이런 통합 솔루션의 등장이 가속화되고 있다.
SaaS 기업들의 전통적인 수익 모델은 시트당 과금이다. 직원 한 명당 월간 또는 연간 구독료를 받는 방식이다. 세일즈포스를 100명이 사용하면 100개 시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식이다. 이 모델은 SaaS 기업들에게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했다.
그런데 AI 에이전트의 등장으로 이 모델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했다. 만약 AI 에이전트가 인간의 업무를 대체한다면, 필요한 시트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라르나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AI 챗봇이 700명의 상담원을 대체했다면, 그만큼의 SaaS 시트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Paid.ai의 분석은 냉혹하다. "AI 에이전트가 더 성공할수록, 시트당 과금의 경제성은 더 나빠진다." AI가 업무를 자동화할수록 인간 직원 수가 줄어들고, 시트 수요도 감소한다는 논리다. 이것이 투자자들이 SaaS 주식을 매도하는 핵심 이유 중 하나다.
주요 SaaS 기업들은 다양한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365 코파일럿의 가격을 월 30달러에서 중소기업용 21달러로 인하했고, 사용량 기반의 코파일럿 크레딧 모델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세일즈포스의 에이전트포스는 초기에 대화당 2달러를 과금했다가 행동당 과금 방식인 플렉스 크레딧으로 전환했다. 세일즈포스는 2026년 말까지 10억 개의 AI 에이전트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비스나우는 시트 기반 모델을 유지하면서 토큰 소비 방식의 어시스트 팩을 추가했다. 스노우플레이크는 처음부터 소비 기반 모델을 채택했는데, 이 선택이 AI 시대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코텍스 AI를 통해 주간 7,300개 이상의 고객이 AI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
IDC는 2028년까지 순수 좌석 기반 가격 모델이 사라지고 70%의 벤더가 새로운 가치 지표로 전환할 것으로 예측한다. 새로운 가격 모델로는 아웃컴 기반, 즉 결과에 따라 과금하는 방식, 소비 기반 즉 사용량에 따라 과금하는 방식, 하이브리드 즉 기본료에 사용량을 더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이 전환은 SaaS 기업들에게 딜레마다. 기존 시트 기반 모델은 예측 가능한 반복 매출을 보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모델로 전환하면 매출 변동성이 커지고 재무 예측이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기존 모델을 고수하면 AI 시대에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 벤처 투자자는 "2027년 정도가 되면 AI 에이전트들이 기업의 민감한 정보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소 형태의 SaaS 기업들은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AI 에이전트가 기업의 데이터에 직접 접근하여 업무를 처리하게 되면, 중간에서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던 SaaS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1997년에 제시한 혁신가의 딜레마가 지금 SaaS 산업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혁신가의 딜레마란 성공적인 기업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해도 시장 리더십을 잃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기존 기업은 가장 중요한 고객을 위한 지속적 혁신에 집중하지만, 파괴적 혁신은 초기에 열등해 보이다가 급속히 성장해 주류 시장을 장악한다.
베인앤컴퍼니의 2025년 기술 보고서는 SaaS 기업을 네 가지 시나리오로 분류한다. 첫째, 핵심 성채라 불리는 기업들은 인간 판단에 의존하고 AI 침투가 낮다. 프로코어나 메디데이터 같은 기업이 여기 해당한다. 둘째, 열린 문이라 불리는 기업들은 AI 에이전트가 노출된 API를 활용할 수 있다. 허브스팟이나 먼데이닷컴이 여기 해당한다. 셋째, 금광이라 불리는 기업들은 독점 데이터로 전체 자동화를 선점한다. 커서나 가이드와이어가 여기 해당한다. 넷째, 전쟁터라 불리는 기업들은 가장 취약하고 치열한 경쟁에 처해 있다. 인터컴의 1티어 지원이나 ADP가 여기 해당한다.
코슬라 벤처스의 창립자 비노드 코슬라는 더 급진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향후 5년에서 10년 내 15%에서 20% 마진을 내는 모든 서비스 운영이 파괴될 것이다. AI 통합으로 마진이 70%에서 80%로 급증할 수 있다." 오픈AI의 최초 기관 투자자였던 코슬라 벤처스는 이제 성숙한 전통 기업을 인수해 AI로 변환하는 AI-인퓨즈드 롤업 전략을 실험 중이다.
