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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Aug 14. 2019

도도새를 찾아 모리셔스로 떠난 여행

무모한 여행에서 삶의 방향을 찾다

아프리카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모리셔스(Mauritius)로 떠나 북부 해안 도시인 그랑베이(Grand baie)에 위치한 벤과 세냐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무려 한 달이나 머물렀던 것은 지난 2015년 여름, 당시 나는 미술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이런저런 쉽지 않은 문제들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미대 졸업생의 99퍼센트가 다시 직업훈련을 통해 결국 미술과 관련이 없는 직종에 취직하거나 대부분 디자인 계열로 빠지는 현실 속에서, 화가가 되는 것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던 집안의 분위기를 무릅쓰고 내 작업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물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의 바람대로 작가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오는 해변 근처 바. ‘바텐더가 도도새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그려본 드로잉




도도새를 찾아 모리셔스로


대학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언제나 ‘자유’와 ‘꿈’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대다수의 학생이 거치는 ‘정상적인’ 정규 교육과정을 밟았고 그동안 ‘사회 기준에 적당히 부합하는 인간이 돼라’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개개인의 꿈과 개성은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 앞에서 쓸데없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격하되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틈도 없이 무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 혹은 상당히 늦어서야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의 삶을 자신이 원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 현대인들이 마치 날개를 잃은(혹은 날기를 스스로 포기한) 새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가진 모순 중의 모순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점이라고. 그래서 나는 머리는 새이지만 몸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새 인간’의 형상을 통해 획일화된 현대인들을 비유해왔다. 그러던 중 멸종된 동물에 대해 쓴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었고 도도새를 알게 되었다.

Routine, 324.4x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주관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모리셔스는 신혼부부의 관광지라기보다는 거대한 도도새의 무덤이었다. 어쩌면 생존한 도도새 몇 마리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이렇게 시위라도 하지 않을까

남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모리셔스라는 작고 아름다운 섬에 살았던 그들은 원래 날 수 있는 새였지만 먹을 것이 풍부하고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굳이 날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결국 날개가 퇴화하여 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5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했다. 그들은 날지 못하는 그 새들에게 ‘도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도도’는 포르투갈어로 ‘바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1681년, 마지막 남은 도도새가 인간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앞으로도 들을 수 없는 도도새의 노랫소리가 아득히 멀리 떨어진 그 작은 섬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모리셔스로 떠날 결정적인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을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일현미술관에서는 매년 ‘일현트래블그랜트’라는 프로그램을 주최한다. 이 프로그램은 작가가 본인의 작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특별한 여행을 계획해 온다면 심사 후 그 여행을 실현하도록 지원해주는 공모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그려왔던 날지 못하는 ‘새 인간’과 스스로 날기를 포기해 멸종한 도도새와의 연관성을 들어 도도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심사위원들 앞에서 떠들어댔다. 믿기지 않게도 그들은 나를 모리셔스로 보내주었다.

모리셔스에서 얻은 관광 지도에 도도새를 찾기 위해 방문했던 곳들의 궤적을 그려보았다.
모리셔스 입국 시 비행기에서 나누어주는 입국 카드.  모리셔스에 방문한다 해도 볼 수 없는 도도새가 인쇄되어 있다.





벤&세냐와 함께한 도도새와의 숨바꼭질


“신은 모리셔스를 만들었고 그를 본떠 천국을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 아름다운 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막 식을 마친 신혼부부들이었고, 그렇게 행복한 커플들이 두 손을 맞잡고 오는 신혼 관광의 성지에는 도도새를 찾아 혼자 떠나온 가난한 여행자를 비웃듯 비싸고 럭셔리한 리조트가 즐비했다. 결국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에어비앤비뿐이었다.


아담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모리셔스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그랑베이라는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내가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는 유명한 해안이나 관광지에서 꽤 떨어진 현지인 동네 한복판에 있었고, 호스트인 독일인 벤은 내가 행여나 집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골목 어귀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다가 반갑게 인사하고 짐을 들어주었다. 2미터가 넘는 큰 키에 착한 인상의 그는 독일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져서 넉 달 전 모리셔스로 도망 왔다고 했다.

