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어 왕초보반 첫날
예전의 나는 외국 여행을 항공권을 끊는 즉시 그 나라 관련 역사와 언어를 어느 정도 공부해 놓는 타입이었다. 해외여행을 거의 혼자 갔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기본 회화를 익혀야 했고,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보려면 어느 정도 역사나 문화를 알아야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3년이나 살아야 하는 베트남에 대해선 거의 준비를 못 했다. 떠나기 직전까지 일하면서 해외 이사 준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기도 했고, 베트남에서 몇 년을 살아도 베트남어 한마디도 못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배우기 어렵다'라는 말에 현지에서 제대로 배우자는 마음도 있었다.
하노이에는 한인들이 워낙 많이 살아서 한인회가 꽤 크고 시내에 사무실이 따로 있다. 여기에 작은 도서실도 있고, 강의실이 몇 개 있어서 베트남어나 영어, 컴퓨터 등의 강좌를 운영한다.
베트남 도착했을 때 베트남어 '초보반'을 신청했었는데 첫 시간에 들어보니 완전 기초가 아니었다. 나처럼 쌩 기초인 사람은 '왕초보 반'을 신청해야 했던 것. 그래도 취소하고 재등록하는 게 귀찮아 어지간하면 그냥 듣자 싶어 한 시간을 들어봤다. 6 성조에다가 처음 보는 알파벳 비스무리한 문자들이 동시에 머리를 때리니 뇌에 과부하가 온다는 걸 제대로 느끼고 바로 취소. 몇 개월 뒤에 '왕초보 반'이 개설된다고 하여 기다렸고, 3월 시작과 함께 시작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수업 첫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아이와 같은 학교 보내는 아는 엄마가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한 뒤 앉았다. 초보반으로 잘못 수강 신청했을 때 한 시간 봤었던 베트남어 선생님(한국어를 잘하는 베트남인)이 들어와서 인사를 했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시켰다. 이때 어떤 분이 '꼭 해야 해요?'라며 언짢아했지만 모두 그냥 했다.
고등학교 교사를 정년퇴직한 후 베트남에서 살아보려는 생각으로 하노이 온 지 4일 됐다는 왕고참 아저씨를 비롯해, 예전에 베트남에 몇 년 살았었지만 베트남어를 공부하지 않아 하나도 모르는 채로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오게 됐는데, 이젠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 오게 됐다는 분, 나처럼 남편 때문에 오게 되어 베트남 입성한 지 2~3개월 된 주재원 부인들 3~4명, 베트남 온 지 2년 차지만 한인촌에 사는 집순이인지라 베트남어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다가 이젠 좀 배워야 할 것 같아서 오게 됐다는 옆 아파트에 사는 분, 회사를 병행하며 배우느라 여러 번 중도 포기하여 왕초보 반만 3번째 시작한다는 남자분(베트남어 선생님은 이 분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 소개를 마쳤을 때 선생님이 '베트남 와서 가장 놀랐던 게 뭐예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들어온 추가 질문에 당황함과 동시에 여러 선택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베트남 와서 놀랐던 것? 매일매일이 놀란 일 투성인데....’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스쳐갔다. 집에서 입는 잠옷 차림으로 거리와 쇼핑몰을 유유히 다니는 베트남 여자들, 신호등이 있고 교통정리 하는 경찰이 있지만 빨간불에도 유유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 초록불에 길을 건너는 나를 보며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달려오는 차와 오토바이, 식탁 아래 쓰레기통이 있는데도 바닥에 그대로 버려진 이쑤시개와 휴지로 가득한 로컬 식당, 인도를 뛰어다니는 살아있는 쥐와 차도에 빈대떡처럼 눌려 있는 죽어있는 쥐 등등) 동시에 생각나는 것들을 다 말할 순 없고 무엇을 말해야 하나.... 빠른 두뇌 회전 뒤에 내가 고른 대답은 "음.... 남자들이 큰 거리 담벼락에 소변보는 거요."였다. 아마 최근에 가장 많이, 자주 마주치는 장면들이라 튀어나온 것 같다.
