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비앤비가 아니었다면 없었을 인연과 시간
2018년 9월. 생에 두 번째 버닝맨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남자 친구인 핫산, 우리 커플과 친한 조군, 가비 부부와 함께였다. 버닝맨은 미국 네바다주의 사막에서 일 년에 한 번, 일주일간 벌어지는 행사다. 약 7만 명이 모여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실험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얼음과 커피뿐이며 그 외에 물, 음식, 텐트, 자전거 등 일주일간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알아서 챙겨가야 한다. 돌아올 때는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머리카락 한올까지도 깨끗하게 수거해와야 한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고, 간간히 모래폭풍이 부는 극한 환경이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폭발시킨다. 사막 곳곳에 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다운 조형물이 세워지고, 영화 <매드 맥스>에 나올법한 아트카가 음악을 틀고 사람들을 태운 채 돌아다닌다. 내가 입는 옷부터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며, 공연을 하거나 요가를 가르치는 등 안 해봤던 일을 해보게 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광경도 압도적이지만, 정신적으로도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다.
사막에서 다시 모든 게 편리한 도시로 넘어올 때. 비현실적인 곳에 있다가 다시 현실 세계로 넘어올 때의 간극이 커서 그런 걸까. 버닝맨이 끝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날의 기분은 보통 여행에서 돌아올 때와는 조금 다르다.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과 꿈같았던 일주일을 뒤로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아쉬움이 몇 배로 더 강렬하게 찾아왔다. 사방이 영감으로 가득한 곳에서 일주일간 보고, 듣고, 느낀 게 너무 많아서, 그 모든 것들이 덜 흡수된 채로, 조금은 얼떨떨한 상태로 도시로 돌아왔다. 아직은 비물질의 세계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버닝맨이 끝난 후의 이틀 또한 감동적이고 소중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그 시간을 가능하게 한 인연은 '산 낙지'로 시작된다.
201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나와 핫산은 에어비앤비 트립 호스트로 활동했다. 우리의 트립은 서울의 인디 음악 신을 보여주는 게 콘셉트였다.
홍대에서 공연을 보는 건 내 오랜 취미 생활이라,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보여주는 건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핫산은 밴드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멤버이고, 당시에 나는 작은 공연을 기획하고 만드는 프로모터로 일하고 있었다. 핫산을 만나고, 음악 관련된 일에 발을 들인 후로는 공연 뒤에 뒤풀이가 이어질 때가 많았다. 우리의 이런 일상을 게스트들에게 경험시켜주는 것이 트립 호스트로서 우리의 임무였다. 첫날은 게스트들을 단골 엘피바에 데려갔다. 둘째 날은 홍대에서 공연을 보고, 백스테이지에 갔다가 뒤풀이에 함께 하는 게 트립의 일정이었다.
내 트립은 지구 곳곳에서 온 음악 마니아들을 끌어들였다. 혁오를 좋아하는 프랑스인 친구, 한국 음악 씬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싱가포르인 친구, 마닐라에서 밴드를 하는 친구 등.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니 서로의 음악 취향을 풀어놓을 때면 애쓰지 않아도 분위기가 금방 활발해졌다. 완벽하게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일본인 드러머와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미국인 게스트가 서로 좋아하는 드러머를 신나게 외치다가 5분도 안돼 순식간에 친구가 되는 순간들을 곁에서 지켜봤다. 나이, 인종, 성별, 국적을 넘어 음악으로 그냥 통하는 순간들을 마주하는 것이 트립을 진행하는 나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게스트들을 데리고 제비다방, 벨로주, 무브홀, 클럽 FF, 채널 1969, 상상마당 등의 공연장에서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장기하와 얼굴들, 김사월, 라이프 앤 타임, 솔루션스, 오지은 등의 공연을 봤다. 매력 있는 아티스트들의 수준 높은 공연만으로도 게스트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한국에 케이팝 말고도 이렇게 다양하고 좋은 음악이 많은 줄 몰랐어."