아늑했던 벤과 세냐의 부엌. 우리는 항상 이곳에서 아침을 함께 요리해 먹었다.
주로 작업했던 내 방의 화장대

좁은 골목들이 가득한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아담한 빌라 3층에 올라갔다. 벤의 여자 친구 세냐 역시 러시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그만둔 뒤 모리셔스로 휴가를 와 이곳에서 게스트로 머무르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벤과 사랑을 꽃피우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모리셔스는 도피와 사랑의 섬이군”이라고 하자 벤과 세냐는 웃으며 “그거 말 되네. 근데 넌 왜 여기에 혼자 왔어?”라고 묻기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도도새를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그들은 무척 흥미로워하면서도 조금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어…… 그러니까 도도새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벤은 “내일 블랙리버(Black River)로 하이킹을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라며 물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난 하이킹을 사랑해!”라고 답했다. 그것이 모리셔스에서의 호된 신고식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블랙리버 국립공원은 모리셔스 남부에 있었다. 도도새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꼭 방문하기로 계획했던 곳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리셔스에 도착한 다음 날 벤과 세냐와 함께 그곳을 답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숙소를 나서서 수도인 포트루이스(Port Louis)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포트루이스에서 블랙리버 인근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공원까지는 꽤 거리가 남아 있었는데 이제 택시를 타야 하느냐고 벤에게 물었더니 그는 엄지를 척 세우면서 씩 웃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기다린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지나가던 트럭 화물칸에 앉아서 국립공원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벤은 트럭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말했다. “모리셔스에서는 모두가 외국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하지. 그래도 히치하이킹 하나는 최고야.” 나는 벤에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모리셔스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왔어. 비행기를 공짜로 히치하이킹했지.” 내 대답에 세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벤, 아무래도 우리가 진 것 같아.” 

벤과 세냐와 함께해 전혀 무섭지도, 낯설지도 않았던 내 생애 첫 히치하이킹

블랙리버는 숲이라기보다는 정글에 가까웠고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아 하이킹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몇 개의 봉우리와 폭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의 30킬로미터를 넘게 걸었다. 사실 나는 너무 오랜만에 산을 타느라(군 제대 이후에 운동이란 걸 정기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줄 알았지만 국립공원에 들어가기 전 벤과 세냐에게 군대에 있을 때 이런 산쯤은 백 개도 넘게 타봤다고, 식은 죽 먹기라고 큰소리를 쳐놓은 터라 벤이 “썬! 괜찮아?!”라고 물을 때마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괜찮아!”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산행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가 마무리되었다. 블랙리버를 나올 때 출구에서 공원 관리인이 떨어진 나뭇잎들을 쓸고 있기에 대뜸 도도새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30년째 공원을 지키고 있지만 발자국조차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벤은 어딘가에 도도새가 숨어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세냐는 그런 벤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평선이 훤히 보이는 산꼭대기 위에서 찍은 기념사진.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힌두 사원이 있는 그랑바신(Grand Bassin)이라는 호수에 잠시 들러 구경했다. 호수는 금방이라도 신선이 나타날 것처럼 깨끗했고, 제단에는 맛있어 보이는 과일들이 잔뜩 바쳐져 있었다. 그곳은 모리셔스의 힌두교도들이 제2의 갠지스강이라고 여길 정도로 무척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였다. 모리셔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힌두 신들을 모시는 크고 작은 사원들을 수도 없이 만나는데 대부분의 모리셔스인이 인도로부터 이주해왔기 때문이라고 벤은 이야기해주었다. 


아무튼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이곳에 거하게 했지만 그중에 도도새들을 위한 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모리셔스에 가게 된다면 곳곳에서 도도새를 찾을 수 있을 거다. 25루피짜리 지폐 위에서, 거리의 음식점 간판에서 그리고 기념품점의 진열대 위에서. 우리는 가시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를 위해 초상을 남기고 그의 역사를 온갖 방식으로 기록한다. 그렇게 따지면 도도새의 업적은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두 먹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아무튼, 그 공로 덕에 수많은 신혼부부는 도도새가 그려진 타월과 목조 조각상 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가지고 돌아간다.

제2의 갠지스강이라고 여겨지는 그랑바신


모리셔스에는 여전히 수많은 도도새가 존재한다. 지폐,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외 어디든




알지 못하기에 더 유쾌한


내가 벤의 숙소에 머무르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모리셔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벤과 세냐는 얼마간 나와 지내다가 모리셔스 이곳저곳을 다시 여행하겠다며 떠나버렸고, 덕분에 나는 스쿠터를 빌려서 가고 싶었던 장소를 방문하거나, 빈집 안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며 남은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적막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것이 온갖 가축이 거리를 활보했고 또 밤낮없이 울어댔기 때문이다.


