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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Aug 22. 2019

예술적인 이스탄불 뒷골목에서
살아본 7일

‘이스탄불의 소호’ 추쿨쿠마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뉴질랜드 캠핑 어때? 계절이 반대라 추우려나?” 

"다합에 가자. 다이빙도 실컷 하고. 애들이 이집트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몽골이 좋겠다! 여름이 가장 좋데." 


신입사원 동기로 만나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한 회사를 20년 다니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제 내 가장 가까운 곳에 그런 사람이 있다. ‘젖은 낙엽 정신'이 직장생활의 신조, 그러나 놀 때만큼은 누구보다 대범한 그는 장기근속 휴가에 여름휴가, 연차까지 붙여 무려 한 달간의 안식 휴가를 결정했다. 짧은 휴가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되도록 멀리멀리 떠나자며. 

 
온갖 곳을 떠올리며 상상 여행을 하던 우리는 마침내 터키로 목적지를 정했다. 사실 ‘정했다’기보다 ‘정해졌다’는 표현이 맞다. 여행지는 원래 특가 항공권이 점지해 주는 거니까. 신기하게도 이스탄불행 티켓을 끊고 나니 터키에 가야 하는 이유가 줄줄이 떠올랐다. 

▲ 가족과 함께 이스탄불 거리를 걸으며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한 곳에 있는 매력적인 나라, 동서양이 만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오스만 제국물가가 저렴해 장기간 가족여행을 떠나기에 부담이 덜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터키는 내가 한번 가본 적이 있어 계획을 짜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아이들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라 안심됐다.


'아이들이 열기구를 얼마나 좋아할까? 화려한 디저트의 세계에 빠져들지도 몰라.’

‘아폴론 신전 뒤로 저무는 석양을 보고 아름다운 여름 지중해도 실컷 즐겨야지!'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보석 같은 골동품 골목, 추쿨쿠마 

▲ 추쿨쿠마 거리에서 만난 소규모 작업실

터키 한 달 여행을 계획할 때, 일정만큼 많이 고민했던 것은 숙소였다. 우리는 두 아이와 함께인 가족이기에 여행 중에도 안정적으로 머물 곳이 필요했다. 때로는 대략의 위치와 숙소를 먼저 정하고 주변에 갈만한 곳을 찾기도 했는데, 마지막 여행지인 이스탄불도 그랬다. 왕복 항공권을 끊었으니 시작과 마무리는 당연히 이스탄불에서 해야 했다. 여행 초반에는 시차에 적응하며 짧게 구시가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고 막바지에는 신시가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러 보기로 했다. 마지막 숙소는 특히 긴 여행에 지친 아이들이 쉴 수 있는 곳, 새로운 볼거리가 있으면서 안전한 곳, 교통이 편리하고 이스탄불에서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고른 장소는 ‘이스탄불의 소호’라 불리는 추쿨쿠마(Çukurcuma). 가이드북에도 없는 낯선 곳이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앤티크 숍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거리였다. 실제로 보면 홍대 뒷골목처럼 힙하면서도 조용한 동네의 모습을 간직한, 서울로 치면 합정, 상수동 정도의 느낌이랄까? 

▲ 앤티크 숍, 아트 갤러리, 인테리어 소품점 등이 구석구석 들어차 있다.

여행지로 먼저 추쿨쿠마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이스탄불 지도를 펼쳐 놓고 조건에 맞는 숙소를 찾던 중, 베이욜루(Beyoğlu) 구의 지한기르(Cihangir) 지역에 독특한 인테리어로 꾸민 집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찾아보니 '지한기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홍등가였던 곳이다. 저렴한 임대료 덕에 대학생과 가난한 예술가들이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홍등가가 사라지고 요즘과 같이 활기차고 감각적인 거리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지한기르 지역에서도 특히 추쿨쿠마 거리에는 150여 개가 넘는 앤티크 숍과 아트 갤러리, 중고 서점, 레코드 숍, 박물관, 카페, 음식점, 소규모 작업실 등이 구석구석 들어차 있다.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로 번화한 이스티크랄 거리 뒷골목에 이런 보석이 숨어있을 줄이야! 




갈라타 타워가 보이는 일주일 우리 집

▲ 숙소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갈라타 타워가 보인다.

우리가 머문 에어비앤비 숙소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스탄불에서 드물게 새로 지은 건물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공동주택이었다. 그러나 이스탄불에서 옛 유럽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에 있는 만큼 신축 건물이라도 19세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 스웩 넘치는 일주일 우리 집

거실에 들어서니 널찍한 실내에 호스트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사진과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도심이지만 마치 정글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실 인테리어는 빈티지 가구와 함께 우리가 이스탄불 예술 거리에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 첫날 장바구니. 로메인 상추로 겉절이도 담아 먹었다.