트립을 진행하며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공연을 보고,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모두가 흥에 취해 1차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쪽 벽면은 엘피로 가득 차있고, 한쪽 벽면은 뮤지션들의 영상이 나오는 엘피바에서 돌아가면서 맥주를 샀다. 함께 오아시스의 노래를 떼창 하고, 아바의 댄싱퀸에 맞춰 몸을 흔들다 보면 어느덧 바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고, 거리로 나오면 해가 떠 있을 때가 많았다. 결국 오늘도 밤을 새우고 말았다는 괴로운 기분에 멋쩍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다들 더 놀고 싶어 하는데 호스트로서 먼저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스트를 만나면 나는 늘 묘한 책임감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좋은 기억이었으면 하는 마음. 그게 일종의 애국심이었는지, 호스트로서의 의무감이었는지 뚜렷하게 분간이 되진 않는다. 내 트립에 신청해준 것이 고마웠고, 한국에 멋진 공간과 음악가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여행의 시간을 일부라도 책임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아끼는 일상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우리 산 낙지 먹으러 가면 안돼?”
소피(Sophie)는 밝은 미소를 띤 채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밤 12시쯤이었던가. 이제는 없어졌지만 자주 가던 경리단길의 단골 엘피바 골목 바이닐 앤 펍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술을 마신 뒤였다. 그래 내가 호스트인데, 내 트립에 온 게스트 친구들이 먹으러 가고 싶다면 데려가야지.
소피는 내 두 번째 에어비앤비 트립의 게스트였다. 그때의 게스트는 총 3명이었는데 한국에 온 목적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모두 '소주'를 특히 좋아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소피의 바람대로 엘피바에서 나와 근처의 실내 포차로 향했다. 소피와 다른 두 친구들은 처음 보는 산 낙지에 경악하면서도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맛있게 잘 먹었다.
소피는 40대인지 50대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밤늦게까지 놀 때도 지치거나 재미없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둘째 날 홍대 상상마당에서 라이브 공연을 볼 때도, 공연을 한 밴드와 사진을 찍고, 함께 삼겹살을 먹을 때도 모든 과정을 신기해하며 즐겼다. 소피는 소녀처럼 호기심이 많았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밝은 기운을 내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그녀는 한국에 콘퍼런스 참석차 출장 중이었다. 꽉 채워 놀았던 이틀이 지나고 소피는 헤어질 때 이렇게 얘기했다.
"재미로 가득한 이틀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혹시나 소노마 와인 컨트리(Sonoma Wine Country) 근처로 오거든 연락해줘. 소노마에는 나파 밸리와는 또 다른 매력의 와이너리들이 있거든. 오면 구경시켜줄게!” 그렇게 흘리듯 이야기한 말이 2년 뒤에 현실이 될 거라고 그때의 우리는 생각이나 했을까. 라이브 음악, 술, 그리고 웃음으로 가득했던 이틀간의 인연은 2년 뒤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이어졌다.
버닝맨의 10가지 원칙 중에는 '선물하기(Gifting)'가 있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때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생일이니까' 선물을 주고, '이번엔 내가 살 테니 다음엔 네가 사'라며 밥을 쏜다. 그런데 버닝맨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다시는 못 볼지라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한다. 요리를 해주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만들어온 액세서리를 주는가 하면, 좋아하는 문장들을 쪽지에 하나씩 적어 주는 사람도 있다. 바라는 것 없이 그냥 베푸는 게 좋아서 베푸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버닝맨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피를 다시 만나며 나는 '선물하기'의 감동을 제대로, 여러 번 느꼈다.
버닝맨에서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날은 근처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날, 우리 넷은 소노마 카운티에 위치한 소피네 집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첫날부터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제 출발한다는 내 문자를 보고, 소피는 이렇게 대답했다.
"태극기가 꽂힌 집을 찾아와!"
