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도의 걱정 내려놓기 여행 : 베를린, 라이프치히, 만하임, 뮌헨
2017년 봄,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 휴학을 했다. 어릴 때부터 입시 경쟁에서 고군분투하느라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내게는 앞으로 가지게 될 1년의 공백이 너무 크게 느껴졌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나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SNS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고, 나도 그 거대한 행렬에 동참해보려 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조금 다른 세상이 내 앞에 열릴 것 같았다. 나는 한 달으로 계획한 여행 중 3주를 독일에서 지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독일은 여행으로 가는 것보다는 살러 가기에 좋은 나라’라는 말을 하는데, ‘살기 좋은 나라의 방식’은 어떨지 궁금했고, 그런 방식들이 나의 마인드에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술학도로서 추후에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하게 된다면 독일은 어떨지 고려해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3주의 기간 동안 크게 베를린, 라이프치히, 만하임, 뮌헨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도 좋지만, 한 곳에서 아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것도 괜찮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의 모든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했다. 곧 떠날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호텔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는 에어비앤비에서의 경험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럽에 도착한 후 파리에 사는 친척과 런던에 사는 친구를 만나 두 도시를 쉴 틈 없이 돌아다닌 다음, 정확히 일주일 후인 5월 1일, 베를린 테겔 공항에 이륙함으로써 나의 독일 3주 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테겔 공항을 나서서 버스와 S반을 갈아타며 베를린 외곽에 있는 에어비앤비 호스트 더글라스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독일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설렜지만, 지난 일주일간의 강행군에 몸도 마음도 지쳐서 빨리 짐을 풀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더글라스 할아버지의 집이 위치한 베를린 남서부의 그루네발트 Grunewald는 베를린 중심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동네였다. 구글 맵을 보며 도착한 집에서 더글라스 할아버지가 인자한 웃음과 함께 마중을 나오셨다. 더글라스 할아버지의 집은 독일의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세대 주택이 아닌, 두 개의 집이 벽면을 마주한 오래된 단독 주택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걸을 때마다 마룻바닥이 약간 삐걱거렸지만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었고, 도리어 옛날 집 특유의 운치가 느껴졌다. 2층에 있는 나의 방에 올라가 곧바로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지난 한 주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느라 하지 못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문득 내가 너무 무모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삼 주간 낯선 곳에서 혼자 생활해야 하는데, 그에 비해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 없이 온 것이 아닌가 싶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전 일정 때문에 무리한 몸이 으슬으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5월이지만 베를린은 여전히 추웠고,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춥고 습한 날씨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벽에 조그만 난방기가 붙어있었다. 독일에서 하이쭝 heizung이라고 부르는 라디에이터 난방기가 붙어있었다. 바로 하이쭝을 최대로 틀어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서는 마침 더글라스 할아버지가 나에게 줄 차를 끓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해 준 차와 조식을 들고 방으로 돌아와서 의자에 앉아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전날 피곤하고 우울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바깥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푸른 풀과 나무,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봄이 오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더글라스 할아버지가 준비해준 조식에 따뜻한 차까지 마시니 밤새 굳어버린 몸이 따스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여행객이라면 모름지기 아침 일찍 나서서 그 도시에 있는 모든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보기 마련이다. 지난 한 주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보기’로 했기 때문에 너무 부지런 떨지 않기로 했다. 오전 시간 동안 여유롭게 한결 따뜻해진 방을 만끽하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 베를린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보며 ‘커리 부어스트’가 베를린의 명물이라는 내용을 보았다. 부어스트 wurst는 독일어로 소시지를 뜻한다. 카레 소시지라니! 그 유명한 커리 부어스트를 먹으러 가는 김에 쿠담 거리 Kurfürstendamm와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도 구경한 후에 초 Zoo 역에 있는 유명한 커리 부어스트 노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쿠담 거리로 가기 위해 S반 역으로 갔는데, 문득 어제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역에 개찰구가 없는 것이다. 독일의 역에는 따로 표를 검사하는 곳이 없다. 표를 구매했으면 그 표를 개시하고 바로 기차나 S반(지상철), U반(지하철)을 타면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양심을 믿는 방식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신기했다. S반과 U반을 갈아타며 쿠담 거리에 도착했다. 주변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금세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가 보였고 교회를 지나쳐 초 역 앞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혹시라도 커리 부어스트 노점 Curry36이 닫았을까 걱정하던 찰나, 커리 부어스트를 먹기 위해 줄 선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인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니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평범한 소시지에 토마토소스와 마요네즈, 감자튀김이 올려져 있었고, 한 입 먹어보니 과연 카레 향기가 진하게 났다. 매콤하고 중독적인 맛에 맥주 한잔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춥고 쓸쓸했던 어제와는 달리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곳에 오게 되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 지역에 대한 매핑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무작정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넣는 시간을 보내면 좋다. 새로운 맛집을 찾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자라날지도 모르니까.