숙소에 처음 온 날, 벤은 내게 이어플러그를 주면서 “이게 필요할 거야”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확한 알람처럼 매일 새벽 4시부터 울어대는 닭들의 “꼬끼오” 하는 우렁찬 소리에 나는 이어플러그를 귀에 쑤셔 넣는 수밖에 없었다. 또 저녁이 되면 개들이 짖기 시작했는데, 하루를 어떻게 지냈느냐고 서로 안부를 묻듯이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벤 자신도 그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 꽤 오래 걸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저녁으로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뜻 모를 기도 소리, 어떤 언어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옆집의 이야기 소리, 온갖 종류의 가축 소리. 모두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지만 알지 못한다는 것은 꽤 유쾌했다. 나는 언제나 집요하게 무언가를 번역하고, 해석하고, 끈질기게 추적하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작업을 하면서도, 짧은 삶을 살아내면서도. 거대한 빙산에서 똑 떨어져 나온 작은 유빙처럼 나는 그 작은 섬에서 표류하며 내 일부들을 조금씩 녹여내갔다.

숙소 발코니에서 매일 만난 환상적인 석양
모리셔스에서 나의 발이 되어주었던 스쿠터. 대중교통이 친절한 편이 아닌 데다 제주도 정도 되는 크기의 섬이었기 때문에 무척 요긴했다.


최고의 인생 학교였던 벤의 에어비앤비 숙소 구조
모리셔스 사람들은 대다수가 힌두교도이기 때문에 집에서 향을 피우기 위해 집집이 성냥을 구비해놓곤 한다. 아랫집에서 구한 빈 성냥갑에 도도새를 그려 넣었다.




모리셔스라는 나의 작은 섬에서


모리셔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에어비앤비 숙소와 그 동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도 했고, 도도새 관련 작업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모리셔스의 수도인 포트루이스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도도새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들과 유리 상자 안에 전시된 도도새의 뼈다귀들을 구경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빵집에 들러 달콤한 바나나 파이를 사서 해변으로 가 나무 그늘에 비스듬히 누워 하루키의 소설을 보거나, 수영을 하는 일은 늘 즐거웠다.

모리셔스의 수도 포트루이스의 자연사박물관에서 발견한  도도새의 뼈. 1904년에 루이스라는 미용사가  온전한 도도새의 유골을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앞뜰에는 도도새 모형들이 박물관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난 방지를 위해 쇠사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마치 잡혀 온 짐승처럼 처량해 보였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나는 현실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온통 도도새만 생각했다. 아주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도도새를 찾는다는 비현실적인 목적의 여행을 허락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무엇이라도 답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마치 개학을 하루 앞두고 방학 숙제를 단 한 장도 못 해 쩔쩔매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조각배 같은 섬에 살다가 속절없이 사라진 도도새들처럼 결국 저마다의 작은 섬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고. 길을 잃고, 바다를 건너는 일을 까마득히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라고. 살아갈수록 어쩔 도리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문장처럼 삶이란 인간에게 너무나도 거세고 무자비하다. 그만큼 우리는 삶을 온전히 버티어내는 것조차 힘겨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섬에 박제되어 사느니 이름도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서 난파되어 숭고하게 물고기 밥이 되는 편을 택하겠다고 최면을 걸듯 매일같이 되뇌었지만 솔직히 진심으로 두려웠다. 마치 집채만 한 파도를 눈앞에 둔 것처럼.

모리셔스의 아름다운 해변
에어비앤비 숙소가 있는 동네 골목. 관광지와는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늘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그랑베이의 해변가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가 발견한 시장 입구. 거리를 걷다 보면 온통 힌두 사원과 신들의 조각상을 마주치다가도 어느 순간 중국풍의 홍등과 건축물을 만나기도 했다
그랑베이 거리에서 구한 관광 팸플릿을 이용한 드로잉




바이 바이, 록스타버드


그 아름다운 섬에서 고뇌의 나날을 보내던 중, 마지막 휴가를 마친 벤과 세냐가 돌아왔다. 그들은 다음 날 바로 독일에 돌아간다고 했다. 벤은 내게 도도새를 찾았느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숙제를 마치지 못한 아이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발코니에 셋이 나란히 앉아 모리셔스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다. 벤은 바게트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가 다시 모리셔스에 온다면 이 집에 오겠어. 정말 환상적인 발코니란 말이야.” 내가 빵 조각을 발코니 저편으로 던지자 집 앞의 키 큰 나무에서 새들이 날아들어 쪼아 먹기 시작했다. 참새만큼 작은 새였는데 머리가 마치 록 스타처럼 뾰족하게 서 있어서 우리는 이 새를 ‘록스타버드’라고 불렀다(물론 노랫소리가 록 스타의 그것은 아니었지만). 세냐는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새들에게 던져주었다. “바이 바이, 록스타버드!”