도착하자 소피의 집 앞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꽂혀있었다. 물어보니 우리가 찾아오기 쉽도록 아마존에서 태극기를 주문했단다. 아아 귀여운 사람. 한국에서 명절이면 집에 달아두는 태극기의 4배 정도 되는 거대한 태극기였다. 소피를 처음 만나는 조군, 가비 부부는 나와 핫산이 그랬듯 곧장 소피와 사랑에 빠졌다.
소피는 아예 휴가를 내고 우리에게 하루를 온전히 쏟았다. 2년 전, 에어비앤비 호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일상으로 그녀를 초대했다면, 이번에는 소피가 좋아하는 일상에 우리가 초대되었다. 소피의 남편 키이쓰(Keith)는 소노마 지역에서 와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리를 태울 벤과 운전해줄 사람까지 불러 와이너리 투어를 시켜줬다.
소노마 카운티는 나파 밸리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나파 밸리보다 넓고 와인의 종류도 다양하다. 나파 밸리는 화려한 느낌이 강한데 비해 소노마 카운티는 편안하고, 캐주얼한 느낌이 강하다. '컨트리' 분위기가 더 많이 나고, 가성비 좋은 와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스타일이 다른 와이너리 두 곳을 방문했다. 와이너리 투어 비용은 우리가 내고 싶다고 소피를 설득했지만, 소피는 키이쓰가 관계자여서 투어가 무료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와인 전문가 부부의 안내에 따라 독특하고 실험적인 정신의 캘리포니아산 와인 여러 잔을 연달아 마셨다. 와이너리의 멋진 광경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이렇게 좋아도 되나.'를 반복하면서.
와이너리 투어를 마친 뒤에는 근처에서는 큰 마을이지만 인구 1만 명의 작은 도시인 힐즈버그(Healdsburg)로 향했다. 우리에게 대접하기 위해 소피와 키이쓰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은 것이다. 예약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레스토랑 옆에 '레빈 앤 컴퍼니(Levin & Company)'라는 오래된 동네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다. 엘피도 있고, 책방 직원들이 책마다 메모지에 추천 사유를 적어둔 게 보였다. 대도시에 있었어도 찾아갔을 만한 매력적인 책방이었다. 소피와 키이쓰를 만나고 관상을 진지하게 믿게 됐다. 얼굴에 '나 선한 사람이에요' 쓰여 있는 두 사람은 웃을 때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힐즈버그는 눈이 맑고 순수한 두 사람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우리는 '초크보드(Chalkboard)'라는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마다 키이쓰가 어울리는 와인을 페어링 했다. 전문가의 마리아주란 이런 것일까. 환상적인 음식과 와인의 궁합에 한입 넘기고 마실 때마다 행복해진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너무 행복할 때면 거의 울상이 된다. 너무 귀여운 동물을 볼 때,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너무 감동적인 공연을 볼 때. 이때도 딱 그랬다. 행복에 비례하는 만큼 소피와 키이쓰에게 미안할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커져갔다.
사실상 두 번째 보는 나와 핫산, 처음 보는 조군, 가비 부부를 하룻밤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제대로 손님 대접하고 베푸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나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낯선 사람에게 이들처럼 선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퍼줄 수 있을까?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 인색해지지 말자고, 더 능력 있고 많이 베푸는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고 조용히 스스로 다짐한 밤이었다. 소피를 처음 만난 날 나와 핫산이 베풀었던 산 낙지와 소주는 2년 뒤 몇 배로 거대한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소피의 아들과 딸은 모두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 우리는 그들의 방에서 묵었다. 자기 전에 우리 넷은 작전을 짰다. 핫산이 아이디어를 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받아버렸다. 내일 아침은 우리가 한국 요리를 해주자! 보광동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조군, 가비 부부가 있어 든든했다. 검색해보니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아시안 마트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의 작전이 성공하길 바라며, 말도 안 되는 하루였다고 우리끼리 여러 번 되새기고는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핫산과 조군은 마트에서 재료를 구해왔다. 햇반을 준비하고 두부와 두루치기를 만들었다. 소피와 키이쓰가 아니었다면 없었을 하루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소피와 키이쓰는 우리가 준비한 아침을 맛있게 먹어줬고, 키이쓰는 먼저 일터로 향했다.