베를린에서의 시간은 대체로 좋았다. 다양한 건축물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돌아다녔고, 연식이 있는 건축물 벽에 제2차 세계대전 시 총격으로 인해 생긴 홈들이 남아있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베를린을 즐긴 후 넷째 날 아침, 더글라스 할아버지가 조식을 준비해 주시며 오늘은 어느 곳을 여행할 예정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포츠담에 갈 것이라고 대답했고, 더글라스 할아버지는 좋은 생각이라며 빙그레 웃으셨다. 이번엔 베를린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도시인 포츠담 Potsdam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주의 주도인 포츠담은 넓은 숲을 끼고 있는 상수시 Sanssouci 공원과 궁전으로 유명하다. 그루네발트에서 포츠담으로 가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그루네발트 역에서 베를린 반대 방향으로 S7열차를 타면 20분 만에 도착한다. 포츠담 역에서 상수시 공원까지는 트램으로 이동했다. 트램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상수시 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에서 보기에는 작은 공원처럼 보였는데, 막상 들어서니 끝없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지도는 보지 않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돌아올 때는 구글 맵이 길을 알려줄 테니까.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걷다 보니 상수시 궁전이 보였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여름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궁전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근심 없는 궁전 Palais de Sanssouci이라는 뜻이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처음엔 두렵고 낯설었지만, 베를린은 나에게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의 나를 사랑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다. 내일 만나게 될 새로운 도시에서는 무엇을 찾게 될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라이프치히 Leipzig로 가기 위해 플릭스 버스를 탔다. 플릭스 버스는 한국의 고속버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버스 내에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버스 출발 후, 두 번째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허버트에게 연락을 했다. 허버트는 축구 경기 관람 차 다른 도시로 가기 때문에 하루 동안 연락이 안 될 것이라고 하면서 혼자 체크인할 수 있도록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했다. S반을 타기 위해 표를 끊었는데 실수로 1회권을 끊었다. 일주일권을 끊었어야 했는데, 사소한 실수는 잊기로 하고 S반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멀고도 험했다. 역에서 아파트까지는 도보로 아주 오래 걸렸고, 30인치 캐리어는 너무 무거웠으며, 현관문은 잘 열리지 않았고, 겨우 현관문을 열었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도대체 몇 층으로 가야 하는 거지? 문자 내용과 에어비엔비에 게시된 글을 아무리 봐도, 몇 층으로 가야 하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1층 집의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1층 호스트의 도움으로 방을 찾아 들어올 수 있었다.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는 매우 화창했고 아파트로 둘러싸인 정원이 매력적이었다. 문득 오늘 이 곳으로 오기 위해 많은 문제를 겪었지만 크게 낙심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사소한 문제로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불만이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의 일상이 내게 괜찮다고, 내려놓는 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뿐해진 몸으로 집을 나섰다. 30인치 캐리어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힘이 넘쳤다. 다시 S반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서 라이프치히의 번화가를 구경하고, 장을 보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허버트의 아파트는 공용 주방이 있어서 직접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여러 마트 체인이 있는데 그중 내가 주로 가게 된 곳은 레베 REWE였다. 대체로 늦게까지 영업하므로 언제든지 들러서 먹거리를 사기 좋았다. 독일의 마트에는 명성만큼이나 많은 맥주가 있었고, 치즈, 햄 등의 가공품도 다양했다. 게다가 식료품의 가격이 매우 저렴한데, 독일이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삼겹살 한 근이 3유로(당시 환율로 3600원 정도)라니! 정말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쉽게 조리할 수 있는 음식들을 위주로 하여 장바구니를 채웠다. 베를린에서 처음 커리 부어스트를 먹을 때 맥주 한 잔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마트를 가든 즉석 커리 부어스트를 팔고 있으므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자레인지에 2분만 데우면 되는 간편함!