대형 SaaS 기업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SAP는 주울 AI를 통해 2,100개 이상의 AI 스킬을 보유하고 업무 생산성 75% 향상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세일즈포스의 에이전트포스는 아틀라스 리즈닝 엔진으로 다단계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어도비는 파이어플라이와 센세이 듀얼 엔진으로 1억 2,500만 달러의 AI 연간 반복 매출을 기록했다. 워크데이는 세계 최대이자 가장 청정한 HR 및 재무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일루미네이트 플랫폼을 구축했다.
그러나 디인포메이션은 이런 대형 SaaS 기업들의 AI 에이전트가 차별화되지 않고 고만고만하다고 보도했다. 많은 기업들이 오픈AI와 앤스로픽 모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SaaS 기업들이 AI 에이전트를 만든다 해도 AI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한 기술력이 없다면 그 상당 부분의 마진을 AI 기업에게 내줄 수밖에 없다.
생존할 기업과 도태될 기업의 유형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생존할 기업은 복제 불가능한 데이터 해자를 보유한 기업, 산업 특화 버티컬 SaaS 리더, 플랫폼 및 생태계 오너, 처음부터 AI 중심으로 설계된 AI 네이티브 기업이다. 도태될 기업은 AI로 쉽게 복제 가능한 단순 기능 래퍼, 차별화 없는 범용 호리즌탈 솔루션, 레거시 통합에 의존하는 기업, 좌석 기반 가격에 고착된 기업이다.
가트너는 2026년까지 40%의 엔터프라이즈 앱에 AI 에이전트가 탑재될 것으로 예측한다. 현재 5% 미만에서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다. 최적 시나리오에서 2035년 에이전틱 AI는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매출의 30%, 4,500억 달러 이상을 창출할 수 있다.
핵심 전략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데이터를 소유하라. 독점 데이터가 AI 시대의 궁극적 해자다. 워크데이가 세계 최대의 HR 및 재무 데이터셋을 강조하는 이유다.
둘째, 표준을 선도하라. 에이전트 프로토콜과 신뢰 레이어에서 앞서가야 한다. 누가 AI 에이전트의 표준을 정하느냐가 향후 시장 지배력을 결정할 것이다.
셋째, 결과에 가격을 매겨라. 접속이 아닌 성과로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시트당 과금에서 성과 기반 과금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마크 앤드리슨이 2011년 예언한 "Software is eating the world"는 실현되었다. 소프트웨어는 실제로 세상의 모든 산업을 변혁했다. 서점, 비디오 대여, 음반, 택시, 호텔 등 수많은 전통 산업이 소프트웨어 기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SaaS 기업들은 이 물결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었다. "AI is eating software." AI가 소프트웨어를 집어삼키고 있다. SAP의 시가총액 1,300억 달러 증발, 세일즈포스와 워크데이의 30%대 주가 하락, 클라르나의 1,200개 SaaS 해지 선언, 카카오의 6년간 탈오라클 완료, 앤스로픽의 10일 만에 AI 에이전트 개발 성공.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기존 SaaS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 위협이다.
그러나 SaaS는 죽지 않았다. 진화하고 있다. 베인앤컴퍼니가 지적했듯이 "AI가 SaaS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플레이북을 가진 기업이 다음 SaaS 물결을 형성할 것"이다. 컴파운드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AI 네이티브 기업이 부상하며, 기존 대기업들도 AI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 격변의 시대에 변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명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변신의 방향은 선택할 수 있다. 데이터 해자를 구축하고, 기술적 차별화를 이루며, 버티컬 깊이를 확보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것이다. 단순 기능 래퍼에 머물고, 범용 솔루션에 안주하며, 시트당 과금에 고착된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파괴는 필수다. AI의 물결은 막을 수 없다. 이 변화를 위협이 아닌 기회로 활용하여 더 자동화되고, 더 유연하며, 더 효율적인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기업이 다음 시대의 승자가 될 것이다. 소프트웨어 왕국의 몰락은 곧 새로운 왕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 왕국의 주인이 될 것인지, 몰락하는 왕국과 함께 사라질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