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Mar 02. 2020

낯선 주방으로 여행하다

치앙마이에서 남해까지

채식 요리를 업으로 삼은 지 어느덧 10년이 넘어 나에게 여행은 뭐랄까, 일과 치유의 어느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은 답답해서 훌쩍 떠나는 마음으로 도피하듯 비행기에 올랐고, 또 어느 날은 새로운 영감이 필요한 학생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 물론 처음엔 남들이 짜 놓은 동선대로 일정을 소화하기도 해 봤고, 스케쥴러 가득 가봐야 할 곳들을 리스트에 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의 여행은 조금 달랐다. 재료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머지, 계획했던 맛집은 모두 패스하고 허기진 채로 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후 인근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걸어가는 길에 우연히 큰 서점을 마주치게 되어 요리책을 보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모른 채 그곳에 한참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반찬가게에 들러 책에서 보던 그 채소로 요리한 반찬들과 맥주 한 캔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극찬하는 프리패스 교통권을 샀지만 교통권이 지갑 밖으로 나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제 역할을 채 하지 못한 교통권에 웃음이 났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여행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치앙마이의 낯선 주방


겨울옷을 돌돌 말아 배낭에 넣어 도착한 겨울의 더운 치앙마이. 단출한 옷과 속옷, 세면도구, 요가매트 하나만 넣어 떠난 첫 장기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지의 아침식사에 대해 나름의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대식가도 아니고 먹는 양도, 시간도 정해져 있는데 정작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맛볼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인 이 안타까운 상황. 그렇다 보니 한 끼 한 끼가 매우 소중했다. 새로운 음식을 만날 수 있는 이런 귀한 기회를 호텔 조식 뷔페로 낭비할 수는 없었다.

▲ 슈퍼마켓에서 찾은 유기농 두유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다. 슈퍼마켓을 찾아보는 것은 나의 자연스러운 여행 첫 코스다. 특히 첫날에는 조리도구도, 이렇다 할 양념도 없으니 제철 과일과 두유 등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가장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느리게, 나만의 아침을 먹기. 요리를 하려면 아무래도 주방이 필요했다. 주방이 있는 숙소를 찾기 위해 에어비앤비 애플리케이션을 열고 '치앙마이'를 검색했다.

▲ 치앙마이 현지식 주방

치앙마이 도심에서 벗어난 호스트 탱(Taeng)의 집은 이런 내 호기심과 휴식을 모두 해결하기에 딱 맞는 부엌이었다. 전통적인 형태는 아니라 현대식 주방에 가까웠지만 태국 특유의 느낌을 곳곳에 잘 살려두었다. 없는 것 빼고 알차게 다 있는 이 집의 부엌에서 나는 요리하며 여행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탱이 내 요리 프로젝트를 응원해주었기에 마음껏 요리하고 먹고 느낄 수 있었다.

▲ (좌) 길거리 프라타로 만드는 팬케이크 / (우)두유 요거트와 계절과일 아침

케이크를 먹지는 않으나 케이크 만드는 일을 너무 사랑한다는 그는 내가 머무는 동안 필요한 집기며 도구를 모두 선뜻 제공해주었다. 지금은 친구가 된 친언니 같은 탱 덕분에 매일 저녁이면 근처의 카페로 가 궁금한 식재료를 물어보고 어떻게 요리하는지 팁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장점은 매주 작은 시장이 동네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제주 오일장의 할머니 장터처럼 인근 소농들이 재배한 과일과 농산물을 다양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날그날 가지고 나오는 채소들의 종류가 다르기에 낯선 채소를 만날 때면 재빨리 어떤 요리를 어떻게 만들어 재료를 맛볼 건지 머릿속에서 생각해야만 했다. 3주가 넘어가니 장을 보는 나만의 단골집과 기준이 생기기도 했다. 과일은 어떤 곳이 좋은지, 채소는 집 앞의 어떤 마켓이 가장 신선하고 저렴한지 등을 파악해서 장을 봤다.