집으로 돌아가 노을 지는 풍경을 보며 즉석 커리 부어스트에 마트에서 함께 사온 맥주를 곁들여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되는 대로, 가는 대로 즐기는 것도 여행이고 거창하지 않아도, 어쩌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행복인데.
때로는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의심하고 주저하기보다
그대로 걸어가 보는 낙관도 필요한 것 같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니까.
숙소는 쾌적했고, 호스트는 친절했다. 허버트는 리버풀에도 자신의 숙소가 있으니, 리버풀에 오게 되면 꼭 들러달라고 당부했다. 축구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다. 허버트의 추천을 받아 라이프치히와 근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라이프치히에서의 마지막 밤에도 어김없이 커리 부어스트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다음 날 약간의 숙취와 함께 다음 도시로의 길을 떠났다.
다음 도시인 만하임으로 가기 위해서는 프랑크푸르트까지 간 후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기차가 출발했고 한참 밖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는데, 출발한 지 40분쯤 지났을까, 독일어로 기차 내 방송이 나옴과 동시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는 사람, 캐리어를 걷어 차는 사람, 욕하는 사람 등. 나 또한 방송의 내용에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기차가 실수로 지금까지 반대 방향으로 왔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주 큰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렇게 큰 일은 아니었던 걸까,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렇게 예상시간보다 한참 늦게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고, 원래는 남는 시간 동안 프랑크푸르트를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기차가 거꾸로 가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만하임으로 가는 기차를 바로 타야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4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만하임 중앙역에 도착했다.
만하임 Mannheim 은 계획도시로 설계되어 동그란 형태에 바둑판 모양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도시인데, 그래서 길을 찾는 법도 조금은 달랐다. 보통 대체로 독일에서 사용하는 도로명 주소가 아닌 일련번호식 주소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구역의 5번째 집은 a5라는 주소를 가지게 된다. 상당히 직관적인 주소이다. 주소를 따라 내가 머물게 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앞 건물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는 호스트 헤르만에게 키를 받을 수 있었고, 헤르만이 알려준 건너편 아파트의 집으로 들어왔다. 짐을 풀기가 바쁘게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섰다.
만하임은 철저한 계획도시인 덕분인지 중심지 이론에 아주 걸맞은 구조로 되어있다. 도시 중앙에는 관공서가 있고, 그 주위를 상권이 둘러싸고 있다. 다음으로는 주거지가 도시의 전반을 감싸고 있다. 말 그대로 ‘살기 좋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또, 만하임의 곳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시 이곳저곳에 위치한 광장에서, 라인 강변에서, 노천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니 나는 지금까지 너무 먼 곳을 보며 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살기 좋음’은 소중한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한다는 뜻이 아닐까.
독일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 바로 ‘바덴바덴 Baden-Baden”이라는, 만하임에서 1시간 거리의 도시인데, 유명한 온천 휴양 도시이다. 나는 바덴바덴에서 사람들이 주로 가는 온천 중 한 군데인 카라칼라 온천 Caracalla Therme에 갔다.
