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아버지
아버지 이름만 불러도 애틋하고 그립다. 늦은 연세에 나은 셋째딸이 나다. 1남 4녀중 셋째딸인데도 맏이 노릇을 하고 살았다. 큰 언니랑은 16살, 작은 언니랑은 11살 차이가 난다. 중간에 두 언니가 있었는데 6살때쯤 갑자기 떠나 보내서 언니들이랑 차이가 난다. 나보다 3살 위인 오빠가 있다.
언니 둘이랑은 나이 터울이 있어서 어릴때 함께 산 기억은 없다. 결혼 한 언니 조카들과 나와 동생과 나이 차이가 없이 함께 자랐다.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때 환갑이셨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등이 약간 굽으시고 다리는 관절염으로 인해 약간 절으셨다. 술 한잔 걸치고 들어오실 때 늘 내 이름을 부르셨다. 어린 난 쪼르륵 나가 아버지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나이 드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게를 지고 나무를 베어 오고 소 여물을 뜯으러 다녔다. 수돗물이 없어서 물을 길러 먹고 논에 물을 보러 다니는 것도 대신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꿈이 있다. 내 나이 18살 고2때 12월 1일 새벽에 꿈 꾼 아버지가 진흙탕에 물에 떠 내려가는데 난 아버지를 잡으려고 하는데 손이 닳을락 말락 결국에는 아버지는 물과 함께 떠내려 가셨다. 또 하나의 꿈은 언덕을 넘어가는데 양쪽 군인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아버지 팔짱을 끼고 넘어가시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꾸고 학교를 갔다 오니 아버지는 먼길을 떠나셨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는 꿈을 가족 누구도 아닌 어린 내가 꾸었다.
이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난 10년 가까이 아버지 꿈을 꾸었다. 꿈에는 평상시 즐겨 입으시던 옷을 입으시고 집밖 울타리에서 서성이던 꿈을 참 많이도 꾸었다.아버지 꿈을 꾸면 항상 엄마가 아프셨다. 홀로 고향에 사시던 엄마가 걱정되셔서 늘 내 꿈에 보이는가 생각했다. 고향에 홀로 사시던 엄마가 작은 언니랑 오빠와 함께 합가를 하면서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 꿈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향집과 아버지 묘소 중간에 우리 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논뚝에서 날을 부르시더니 내 짐 보따리 달라고 하셔서 내가 보자기에 아버지 짐을 싸서 드렸더니 이젠 내 짐 들고 갈란다고 하며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내 꿈에 나오시지 않으셨다.
아버지 영혼의 목소리는 엄마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나만을 믿는다고 엄마가 떠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엄마는 너무 오래 고통 받게 하지 않게 할거라고 제사 뒷일처리는 니가 알아서 하라고 오빠도 챙기라고 하셨다. 언니들은 못 믿고 나라면 잘 할거라고 믿는다고 하셨다.
친정집 큰일 결정은 내가 늘 했다. 언니들은 큰일을 치른적도 없고 일에 순서를 모르고 살았다. 오빠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큰일을 감당하기에 버겁기 때문에 맏며느리로 산 내가 친정 큰일을 결정하고 해결해주길 바라셨나보다. 그 부탁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몫이 있다고 생각했다. 맏이라고 해서 다 맏이노릇을 하는것도 아니고 막내라고 해서 맏이 역할을 하지 말라는 법이 따로 없다.
난 양가 모두 맏이로써의 살아가야 하는 삶이 타고 난 삶인가 보다.
주어졌기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주어진 숙제는 나름 열심히 마무리 한 셈이다.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은 있다. 홀로 살아가고 있는 오빠를 도우며 살아가라는 말씀
주어진 남은 숙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