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의 가치, 회복탄력성, 그리고 공감의 힘
지금 이 순간, 인류는 하나의 거대한 배에 함께 타고 있다. 그 배의 이름은 '인공지능 시대'다. 도착지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아무도 모른다. 항로를 정확히 아는 선장도 없고, 신뢰할 만한 해도도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이 배가 이미 출항했다는 사실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은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공상과학 영화 속 소재이거나, 연구실에서 논문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ChatGPT가 등장하고, 에이전틱 AI가 실제 업무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AI는 이제 정보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행동을 취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코드를 짜고, 보고서를 쓰고, 디자인을 하고, 심지어 의사결정까지 보조한다. 인간이 오랜 시간 학습하고 훈련해서 얻었던 능력들이 순식간에 기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의 속도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전환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불확실성이다. 이러한 상황을 인간이 처음 겪는 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들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완전한 미지의 세상이었다.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 어떤 유혹이 기다릴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 자신을 어디로 떠밀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인류가 정확히 그 상황이다.
미래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될 리가 없다. 인공지능으로 가면 갈수록 불확실성은 커지고, 예측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 방향, 각국의 규제 정책, 사회적 수용 속도, 경제 구조의 변화 같은 수많은 변수가 얽혀 있어서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불확실한 항해에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목적지를 정확히 아는 능력일까, 아니면 어떤 바다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대체할 수 없는 것, 오히려 기계가 똑똑해질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호모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인간'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지능의 측면에서 AI는 이미 인간을 추월했다. 정보의 양, 처리 속도, 논리적 정확성에서 인간은 기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인간을 호모파베르, '만드는 인간'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에이전틱 AI의 등장으로 만드는 능력마저 기계가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사를 만드는 능력, 즉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이다.
누군가가 "10년에 걸쳐 블로그 글을 1만 개 썼다"고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감탄한다. 1만 개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시간과 노력, 수없이 많은 새벽의 고민, 한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 초반의 서투른 글에서 점차 성장해온 궤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겪었을 슬럼프와 자기 의심, 그리고 그것을 넘어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을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AI로 블로그 글 1만 개를 만들었다"고 말하면 어떨까. 반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 그래요?"라는 무덤덤한 반응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기술적으로는 대단할 수 있다. 프롬프트를 설계하고, 품질을 관리하고, 시스템을 구축한 것 자체가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그 결과물에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캐릭터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수 년 간 캐릭터 1천 개를 직접 디자인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창의력과 끈기에 경외감을 느낀다. 1천 개의 캐릭터 각각에 담긴 고유한 이야기, 수십 번 수정을 거친 라인 하나, 밤새 레퍼런스를 찾아 헤맨 시간들이 그 숫자 뒤에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하지만 "AI로 캐릭터 1천 개를 생성했다"고 하면, 기술적 효율성은 인정하더라도 같은 종류의 존경은 따라오지 않는다.
이 차이는 매우 본질적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물에 이르는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인간 인지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인간이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는 선택이 있다. 이 단어를 쓸 것인가 저 단어를 쓸 것인가, 이 색을 칠할 것인가 저 색을 칠할 것인가, 오늘 포기할 것인가 내일도 이어갈 것인가. 매 순간 수많은 갈림길에서 하나를 고르는 선택의 연속이 곧 그 사람의 서사가 된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완성된 글이나 그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간의 서사인 것이다.
AI에게는 이 서사가 없다. AI는 프롬프트를 받으면 확률적으로 가장 적절한 다음 단어를 선택할 뿐이다. 거기에 갈등도 없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없으며, 자기 의심을 이겨낸 용기도 없다. 결과물의 품질은 인간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 우수할 수 있지만, 과정이라는 서사가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인간이 가진 첫 번째 고유한 조건이다. 호모나랜스, 서사를 만드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이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타인과 나누며, 서로의 과정에 공감하는 존재다. AI가 아무리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더라도, 그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의 인간적 서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실제로 이 현상은 이미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AI가 그린 그림이 미술 대회에서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다. 기술적으로 그 그림이 열등해서가 아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수개월간 고민하고 연습하고 수정한 과정에 대한 존중이 훼손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AI가 쓴 소설이 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때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사람들이 문제 삼은 것은 소설의 품질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행위에 내재된 인간적 고투의 부재였다.