소피는 뒷마당에서 양 몇 마리와 라마를 키우고 있었다. 라마가 있으면 양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늑대가 라마의 뒷발질을 무서워해서 라마가 있으면 잘 안 온다는 것이다. 아침을 다 먹은 우리는 소피와 함께 뒷마당으로 나가 라마와 양들에게도 아침을 줬다. 웃음이 나왔다. 소노마 카운티에 사는 소피네 뒷마당에서 양들에게 풀을 먹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소피의 일상에 초대된 우리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시간들을 선물 받았다.
마당 옆에는 정원도 있었다. 그곳에서 소피는 술에 곁들이기 최적인 과일과 야채를 키우고 있었다. 소피는 잔뜩 자란 민트를 가리키며 "이 민트는 나의 모히또를 위한 거야"라고 말했고, 처음 보는 레몬을 따와서는 "이 레몬은 색이 특이하지? 이 술에 넣으면 맛있어"하고 설명했다. 술에 빗대어 각 야채를 키우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 귀여운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소피는 정원에서 무농약으로 키운 과일과 야채를 잔뜩 따주고는 출근하기 위해 먼저 집을 나섰다. 집주인 둘이 먼저 집을 떠난 것이다. 소피는 우리에게 천천히 씻고 떠날 때 문은 열어두고 가면 된다고. 이곳은 그만큼 안전한 마을이라고 했다. 우리는 고맙고 아쉬운 마음을 듬뿍 담아 소피 이름을 계속 부르며 그녀를 꼭 안아줬다. 제발 꼭 한국에 와달라고. 우리에게도 베풀 기회를 달라고 이야기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초기에 에어비앤비를 쓸 때는 여행지에 맞춰 좋은 숙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중에는 가보고 싶은 에어비앤비가 곧 여행지가 되었다. 소피의 집에서 나왔을 때도 그랬다. 소피의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반경 내로 가장 마음에 드는 에어비앤비를 찾았고, 그 숙소가 우리의 목적지가 되었다. 하늘을 향해 길쭉하게 뻗어있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나무로 지어진 2층짜리 집이었다.
에어비앤비에 바비큐 그릴이 있다는 걸 확인한 조군은 스테이크 구울 생각을 했다. 셰프와 여행을 하면 이런 게 또 좋다. 우리의 행선지는 단순했다. 소피가 추천한 오이스터 바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싱싱한 굴로 점심을 해결했고, 그 후엔 마트에 들러 저녁 재료를 샀다. 합리적인 가격에 질 좋은 스테이크 고기를 사고, 전날 와이너리에서 배운 '진판델(Zinfandel)' 와인을 골랐다.
숲 속의 산장은 버닝맨처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인터넷이 터지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오롯이 현재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에어비앤비 한쪽 벽면에는 이 집의 규칙이 적혀 있었다 - 별을 세볼 것. 숲 속에서 산책을 할 것. 추억을 만들 것. 맑은 공기를 마실 것. 해 뜨는 것을 바라볼 것. 휴식하고, 긴장을 풀고, 새로워질 것.
그 아래에는 집주인이 1978년에 찍힌 사진 10개가 붙어있었다. 아마도 호스트의 어릴 적 사진인 것 같았다. 지금과 똑같이 생긴 집 앞에 7살쯤 돼 보이는 금발의 남자아이와 젊은 부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집과 나무들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많이 변했겠구나. 저 사진 속의 소년은 이 집에서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까. 그 사진들을 보는 순간 이곳은 그냥 산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집이 되었다.