집 자체는 숙박업을 위해 새로 꾸민 것이 아닌, 호스트가 살던 집을 잠시 빌려주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프린터와 종이 등이 있어 당장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부엌에는 커피머신, 토스터, 착즙기 등 우리 집보다 많은 주방용품이 있어 얼른 장을 봐오고 싶었다. 네 가족 일주일 머물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했다. 한식을 찾는 아이들 때문에 아침과 저녁을 숙소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양한 조리도구와 조미료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손바닥 만한 테라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도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다. 철제 테이블과 의자 두 개만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곳에서 차이 한잔과 바클라바(터키식 디저트)를 즐길 때면 이스탄불에 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터키를 떠나기 전날 녁에는 와인을 홀짝이며 노을 지는 갈라타 타워를 바라보는 감동적인 순간도 누릴 수 있었다. 매일 빨래를 널고 걷는 옆집 아주머니와 건물 간격이 좁아 커튼이 일상화된 이곳에서 드물게 창문을 활짝 열고 지냈던 건넛집 청년은 오늘도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아이와 함께 동네 어슬렁거리기

▲ 숙소에서 밀린 일기 쓰는 아이

아이들은 이곳을 ‘호텔’이나 ‘숙소’ 대신 ‘우리 집’이라 불렀다. 머물렀던 숙소 중 서울의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기도 했고, 그만큼 편하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은 하루 서너 시간만 외출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머물 때가 많았다. 식탁에서 밀린 방학 숙제를 하고, 소파에 누워 책을 보고, 심심한 오후면 건물 1층으로 내려가 고양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 아이들이 귀여워했던 길고양이. 인테리어 소품점에서 전용 의자와 물그릇도 내어주어 이곳에 거의 사는 듯 보였다.

평소 애완동물을 기르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추쿨쿠마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어디서든 고양이를 만날 수 있었다. 1층 현관 옆 인테리어 소품점에는 매일 찾아오는 길고양이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자신이 마치 냥집사라도 된 것 마냥 자주 고양이를 살피고 귀여워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더니, 외출할 때나 집에 돌아올 때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터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안아준 첫째 양은 고양이의 체취가 담긴 물티슈를 아직도 보물상자에 간직하고 있다.  


하루는 저녁 늦게 집 근처 카페 산책에 나섰다. 어린이는 늦어도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마지막 여행지’라는 특별한 환경이 밤 나들이를 가능하게 했다. 어른들은 차이를,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시키고 늦도록 보드게임을 즐겼다. 터키에서는 보드게임이 흔하다. 정식 보드게임 카페가 아니더라도 터키 차를 파는 카페에서 누군가가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면 그곳에서는 틀림없이 보드게임을 대여할 수 있다. 가장 흔한 게임은 오케이. 우리에게는 루미큐브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게임을 여행 내내 즐겼다. 그날 게임은 누가 이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터키 여행을 다녀온 후 둘째 군의 계산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둘째 군은 한 달 여행의 마무리로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여행지에서 현지 스타일로 이발하는 모험을 즐기는 남편은 봐 둔 이발소가 있다며 아들을 데려갔다. 요즘은 누구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지만,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에서는 좀처럼 미용실을 보기 어렵다. 대신 남성 전용 이발소가 흔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이발사는 무뚝뚝한 표정에 말도 잘 통하지 않았으나, 단돈 몇천 원에 꼼꼼하게 머리를 다듬어줬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했던 아이도 완성된 짧은 스타일의 헤어컷을 마음에 들어했다. 다음날 남편도 같은 이발소에 다녀온 것을 보면 그 실력을 인정할만하다는 뜻이 아닐까?




 추쿨쿠마에 머문다면 이곳만은 꼭!


여행자로 붐비는 관광지를 벗어나  추쿨쿠마에 있는 숙소로 향할 때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추쿨쿠마는 아이보다 어른에게 더 재미있는 곳이다. 혹시 이스탄불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하루쯤 시간을 내 산책하듯 둘러보기를 권한다.원래 경복궁, 인사동 구경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삼청동 뒷골목 탐방이 아닌가. 여기, 추쿨쿠마에서 꼭 해봐야 할 추천 리스트를 소개한다.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다.  


1. 나만의 개비 개비(Gabby Gabby)를 찾아, 골동품점 탐방

▲ 추쿨쿠마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앤티크 숍, 밤에 보면 좀 무섭기도.

