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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씨 Jul 17. 2021

지독한 하루


지난번 읽다 만 '만약은 없다'와 비슷하게 응급실 의사로 일하는 저자가 매일 응급실에서 마주하는 일상, 그 속에서 고민하게 되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에세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긴급하고 잔인하고 슬픈 응급실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에필로그의 정우철 님의 이야기. 저자의 동료이자 수련과정에서 위암판정을 받은 의사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병마와 싸웠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같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려 애썼다.   


그의 가족은 그가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직 어린 아들을 불렀다. 아이는 아빠를 안았다. 

"잘 가세요, 아버지.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는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음날 새벽,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아내는 흐느끼며 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어. 하지만 당신이 이겨낸 것처럼, 나도 이겨내고 말 거야. 걱정하지 말고 가.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가...." 

2016년 7월 29일, 새벽 3시 18분, 그는 영원히 떠났다. 그가 위암 선고를 받은 지 3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말에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의대 생활,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모두 끝내고 이제 전문의만 따면 꿈꾸던 의사로서의 삶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던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기대했을 그가 떠올랐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에겐 그의 아들만큼이나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생을 살아내고 나이 든 어느 훗날,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는 노년을 상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로 끝맺음되었다. 저 말이 너무나도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이따금 죽음을 생생히 경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이는 나의 세상이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곳인데 반해 나와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고른 것이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이것은 언제나 내 삶을 거꾸로 보게 해주는 극단의 처방전이 된다.


지금까지 읽어온 것은 남궁인 님의 에세이,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글들을 읽을 때 사실 마음이 좋지 않다. 불편하다.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억울하다. 막막해진다. 그럼에도 언젠가 내가 마주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피하지 않고 읽어나간다. 동시에 나의 노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살들은 탄력을 잃고 쭈굴쭈굴하며, 눈이 나빠 더 이상 책을 읽기도 힘들고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답답해하는 나를 상상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인간관계는 사라지다시피 할 것이고, 누군가 먼저 내게 말을 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제 하지 못한 것은 내일도 못할 것이고 그렇게 나의 하루하루는 조금씩 저물어가겠지.


어릴 때부터 70대에 죽고 싶다는 말을 가볍게 했었다. 그 정도라면 내가 상상하는 연약한 모습에까지 이르지 않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80대, 90대가 되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괴로울 것 같았고, 늙은 나를 보살피는 사람에게 죄스러울 것 같았다. 혹은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 혼자 힘겨운 삶을 이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어째서인지 나 혼자 남겨진 풍경만이 그려졌다.


내 의식 속의 늙음이란 왜 이리 쓸쓸하고 어두울까.


내가 목격한 최고령의 노인은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 돌아가신 외증조할머니였다. 외증조할머니를 뵙는 것은 명절 때뿐이었지만 그 모습은 언제나 비슷했다. 외할머니댁 가장 큰 방 안쪽에 곱게 깔린 요 위. 베개를 옆에 두고 보청기를 끼신 채로 앉아 계셨다.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빼곤 지병도 없이 건강하셨고 이따금 함께 산책을 가기도 했다. 겨우 셋 있는 손자들이 찾아갈 때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우리들의 손을 한참을 잡고 쓰다듬으셨다. 주름 없이 보들보들한 우리들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실 때면 조용한 여백과 다정한 웃음이 번갈아 공간을 채웠다. 외증조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신 후였고 잠드신 듯 고요히 누워계셨다. 그때의 공기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람인가. 할머니가 맞나. 이상했다. 내 눈앞에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외증조할머니인데 외증조할머니는 이제 아무 데도 없었다. 투병 없이 마지막까지 손자들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신 할머니의 죽음은 소위 말해 '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60대 초반인 엄마는 아직도 외견은 한참 젊어 보이고 갱년기로 열이 오르지만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으며 최근엔 새로 가게까지 차렸다. 나와 28살 차이가 나는데 우리의 대화는 친구보다 더 자주 더 깊고 더 넓게 주제를 막론하고 막힘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60대는 너무 젊은것 같다. 70대에 죽겠다는 건 너무 이른 생각인 듯하다. 러닝을 뛰다 공원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강아지도 데리고 나오고 낚시도 하고 다양하게 시간을 보내신다. 그들의 눈에 쓸쓸함이나 초라함이나 죄스러움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내가 상상하는 나의 노년은 왜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좀 더 생각을 굴리다가 내 상상 속 죽음은 최소한 내가 엄마 이상으로 나이가 들 때까진 살아있을 거라는 전제 하의 것이라는 걸 깨닫는데, 내가 목격한 죽음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저학년 아이가 후진하는 버스에 깔려 죽은 사고가 있었다. 그 길은 나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아이들이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그 익숙했던 길에 새겨진 낯선 검붉은 자국 위로 연탄가루가 뿌려졌다. 한동안 그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죽음은 늘 느닷없이 찾아왔다. 엄마의 동네 주민분은 떨어진 이불을 주우려다 추락사로 돌아가셨고, 어느 새벽엔 연인의 가족이 목숨을 잃었으며 갑자기 생각난 대학 선배는 병으로 이미 세상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대지진의 가능성을 품은 땅 위에 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사실을 거의 잊고 산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막연히 그때를 상상해 보곤 한다. 나는 더 자연스럽게 살아있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고 싶다. 더 정직하게 살고 싶고, 더 이해하며 살고 싶다. 살고 싶게 하는 것들로 삶을 채워가며 살고 싶다. 어떤 죽음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죽음을 읽으면서 삶을 다짐하고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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