내 대답에 선생님은 당황하며 "아, 의사소통 때문에 놀란 거요."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아뿔싸. 베트남 사람이 들으면 기분 나쁠 대답을 해버렸구나. 하지만 말이라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다음엔 이런 질문받으면 '오토바이가 아주 많은 거요'라는 무난한 대답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용히 앉았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수업 시작.
베트남은 원래 한자를 이용한 문자를 썼는데 사람들에게 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지배를 받을 때 베트남에 살던 프랑스 선교사가 알파벳을 기본으로 조금 변형시키고 중국의 4 성조보다 많은 6 성조를 결합해 지금의 베트남어 문자(꾸옥응으)로 사용되고 있다.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몇몇 글자는 발음이 달라서 처음엔 아주 헷갈렸다. (물론 지금도)
첫 시간이라 베트남어 문장 구성이라든지 문자는 자음 몇 개, 모음 몇 개가 있다는 것 등을 알아보고 드디어 대망의(?) 6 성조 맛보기. 성조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성조가 꽤 중요하다. 설명을 들은 뒤 선생님을 따라 6 성조를 차례로 발음했다. 몇 개의 성조는 음을 내렸다가 올리기, 음을 올렸다가 내리기 등으로 발음해야 하는데 그 소리가 흡사 중국 여자가 앵앵거리며 애교 부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베트남어 선생님의 앙칼지고 교태로운 목소리를 따라 하려니 조금 멋쩍다.
교사 퇴직한 맨 앞자리의 왕고참 아저씨는 출신답게(?) 큰소리로 따라 했지만, 내 옆에 앉은 두 명의 남자분(3~40대의 회사원 2명)은 앵앵거림이 필요한 성조를 연습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겨우 첫 시간이었는데, 아니면 겨우 첫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왜 베트남에 몇 년 살아도 베트남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은지, 배우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아는 언니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베트남어 너무 어렵다, 그런데 점심은 뭐 먹지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있던 아저씨(왕고참 아저씨의 지인인 듯)가 우리를 빤히 보더니 말을 걸었다.
"아는 사이예요?"
"네, 아이들 같은 학교 보내요."
"아, 남편 주재원으로 왔어요?"
"네."
"이야. 난 다시 태어나면 주재원 부인으로 태어나고 싶어."
부러워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기에 한바탕 웃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며 내 교재를 뒤적이더니 '네가 나보다 더 베트남어 잘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견제했다. 남편은 듀오링고 앱으로 베트남어를 공부한다. 며칠하고 말겠지 싶었는데 그동안 본 남편 모습 중에 가장 열심히, 꾸준히 공부하고 있어 속으로 놀라고 있다. 효과가 있는지 아이의 베트남 친구 부모님과도 베트남어 단어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편이다. 같이 있던 한국인 엄마가 '남편분 베트남어 잘하시네요!'라고 놀랄 정도. 역시 돈벌이와 관계된 거라 그런지 베트남어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수업이 일주일에 두 번이라 내일도 베트남어 수업이 있지만 배운 내용을 다시 보진 않고 집에서 ebs 영어 방송을 들었다.
그렇다. 나는 영어와 베트남어를 동시에 공부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두 마리 다 놓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는 몇 년을 해왔고, 한국에서도 출퇴근길에 ebs 방송을 들으며 끈을 놓지 않았었는데도 머리에 들어오는 속도가 다르다.
예전에는 공부하는 족족 머리에 잘 흡수되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뇌 속에 철판 같은 게 있어서 공부한 내용을 밖으로 쳐내는 것 같다. 이건 나이 탓일까, 아니면 내가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두뇌 활동에 문제가 생긴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생업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절박함이 부족한 탓일까.
일단 목표는 6개월이다. 6개월은 포기하지 말고 해 보기.
하필 6개월인 이유? 독서 모임에서 베트남어를 제일 잘하는 멤버가 식당에서 주문하는 걸 보고 어떻게 베트남어를 공부했는지 물어보니 처음 왔을 때 딱 6개월 공부했던 실력으로 5년째 써먹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듀오링고로 공부하는 남편과 학원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는 나, 학교에서 베트남 친구들과 지내는 아이. 베트남을 떠날 때쯤 세 명의 베트남어 실력 순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답은 정해진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