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중 선생님 기억하세요
학창 시절 누구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계시지요?
홍천 깡촌에서 자란 나에겐 특별하고도 특별하신 분이 계십니다.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입니다.
보기 힘든 추억일 겁니다.
국민학교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운동을 했다.
국민학교 때 키가 160cm이었으니 제법 큰 편이었다.
졸업사진을 보면 선생님보다 훨씬 컸기에
지금의 키가 중학교 키다. 168
큰 편에 속한다.
요즘 아이들에 비교해도 작은 키는 아니다.
키로 인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운동을 해야 했던
학창 시절이다.
그 덕에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육상을 하고
탁구를 하고 배구까지 했다.
기록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육상도 대회 한번 나가고 땡
육상부가 사라지고 육상부 아이들을 데리고 탁구를 가르쳐서 대회 한번 나가고 땡
또다시 배구 선수로 만들어 대회 한번 나가고 땡
한 가지로 시작해서 몇 가지를 해야만 했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을 그렇게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로 운동했던 친구들을 모아서 배구팀을 만들었다.
대부분 키가 크고 운동에 조금 소질 있는 친구들을 뽑아서 선수로 키웠다.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통 있는 운동선수가 있던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체육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팀이었다.
운동을 하는 선수들에게 주어진 특혜가 하나 있었다.
체육 수업시간에 빼주는 거였다.
도시락을 다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체육시간에
우리들은 친구들의 도시락을 뒤져서 까먹었다.
아주 교묘하게 아무도 모르게 체육시간을 즐겼다.
맛난 도시락을 찾아서 도시락을 거꾸로 뒤집어서 안을 파먹고 그대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깜쪽같이 맛난 도시락을 까먹고 시치미를 떼었다.
둘째 셋째 수업시간은 우리들의 세상이 되었다.
남자 4반 여자 4반
반을 돌아가면서 도시락을 까먹었다.
한두 번은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다 보니 친구들의 신고로 우리의 세상인 체육시간은 혼쭐이 나고 특권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4교시가 끝나면 운동을 하던 우리들은 실력이 올라갈수록 꾀만 늘어나고 있었다.
교생 실습 나온 병아리 선생님을 골탕 먹인 적이 있다.
정해진 집합시간에 모두 도망가는 만행을 저지르고
한 명씩 돌아가며 빼먹고 하다 빠따라고 하는 몽둥이로 무지 맞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통일이었다.
남자아이들과 축구 시합에서 져도 맞고
운동장을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지 못하면 어김없이 엎드려서 엉덩이가 불이 날 정도로 맞아야 했다.
여름 방학에도 어김없이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사춘기 소녀들이 뜨거운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작당 모이를 하게 되었다.
운동에 빠지자고 하루에 한 명씩 빠지기로 작당 모이로 인해서 한여름 날의 운동은 친구들 집집마다 찾아다니기 바빴다.
여러 지역에서 모인 학교라 찾아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교통수단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몇 시간씩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자초한 일 소위 가정방문이 되었다.
그 덕분에 친구집 여러 동네를 구경했다.
선생님을 대동하고 한 명씩 찾아다니느라 한여름 혼쭐이 나야 했다.
1주일 이상 그리 찾아다니다 지친 우리들과 선생님
결국 선생님의 화는 극에 달하고 말았다.
다 모인 날 일은 벌어졌다.
화를 참지 못한 선생님이 빠따를 드셨다.
한 사람당 열대 엉덩이에선 불이 났다.
약이 오른 우리들도 지기 싫어서 오기를 부렸다.
몽둥이는 날아가고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기를 부리는 행동은 선생님의 화를 불렀다.
몇 개의 빠따가 부러지고 나서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빠따를 우리들에게 넘기셨다.
대신 자신을 때리라고 우리들의 오기는 거기서 무너져야 했다.
어찌 선생님을 때릴 수 있단 말인가
망설이던 우리에게 불호령이 떨어져 결국 우리는 한 명씩 때리기 시작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때리다 서서히 숫자가 늘어나면서
울음이 떠졌다.
때리는 우리도 맞는 선생님도 빠따를 들고 울었다.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우리들의 오기는 선생님을 때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하드를 사 먹기 힘든 시절
한바탕 울고 나서 선생님은 구멍가게에서 하드를 사주시고 빠따의 기억은 잊기로 했다.
훈련이 끝나고 함께 먹던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긴 여름을 지나고 우리들의 연습은 열심히 해서
그 가을 완전 초보로서 전국체전에 나가게 됐다.
춘천에서 열렸는데 시골에서 처음으로 도시로 나갔던 우리들
처음으로 네온사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기로 똘똘 뭉친 우리들은 첫 시합에서 이기고
두 번째 시합에서 말도 안 되는 점수차로 지고 말았다.
두 번의 시합을 끝으로 선수생활은 끝이 났다.
그분이 바로 정호종 선생님이다.
살면서 대놓고 선생님을 때려 본사람이 있을까 싶다.
중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그 당시에도 편지를 좋아했던 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간간히 지금도 5월이면 생각이 난다.
중학교 과학 선생님과 결혼하셨다는 소식도 듣고
지금도 학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한 번도 찾아가 뵙적이 없다.
죄송한 마음도 있다.
무슨 마음에서 빠따를 들게 했는지 여쭙고 싶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을 키우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스치듯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추억이 웃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