사실 바덴바덴에서 온천욕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다. 독일에서는 사우나를 할 때 혼성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문화인데, 그 문화를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은 이유였다. 온천은 수영복을 걸치고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사우나를 하기 위해서는 전부 벗고 수건만 소지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심호흡을 하고 사우나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은 놀랍도록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온천욕과 사우나를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독일에 와서 누군가 나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만큼 일상 속에서 긴장하는 빈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자신의 의식을 컨트롤함으로써 상대방의 편의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은 만하임에서 10분 거리인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에 갔다. 빵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터프레첼을 사서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향해 걸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구 시가지 위로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보였다. 고성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 곳에 멈춰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올려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외벽만 남아 있는 건물의 창문으로 하늘이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내심 뿌듯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적당히 따사로웠다. 고성을 내려오기 전까지는. 독일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워서 갑자기 부슬비가 내리는 것은 예사인데, 맑고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래갈 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이 참에 식사나 하고 오자는 요량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다행히 비는 금방 그쳤고, 식사를 마치고 나올 쯤에는 먹구름도 조금씩 개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에는 아주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지만 가끔은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그 끝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다.
내 손 위에 내려앉은 무지개처럼!
만하임을 떠나 친한 언니가 살고 있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의 3주 독일 살기의 종착지인 뮌헨 München에 도착했다. 뮌헨에 머무는 동안 나는 에어비엔비 호스트 리차드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집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리차드의 고양이 ‘잉카’와 함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자 잉카가 나를 반겨주었다. 어쩌면 리차드와 잉카가 공동 호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손님에게 살가운 고양이였다. 호스트 리차드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었는데 이 집의 와이파이는 ‘뮌헨에서 가장 빠른 와이파이’이며 빨래를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부탁하라는 내용 등이 적혀있는 안내문이었다. 리차드의 배려 덕에 독일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뮌헨에서는 독일에서의 일들을 정리하느라 매일 바쁘게 걸어 다녔다. 가족과 지인들의 선물을 사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그 때문인지 독일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냥 아쉬워할 수만은 없는 법. 마지막으로 어딘가 떠나보기로 했다.
마침 뮌헨 교외에 슈타른베르크 호수 Starnberger See가 있어서 S반을 타고 가 보았다. 수평선이 보이는 한적한 호수, 슈타른베르크 호수는 거의 뮌헨만큼이나 면적이 큰 호수이다. 호수를 한가롭게 떠 다니는 오리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독일을 떠나는 것이 아쉽지만 그만큼 얻은 것이 많다는 것이니까, 아쉬움보단 좋은 것만 가지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과 진짜로 작별하는 날,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나오니 잉카가 계단까지 마중을 나왔다.
안녕 잉카, 잠시였지만 살갑게 대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안녕 독일!
조금만 그리워하고 다시 올게.
처음 혼자 독일에 도착했을 때의 막막함과 마지막에 느낀 평온함의 차이는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 같다. ‘살기 좋음’이란 결국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보고,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독일은 그 여유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노력이 사회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머물렀던 여행객의 마음도 바꾸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독일을 돌아보며, 문득 지금 어디에 있든지, 주변을 탐색하고 현재의 상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아주 긴 여행과 같으니까!
독일 여행자를 위한 Tip! 독일의 철도에 대하여
나는 독일에서 주로 철도를 이용하여 여행을 했다.
독일의 철도 시스템은 한국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생소한 점도 많은데, 이에 대해서 간략한 팁을 준비했다.
독일의 열차 종류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뉜다.
ICE: 한국의 KTX와 같이, 독일의 국내외 노선을 빠르게 운행하는 고속 열차.
IC: 한국의 ITX 또는 새마을호와 비슷한 열차. ICE보다는 저렴하다.
RE: 한국의 무궁화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큰 역 위주로 정차한다.
RB: RE와는 달리 모든 역에 정차한다. 하지만 S-반과 노선이 겹칠 경우 일부 역은 정차를 하지 않기도 한다.
S-반: 대도시권 광역 전철. 시내외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주로 지상으로 달린다.
U-반: 도시 내를 운행하는 지하철.