추쿨쿠마에 가장 많은 것이 골동품점이다. 주말에는 가게 앞에 물건들을 내놓고 판매하기도 해 벼룩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 ‘토이 스토리 4’에 등장했을법한 골동품점에는 ‘과연 팔리기나 할까?’ 싶은 물건도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추억의 물건들이 쌓여 이 거리의 매력을 만든다. 터키색 물씬 나는 디자인 타일과 앤틱 가구, 인테리어 소품들도 많다. 평소 앤틱 제품이나 빈티지 인테리어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 들러보기를. 단, 비 오는 날이나 어스름한 저녁에는 좀 무서울 수 있겠다.  



2. 오르한 파묵의 팬이라면, 순수 박물관  

▲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소설 ‘순수 박물관(The Museum of Innocence)’을 추쿨쿠마 거리에 실제로 재현해 놓았다. 순수 박물관은 44일 동안 사랑을 나눈 여자를 평생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만드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두 권의 책으로 번역된 한국어판에는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순수 박물관 무료입장권(2권 386  쪽)과 지도(목차 뒤편, 책에는 ‘추쿠르주마 대로’라 표기)가 들어있다. 관심이 있다면 여행 전 미리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허구를 현실로 만든,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한 순수 박물관은 오르한 파묵의 팬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다.  



3. 갈라타 타워를 바라보며 생맥주 한잔

▲ 내가 터키 맥주 중 최고로 치는 보몬티 생맥주, 갈라타 타워를 감상하며

갈라타 타워(Galata Tower)는 옛 이스탄불 갈라타 지구에 세워진 중세시대 석탑이다. 이스탄불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숙소에서 매일 볼 수 있었지만, 매일 갈 수는 없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해 아이와 함께 가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갈라타 타워 가는 길에는 상점가와 카페들이 심심치 않게 있어 목을 축이고 기념품을 구경하며 등반(?)할 수 있다. 그러나 타워 꼭대기에 오르려면 또 긴 줄을 서야 한다. 탑은 밑에서 보는 것이 더 멋진 법. 과감하게 줄 서기를 포기하고 카페에 앉아 땀을 식히며 맛있는 로컬 생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그밖에 1831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터키식 전통 목욕탕, 추쿨쿠마 하맘에서 때를 밀어 본다거나 중고서점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하맘이 리노베이션 공사 중이어서, 그리고 짐을 더 늘리기 싫어서 도전해보지 않았다.




동네 여행의 즐거움, 결국 사람

▲ 터키의 흔한 동네 풍경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캐리어 끌기가 쉽지 않았다. 골목 초입으로 마중 나와 가장 무거운 캐리어를 도맡아 옮겨주던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없었다면 울퉁불퉁한 그 길을 어떻게 지났을지 상상이 안 된다. 그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종종 메시지를 보냈는데, 덕분에 우리는 터키의 신속한 마트 배달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역시 배달의 민족, 형제의 나라였다. 


추쿨쿠마에는 힙한 카페와 상점들도 있지만, 우리가 다녀온 이발소나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음식점 등 동네 분위기 물씬 나는 가게도 많았다. 아침 식사로 다양한 터키식 페이스트리를 추천해주던 뵈렉(Börek)집, 배달 전문 케밥 집, 학생 손님들에 섞여 바클라바를 샀던 디저트 집, 각종 올리브들을 하나씩 맛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도 들을 수 있었던 절임 가게, 아이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던 오래된 카페들은 이 거리에 진짜 활력을 불어넣는다. 문득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동네가 떠올랐다. 부디 사이좋게 오래오래 영업하시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행지에서 생김도 언어도 다른 우리는 철저하게 이방인이다. 특히 아이와 여행은 조심스러운 점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행을 즐기는 까닭은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고 좋은 사람들이 있어 살만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곳에 머무르며 현지인 흉내를 내다보면 관광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의 동네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는 방법이 달라도 결국 여기도 다 아이 키우고 사람 사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여행 마지막 날임을 함께 아쉬워해 준 케밥 집 사장님과 그의 딸, 밤송이 같은 둘째 군의 머리를 불쑥불쑥 쓰다듬던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 무엇보다 짐을 보관해줄 수 있냐는 문의에 레잇 체크아웃도 가능하다며 흔쾌히 요청을 들어준 호스트 Eren에게 감사한다. 






에어비앤비 작가, 전혜원

해변의 석양과 맥주 한 병을 사랑하는 엄마 여행가. 

10년간 대기업에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고 현재는 언어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이를 키우며 여행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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