장이 서는 날이면 더 부지런해야 하기에 이른 요가, 가벼운 명상을 마친 후 든든히 요기를 하고 장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그 오전의 여정이 좋다고 할까. 그 내면의 행복함을 찾았기에 나는 치앙마이에 머무는 동안 그 흔한 유적지나 관광명소를 일정에 넣지 않아도 충분히 알차고, 시간을 맞춘 동선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충분히 치앙마이를 알 아갈 수 있는 나 다운 여행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방에서 밥 짓는 냄새가 익숙해질 즈음


태국에 머무는 동안 태국식 재스민 라이스를 잘 먹었지만, 가장 맛있었던 밥은 좋은 식당의 밥도, 소문난 밥집의 그것도 아닌 내가 직접 갓 지은 냄비밥이었다. 마트에서 찾을 수 있는 쌀의 종류가 많아 머무는 동안 호기심에 현미쌀, 일반 백미, 유기농 쌀 등 다양한 쌀을 구입해서 먹어보았다. 역시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쌀이 가장 중요했다. 유기농으로 지었다는 재스민 라이스를 구입해온 첫날, 태국식 밥 짓는 것을 배운 적도 없고 어깨너머로 볼 기회도 없었지만 같은 아시아 음식문화 속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낯설지 않게 첫 밥을 했다. 약불에 뜸 들듯 들썩이던 냄비가 고요해질 즈음, 온 집에 향긋한 밥 냄새가 가득해졌다.

▲ 자스민 라이스와 함께 차린 간단한 식사

한국에서 맡았던 그 생명력을 잃은 이국적인 향기가 아닌, 신선한 쌀에서 나는 그 진짜 재스민 같은 향은 아마 누군가에게는 여린 고수풀의 향처럼 대단히 낯설 수도 있을 것 같다. 첫맛과 향에 반해 쌀밥을 직접 지으면서 어느샌가 이 향에 어울리는 태국식 채소 반찬들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치앙마이에 온 지 몇 주가 흘렀을까. 점점 빵이나 요구르트 같은 가벼운 식사에서 이 향긋한 밥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어려울 즈음, 피시소스라던지 타마린과 코코넛 슈거에 익숙해져 갓 지은 재스민 라이스에 어울릴 음식을 찾아 신나게 요리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신나게 요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의 친구이자 요가 선생님인 폰(Fon)이 이야기했다.


“재스민 라이스의 향이 익숙하다면 넌 치앙마이를 사랑할 준비가 된 거야.”




음식은 함께 나누어야 맛있어진다


나는 탱의 주방을 떠나 치앙마이 외곽에 위치한 새미(Sami)의 주방으로 여행을 이어갔다. 울창한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다. 집을 옮겨 다니면서 주방 살림살이는 점점 늘어나 배낭 가득 어느새 이동 주방이 되었는데, 새미의 주방이야말로 정말 딱 1인이 집에 박혀 요리하기 쉬운 이상적인 주방이 아닐까 싶었다. 이곳이 다른 곳 보다도 특별하게 남은 이유는 여기에 모인 손님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음식을 사랑했다.

▲ 새미의 집, 맨 아랫층이 주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이곳을 새미랜드(Sami Land)라고 불렀는데, 휑한 바깥과 달리 나무로 둘러싸인 성의 내부는 저녁마다 우리들만의 작은 저녁식사 모임으로 시끌벅적하곤 했다. 사실 이전까지의 내 여행은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초대에 응하는 일도 없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긴장을 늘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새미랜드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그런 내 습관을 모두 바꾸어 스스럼없이 지냈다. 나는 그 이유를 새미의 음식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정말 요리를 사랑하는   새미는 모든 태국음식을 뚝딱뚝딱 쉽게도 만들었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능수능란하게 생선을 손질해 기가 막힌 생선 수프를 끓인다거나, 민물게를 넣은 쏨땀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태국식 죽을 넉넉히 끓여 오며 가며 지나다니는 게스트에게 무조건 맛보라며 내민다.

처음엔 그의 독특한 모습이나 말투에 선뜻 함께 하지 않는 이도 많았으나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만난 이들은 새미의 음식 앞에서 모두 친구가 되었다.