결국 AI 시대에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그것에 도달했는가'에서 나온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AI가 더 빠르고 정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방향을 바꾸고, 다시 걷는 인간의 여정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가치다. 오디세우스의 10년 귀향길이 위대한 것은 이타카에 도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10년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정에 가치를 둔다는 것은 곧 실패를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접 블로그 글 1만 개를 쓰는 과정에는 반드시 실패가 포함된다. 100번째 글에서 방향을 잃기도 하고, 3천 번째 글 즈음에서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며, 5천 번째 글에서는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캐릭터 1천 개를 그리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200번째 캐릭터에서 창의력이 바닥났다고 느끼고, 500번째에서는 자신의 실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것. 이것이 회복탄력성, 리질리언스(Resilience)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생존 능력이다.
이 점은 어떤 분야에서든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분명해진다. 같은 업계에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10년 후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과 몇 년 만에 사라지는 사람의 차이는 대부분 능력이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프로 영역에서는 실력의 편차가 크지 않다. 결정적인 차이는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속도에 있다. 오래 가는 사람은 위기가 와도 비교적 빠르게 털고 일어난다. 잠시 쉬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반면 빨리 사라지는 사람은 같은 수준의 슬럼프가 1년, 2년으로 길어진다.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 이후의 시간이 커리어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직업, 모든 커리어에 적용되는 원리다. 실패는 누구나 한다. 완벽한 커리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가끔씩 자신이 과거에 내린 판단이나 했던 말을 후회하며 이불킥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후회의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느냐다. 잠시 괴로워하고, 교훈을 얻고, 그리고 넘어가는 사람은 다음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하나의 실패에 몇 년을 집착하며 후회하는 사람은 그 사이에 지나가는 수많은 기회를 놓친다. 과거는 타임머신이 없는 이상 바꿀 수 없다. 모든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인지 능력은 바로 이 회복탄력성이다.
AI 시대에 회복탄력성이 특별히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있다. 미지의 세계로 갈수록 실패의 확률은 급격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세상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에 갈 수 있고, 성실하게 일하면 승진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AI가 기존 산업 구조를 뿌리째 흔들면서 이 규칙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신규 채용이 올스톱되는 분야가 늘어나고, 10년간 쌓은 전문성이 하루아침에 AI에 의해 대체 가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한 번의 실패에 몇 년을 잡혀 있으면,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AI 시대는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요구할 것이고, 그 도전 앞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후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서느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회복탄력성이 단순한 정신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의 유연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디세우스를 묘사할 때 '안드라 폴리트로폰 ἄνδρα πολύτροπον'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여러 능력이 있는 사람', 더 정확히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꿀 수 있는 사람. 미지의 세상에서 예측이 불가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정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사고를 전환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이다.
AI에게는 이런 의미의 회복탄력성이 없다. AI는 오류가 나면 재시작하거나 코드를 수정하면 된다. 거기에는 좌절도, 자기 의심도, 두려움도 없다. 하지만 인간이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리고 바로 그 고통을 통과하는 경험이 다음 도전에서의 내구력을 만든다. AI가 프로그래밍으로 얻는 '오류 복구'와 인간이 삶 속에서 체득하는 '회복탄력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결국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계획이 아니다. 계획은 어차피 깨진다. 필요한 것은 계획이 깨졌을 때 다시 세울 수 있는 능력, 방향이 바뀌었을 때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 그리고 실패의 고통 속에서도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힘이다. 블로그 글 1만 개를 직접 쓴 사람이 존경받는 이유는 1만 개라는 숫자가 아니다. 중간에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다시 일어나 키보드 앞에 앉았다는 사실, 바로 그 회복탄력성 때문이다.
AI는 주어진 목표를 최적화하는 데 탁월하다. "이 데이터를 분석해서 매출을 10% 올릴 수 있는 전략을 제안해라"라고 하면, AI는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AI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매출을 올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주인공 디디와 고고는 고도라는 존재를 끝없이 기다린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는지조차 명확히 모른다. 그리고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겉보기에 허무한 이 이야기가 인류 최고의 희곡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다림의 대상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동물은 자신만의 고도를 만들 수 없다. 동물의 기다림은 본능에 묶여 있다. 배고픈 사자가 기다리는 것은 사냥감이고, 꽃이 기다리는 것은 햇빛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을 넘어서는 목표를 상상하고 설정할 수 있다. 커리어가 될 수도 있고, 예술적 성취가 될 수도 있으며, 사회적 기여가 될 수도 있다. 각자 자신만의 고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큰 위대함이다.