가비 언니는 음악부터 틀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Shape of Water)'의 OST로 쓰인 르네 플레밍(Renee Fleming)의 'You'll never know'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음악이 흐르는 산장의 풍경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가비 언니는 한쪽 소파에 앉아 노트를 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실내 모닥불 앞의 가장 커다란 소파에 드러누워 전날 책방에서 사 온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핫산과 조군은 야외의 바비큐 그릴을 들여다보고, 집 앞 잔디밭에 있는 의자에 앉아 가볍게 맥주를 즐겼다.
숲 속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만끽하며 각자의 여유를 즐긴 뒤,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질 때쯤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집 바로 앞의 나무 테이블 위에 여우가 그려진 귀여운 접시를 세팅했다. 테이블을 둘러싼 길쭉한 나무들 사이로 노란 전구들이 켜져 있었고, 테이블 위의 초 두 개를 켜니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셰프인 조군이 요리실력을 발휘했다. 그릴 위에 구운 소피의 정원 야채와 딱 알맞게 익힌 파스타, 그리고 육즙이 살아있던 스테이크까지. 마트에서 사 온 와인과 함께 숲 속의 아름다운 산장 앞에서 우리만의 파티가 벌어졌다.
"스테이크 써는 느낌이 달라. 장난 아닐 것 같아. 어떡하지?"
"음! 음! 진짜 맛있어."
"아.. 우리 진짜 장난 아니다."
영화 같은 하루였다. 마침 비니를 쓰고 있어 숲 속의 난쟁이 요정처럼 보였던 조군을 요리 요정 진판델이라 부르며, 흥이 많은 우리 네 명은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깔깔거렸다. 버닝맨을 위해 미국에 왔던 일정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밤은 그렇게 유쾌하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완벽하게 흘려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날, 이른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기억이 난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동안 새벽 6시가 되어가며 한강을 배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울에 20년 넘게 살면서 한강을 배경으로 해가 뜨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름다웠다. 왜 정동진까지는 찾아가면서, 버닝맨까지 가서 일출을 보면서도 내가 사는 곳에서 해 뜨는 걸 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버닝맨의 사막을 배경으로 해 뜨는 걸 바라볼 때와 비슷한 감동을 느꼈다. 넓게 들어오는 시야 안에 노을처럼 그라데이션이 지지만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 컴컴하고 푸르스름한 색에서 점점 가지각색을 띠기 시작하는 풍경.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에너지를 받고, '오늘'이란 시간에 감사하며 새로워지는 기분.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날이란 걸 매일같이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여행은 나의 하루하루가 사실은 얼마나 특별한지 빛을 비춰주곤 한다. 평범해 보이는 것 같은 나의 일상도 누군가에겐 여행의 기억이 될 만큼 새롭다. 나의 일상은 소피에게 여행이었고, 소피의 일상은 나에게 여행이었다. 숲 속의 산장은 누군가에겐 집이었고, 나에게는 영화 같은 기억이었다. 저마다의 사소한 디테일로 이루어진 일상에는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다.
산 낙지, 엘피바, 소노마 와인,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거대한 나무들...
아무런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이미지들은 내 머릿속에서 한데 묶여 소중한 날들을 연상시킨다. 인생의 마법은 누군가의 일상을 유리 밖에서 관람하는 게 아니라, 잠시라도 그 일상의 일부로 녹아드는 순간, 어떤 장면이나 사람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일어났다. 스쳐가는 줄 알았던 인연이 다시 이어지거나, 낯선 곳에 집처럼 포근한 환대를 받을 때, 지구는 더 친근하고 작게 느껴졌다. 결국 우린 다 같은 배를 탄 거라고. 알고 보면 세상에 좋은 사람도 참 많다고 나의 반짝이는 기억들은 말하고 있다.
아날로그 한 취향을 가진 마케터.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세계와 세계 곳곳을 유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뭔가에 푹 빠져있는 사람들, 편견을 부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긴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1년간 인생의 쉼표를 찍은 뒤, 독립출판물에 이어 정식 출판된 『퇴사는 여행』을 냈다. 현재 음악 스타트업 스페이스오디티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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