벤과 세냐가 떠나기 전에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들의 모습을 종이에 쓱쓱 그려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그 간단한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정말 엄청나게 보고 싶을 거야! 행운을 빌게. 꼭 도도새를 찾길 바라.” 우리는 그렇게 셋이서 긴 포옹을 마친 후 헤어졌다.

벤&세냐와 함께 그랑베이의 어느 해변에서


모리셔스를 떠나는 벤과 세냐에게 작별의 선물로 그려준 그들의 모습




모리셔스가 가르쳐준 것들


나는 모리셔스를 떠나기 전날까지 도도새를 그리고, 해변에서 뒹굴거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도새의 행방을 묻는 등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모리셔스에서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리셔스를 떠날 때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큼의 기묘함을 느꼈다. 모리셔스라는 이름의 도도새의 무덤은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차분했다.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모리셔스에서 무려 한 달이나 지내며 확실하게 사라진 어떤 존재가 여전히 실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기록해나갔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상실된 대상들에게서 느껴왔던 그리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감정을 경험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아름답고 즐거운 섬에서 나를 출구 없는 외로움과 고독의 구덩이로 몰아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섬은 적어도 내게 광막한 상실의 한복판이었다. 때문에 이 여행은 내게 지독한 방황이자 표류였다. 한 달간 키가 고장 나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떠돌고 또 떠돈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외롭기 그지없었던 표류는 이전에 하지 못했던 수많은 고민과 생각 들을 마주하게 해주었다.


적확한 답 같은 것은 역시나 없었지만 도도새를 이유로 삼아 마음껏 방황했던 그 시간들은 학교를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만 했던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모리셔스와 도도새, 벤과 세냐, 모리셔스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과 풍경 들은 내게 정해진 정답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도도새에 대한 드로잉, 29.5x22cm, water color on paper, 2015

모리셔스 여행 이후 나는 여전히 도도새를 그리고 있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도도새들을 캔버스 위에 그려내어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정확하게 계산되어야 하고, 답이 나와야만 하는 세상에 길들여져 왔다. 내가 모리셔스에서 느꼈던 막연하고 끝없던 불안은 명료한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도새를 찾아 떠났던 행위는 어쩌면 정주(定住) 시대의 논리로 볼 때 희한한 방식의 반항이지 않았을까? 이미 존재하지 않고, 과거 존재했다는 여부조차 불분명한 대상을 찾아 나선다는 행위는 마치 하늘에 뜬 무지개를 잡겠다고 언덕 너머로 무작정 내달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무지개를 끝내 잡지 못하더라도 무지개를 찾아 떠난 여행은 세상의 그 어떤 여행보다 아름답고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다.


내게 방황이란 그런 것이다. 늘 걸어오던 길을 벗어나 수많은 새로운 길을 만나기 위한 것. 무수히 펼쳐진 그 길들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모 비아토르란 ‘떠도는 인간’으로, 인간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길 위에서 방황할 때 성장해서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는 내가 작업을 해나가는 이유이며 목적이다. 그리고 도도새를 통해 사람들과 계속해서 나누고 싶은 궁극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Mauritius Souvenirs, 250x180cm, mixed media, 2015 모리셔스에서 작업한 드로잉과 수집물들로 구성
모리셔스 섬의 일요일 오후, 130x162cm, gouache on canvas, 2019
모리셔스 섬의 비극, 130x162cm, gouache on canvas, 2019 
Roaming dodos, 97x162cm, gouache on canvas, 2017(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에어비앤비 작가, 김선우

: 2015년 동국대학교 예술학부 서양화과를 졸업했고, 주체적인 꿈과 자유를 망각하고 몰개성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을 스스로 날기를 포기해 멸종한 도도새에 비유한 평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10회의 개인전과 52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런던과 로마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열린 대형 아트페어에도 다수 참여하였다. 서울이나, 뉴욕, 도쿄 등지에서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가해 작품 활동을 한 바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다양한 기관 및 콜렉터에게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개인 홈페이지 : www.birdcage.me 

- 인스타그램_ @dodosee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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