그리고 여기서 과정의 가치와 회복탄력성이 다시 연결된다. 나만의 고도를 만든다는 것은 곧 그것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결심이다. 그 길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겠다는 약속이다. 블로그 글 1만 개를 쓰겠다고 목표를 세운 사람은 자신만의 고도를 만든 것이다. 캐릭터 1천 개를 디자인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자체보다,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 그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도가 실제로 나타나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속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발견된 얼어 죽은 표범처럼, 목표에 도달한 순간 "그래서 이제 뭐하지?"라는 공허함이 찾아올 수 있다. 인생에서의 목표는 항상 우리보다 살짝 앞에 나와 있는 것이 좋다. 내가 내 목표를 추월하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하는 또 다른 과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이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AI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인간보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목표 자체를 만드는 것, 그 목표에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한 여정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철저히 인간의 영역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최상단에 있는 자아실현은,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자동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만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로마 제국의 교훈이 여기서 울려 퍼진다. 노예 노동이라는 무료 노동력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로마 시민들의 일자리가 사라졌을 때, 로마는 기본 소득과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의 기회를 잃은 시민들은 타인의 불행에서 행복을 찾았다.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구경하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 때, 인간은 타인의 불행으로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는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AI 시대에 같은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 AI가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고, 기본소득이 제공되어 의식주가 해결되더라도, 자아실현의 경로가 막히면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만의 고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AI가 만들어주는 목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설정하고, 내 과정을 통해 걸어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그 여정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 된다.
지금 AI를 만들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리더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맹점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는 인류 역사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 대부분이 에너지 부족에서 비롯되었으며, 범용 인공지능이 핵융합을 가능하게 하면 무한한 에너지가 생기고, 그러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호모파베르의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을 수학과 확률과 기술로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접근. 막스 프리시의 소설 '호모파베르'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방정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듯, 세상은 방정식이 아니다.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고, 확률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이 20대에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흙탕에서 굴러본 적이 없다.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가 없다. "AI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지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면 "알아서 하면 된다", "30년 지나면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 '30년'이라는 단순한 숫자 뒤에는 가장이 있고, 식구가 있고, 아이들의 학비를 내야 하는 40대, 50대 아버지의 인생이 있다.
특히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이 문제는 더욱 절박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놀아야 할 시기에 말도 안 되는 양의 공부를 강요받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대학 입시에 쏟아부은 20대의 청년들이 이제 드디어 사회에 나가려는 순간, AI가 등장해서 신규 채용이 올스톱되는 현실이다. 이것을 숫자와 통계로만 바라보는 시선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일리아스가 2,500년 전에 제시한 해법이 놀랍도록 현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분노로 시작한다. 아킬레스의 분노. 그리고 그 분노는 전쟁과 파괴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서사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혀 다른 해법이 제시된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스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너도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해서, 내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 그 순간 분노로 가득했던 아킬레스가 눈물을 흘린다. 연민과 자비를 느낀 것이다. 적군의 왕에게 공감한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 이전의 모든 인류 서사에서는 분노의 해결책이 타인의 불행이었다. 내가 화나니까 저 사람을 죽이고, 저 나라를 정복하고, 저 집단을 없애는 것이 당연한 해법이었다. 호메로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솔루션을 제안한 것이다. 상대방도 NPC가 아니라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플레이어라는 인식, 그리고 그 인식에서 비롯되는 연민이다.
AI 시대에 이것은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한 존재가 나왔을 때, 그 인공지능이 인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AI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지구 생명체 전체에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싸우고, 약탈하고, 지구의 다른 생명체 대부분을 파괴해왔으니까. 공리주의적 계산으로만 보면, 지구 빼기 인간이 더 나은 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AI가 인간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아무 설명서 없이 인생이라는 기계를 작동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준다면. 인간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잘 몰라서 그랬다는 것을 알아준다면 말이다.
결국 AI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는 조건은 하나의 원 위에 놓여 있다. 과정에 가치를 두는 것,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 나만의 목표를 만드는 능력,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로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블로그 글 1만 개를 직접 쓰는 사람과 캐릭터 1천 개를 직접 디자인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회복하면서, 자신만의 고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타인의 비슷한 고투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매번의 실패와 재도전을 통해, 창작이라는 여정의 어려움을 체감하고, 같은 길을 걷는 다른 창작자에 대한 공감말이다.
AI는 블로그 글 1만 개를 몇 시간 만에 생성할 수 있다. 캐릭터 1천 개를 몇 분 만에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AI는 그 과정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회복하지도 않았으며,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의 결과물에 우리는 같은 감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고 있다. 하지만 시대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두려움에 멈춰 설 것인가, 아니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홍수 속에서 효율만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만의 방식을 지켜갈 것인가. 타인을 NPC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플레이어로 인정할 것인가.
이 선택들이 모여 AI 시대 인간의 조건을 만든다. 그리고 그 조건은 결국, 어떤 기술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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