혼자 묵는 게스트든, 둘이서 혹은 가족과 함께 묵는 게스트든 본인의 의사에 맞게 각자 요리한 음식을 가지고 새미의 식탁에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체크아웃을 하며 함께 묵었던 이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던 날, 나는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시장에 가 배추를 사고 소금에 절인 후 아쉬운 대로 태국의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가 선물했다. 함께 준비한 한국식 쌈밥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질 때의 그 행복함은 요리를 하면서 느꼈던 오랜 갈증을 모두 해소해주는 듯했다.

음식은 함께 나누어야 진가를 발휘한다. 아침에 일어나 자전거로 시장에 가고 신선한 채소로 아침을 요리하고서 책상에 앉아 그 날의 요리를 기록하고 글을 매만지는 일상 덕분에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주방을 통해 그곳을 알아간다는 것


물론 이런 시장과 주방이 곧 여행이 되는 것은 비단 해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방문하는 경상남도 남해. 치앙마이를 다녀온 후 문득 남해의 주방이 궁금해졌다. 늘 여행지 같았던 남해가  제철 식재료를 여행하듯 요리하는 일상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진짜 친구가 된 그런 느낌이랄까. 아마 이곳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루 이틀 머물다 떠나가는 여행자로서의 남해만을 계속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남해에서 만난 돌담길 뒤의 풍경

주로 생선회나 멸치 같은 해산물 만을 떠올렸던 과거의 남해여행과는 사뭇 다르게 이 아담한 주방에 머무는 동안은 나는 온전히 '남해의 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꼬불꼬불한 돌길을 걸어올라 도착한 산 아래 맨 끝집은 시골 할머니의 집이 포근하지만 호스트의 감각이 소박한 주방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오래된 싱크대 너머로는 남해바다가 보였고 집 뒤의 작은 텃밭과 옹기종기 장독들이 모여있는 곳은 요리를 하며 글을 쓰고 사색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집 뒷 산에 있는 여린 머윗잎과 머위 꽃은 쌉싸름한 된장국으로 탄생해 봄의 밥상을 꾸렸고, 노란 유채꽃은 유채향이 은은히 나는 소스로 만들어 팬케이크에 올려졌다. 읍내에 있는 장에 가는 날이면 오래된 식당의 콩죽 한 그릇을 사서 마루에 걸터앉아 먹기도 하고, 바람 좋은 날의 저녁이면 지역 막걸리와 묵은지로 부친 김치전의 소박한 낭만이 있는 곳은 일상을 느린 호흡으로 함께 해야만 보이는 남해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텃밭의 봄나물로 차린 나물전과 머위된장찌개, 쑥밥.

누군가에게 여행지에서의 주방은 그저 급하게 또는 늦은 시간의 저녁 끼니를 해결하거나, 혹은 설거지를 하는 등의 부가적인 공간일지도 모른다. 여러 주방을 거치면서 알게 된 나름의 공통적인 사실은 주방을 결코 사소하게 내버려 두지 않은 호스트들은 모두 하나같이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단순한 맛집에 대한 추천을 너머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기꺼이 답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노을이 깊게 들어오는 남해의 부엌

여행 중에 만났던 한 사람은 장바구니 가득 들어있는 채소를 보며 왜 여행을 와서 그냥 사 먹지 않고 피곤하게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집에서 요리하고 설거지하듯 주방에서의 놀이를 마냥 ‘일’처럼 대한다면 이만큼 고생을 사서 하는 여행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방을 통해 식재료로 만나는 현지의 내음과 그 맛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사소하다 느껴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여행지의 민낯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하나의 또 다른 방법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 같이 시장과 주방에서의 움직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말이다.




에어비앤비 작가, 신주하

답답한 채식요리 저너머 새계의 모든 재료가 궁금한 채식요리연구가. 늘 요리하며 여행하는 삶을 꿈꾸며 배낭을 꾸리지만 어쩌면 매일 요리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 @dear_juha

블로그 www.dearjuha.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