위의 열차 중 해당 도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U-반을 제외하고는 전부 DB(Deutsche Bahn: 한국의 코레일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회사) 소속이다. 기차를 주로 이용하여 유럽 여행을 하게 된다면, 유레일 패스 또는 저먼 레일 패스(독일 내에서만 이용 가능) 구매를 고려하게 되는데, 해당 패스를 이용하여 DB 소속 열차는 전부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도시나 지역 별로 정기권이나 여행 전용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Ex. 베를린 웰컴 카드, 바이에른 티켓 등) 여행 일정에 맞게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 외에는 일반적인 티켓을 구매하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티켓을 개찰구에 투입하거나, 찍은 후에 플랫폼으로 들어가는 반면 독일의 역에는 따로 개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열차 탑승 시에는 따로 표를 검사하지 않으나, ICE, IC는 반드시 운행 중 검표원이 와서 표를 검사하며, 아래 단계의 열차에서도 검표원이 무작위로 돌아다니며 종종 표를 확인하므로 반드시 표를 구매 후 탑승해야 한다. 만약 표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는 큰 벌금을 내게 되므로 주의하자.
역마다 놓여있는 티켓 머신을 통해서 표를 구매할 수 있으며, 개시 일자가 함께 프린팅 되어 나오는 표의 경우에는 즉시 사용할 수 있으나, 날짜가 따로 적혀있지 않은 표는 반드시 티켓 머신 옆에 함께 비치된 스탬프 기계를 이용하여 개시해야 한다.
여행 중 기차 이용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하여 공항 터미널이나 큰 역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 라이제젠트룸 Leisezentrum(여행 센터)을 적극 이용하자. 라이제젠트룸에서는 열차 정보 제공/예약뿐 아니라 유레일패스나 저먼 레일 패스를 구매하거나 게시할 수 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니까, 에어비앤비 숙소 선택 Tip!
내가 독일에서 지낸 숙소는 크게 두 가지의 타입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호스트 또는 호스트의 가족과 함께 지내는 집의 방 하나를 빌리는 경우이다. 베를린에서 머물었던 더글라스 할아버지의 집과 뮌헨에서 머물었던 리차드의 집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스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을 수도 있고, 해당 지역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는 호스트가 관리하는 숙소의 방 하나에 머물며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공용 공간을 공유하는 경우이다. 라이프치히에서 머물었던 허버트의 집과 만하임에서 머물었던 헤르만의 집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과 대화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고, 호스트와 직접적으로 함께 생활하지 않으므로 조금 더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도 에어비엔비에는 다양한 형태의 집이 있다. 모두 각자 다른 매력이 있는 집이지만, 어느 집이 당신의 일정에 가장 어울리는 집인지 찾을 수 있도록 작은 팁을 준비했다.
1) 숙소의 위치는 중요하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위치를 꼽을 수 있다. 주로 여행하고자 하는 지역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인지 확인해 보아야 하며, 어떤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 숙소의 시설, 매력적인 호스트 등의 요소도 매우 중요하지만, 즐겁고 쾌적한 여행을 위해서 숙소의 위치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또, 숙소가 안전한 곳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종종 치안이 좋지 않은 구역에 위치해 있는 숙소들이 있는데, 여행객 입장에서 쉽게 알 수 없으므로 해당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2) 당신의 성향을 살펴보세요.
에어비앤비는 호스트 또는 다른 여행객과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숙소를 고르기 이전에 자신이 원하는 옵션을 미리 체크해 보자. 공간(침실/욕실/거실/주방) 중 어느 공간까지 공유 공간으로 사용해도 괜찮은지 충분히 고려 후에 숙소를 선택한다면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호스트마다 허용하는 것과 제공하는 것의 범위가 다르다. 특히 호스트와 집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에 더욱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예를 들어 베를린의 호스트 더글라스 할아버지는 게스트가 주방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매일 아침 정성 들여 조식을 준비해 주셨으며, 뮌헨의 호스트 리차드는 게스트가 주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머무는 동안 세탁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옵션에 대해서는 호스트가 자신의 집을 소개하는 내용에 대체로 명시하므로 원하는 항목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미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의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는 스물다섯 살 부하연입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 찍으며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