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하듯 느리게 살며 여행하기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대개는 도미토리에서 머물렀지만 여행 중 나는 한 번씩 집순이로 돌아가는 휴식기간이 필요했고, 그럴 때마다 에어비앤비를 찾았다. 집순이가 되려면 ‘숙소’가 아닌 ‘집’이 필요했고, 혼자인 것보다는 현지인과 같이 지내는 것이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찾아간 곳은 전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찾은 건 아니었고, 조건에 맞춰 필터링을 했을 때 한 두 번 정도 스크롤을 내려서 집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 클릭하면 반려동물 사진이 꼭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렇게 만난 호스트와 호스트의 개, 혹은 고양이와 함께 지냈다. 쿠바(Cuba)와 칠레(Chile) 그리고 아르헨티나(Argentina)에서 적게는 일주일, 많게는 보름을.
코코(Coco)는 쿠바 아바나(La Habana)에서 만났다. 코코는 항상 야넬라(Yanela)의 아들인 알레한드로(Alejandro)와 놀며 뛰어다녔다. 붙임성이 너무 좋아서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깡충깡충 달려들거나 하면 야넬라가 단호한 스페인어 억양으로 “꼬오 꼬!” 하고 문으로 들어가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 군말 없이 쪼르르 열려있는 문으로 달려들어가 까만 눈동자로 우리 쪽을 계속 쳐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와 야넬라는 눈을 마주치고 깔깔 웃었다. 나의 3개월 남미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쿠바 아바나였기 때문에 스페인어가 많이 어색한 상태였고, 야넬라는 스페인어로만 말했다. 하지만 코코 때문에 같이 웃다 보면 말이 안 통한다는 불편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냥 한 식구 같았다.
몇 날 며칠을 신나게 놀고먹다 보니 어느새 감기에 걸려있었다. 아바나를 떠나기 삼 일 전이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더니, 뙤약볕이 내리쬐는 쿠바에서 독감에 걸리다니. 한국에서 몇 알 챙겨 왔던 감기약이 금세 바닥났지만 약을 사러 나갈 힘도 없어서 그냥 내내 잠만 잤다. 결국 끼니를 놓치고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눈을 떴다. 밥을 안 먹어서 배는 고픈데, 밤늦게 혼자 아바나 거리로 나가기엔 조금 무서웠다. 배낭에서 여행용 인스턴트 육개장을 끄집어냈다. 이걸 벌써 먹을 줄은 몰랐네. 손바닥만 한 봉지를 달랑 들고 문밖을 나섰다. 마침 야넬라네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고 부엌을 치우고 있었다.
“깔리엔떼, 아구아(Caliente, Agua..)” 나는 코가 꽉 막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뜨거운 물을 좀 쓸 수 있겠냐는 질문을 단 두 단어로 대신했다. 야넬라는 내가 방에 계속 있었다는 것도 몰랐는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뜨거운 물로 뭘 할 거냐고 묻는 것 같길래 봉지를 들어 보였다. 물을 부어서 후루룩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이해를 한 야넬라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내가 밥 대신에 이걸로 떼우려는 걸 알아챘는지 빵을 몇 개 꺼내 손에 쥐어줬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다시 빵을 뺏어다가 치즈 몇 장을 끼워서 그릴기에 뚝딱 구워 접시에 올려줬다. 동시에 주전자에서 '삐이-' 하며 물이 끓었고, 육개장을 말아다가 빵 접시 옆에 뒀다. 야넬라는 오렌지 주스까지 컵에 따라서 식탁에 올려주고는 방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저녁 한 끼가 완성됐다.
보통 쿠바 까사에서는 끼니를 제공하면 돈을 받기 때문에, 얼마를 줘야 하지 우물쭈물했다. '조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주는 게 5쿡인데... 이건 2쿡정도면 되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따뜻한 빵과 육개장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물론 야넬라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 어떤 밥보다 맛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야넬라가 때마침 나와 내게 알약 몇 개를 줬다. 코를 가리키며 준 약이라 콧물을 멈추게 하는 약인 걸로 이해하고 먹었다. 그날 밤은 모처럼 뻥 뚫린 코로 편하게 숨을 쉬며 잠들었다.
야넬라가 준 약 덕분에 다음날엔 꽤나 기운이 났다. 코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한 인간을 움직이는데 큰 영향을 주는 것인 줄은 몰랐다. 덕분에 마지막 날까지 미뤄뒀던 ‘그래픽 실험실(Taller Experimental Grafico)'에 갈 수 있었다. 아바나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그림 작업을 하는 곳이다. 대성당 광장의 구석, 가열하게 영업하는 식당들에 가려져 유심히 보지 않으면 쉬이 지나칠만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깥쪽 갤러리는 항시 열려있지만, 안쪽 작업공간은 여는 때가 많지 않다고 해서 긴장했다. 마침 내가 간 날에는 운이 좋았는지 작업실까지 오픈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공간을 돌아보며 쿠바노들의 따끈따끈한 날것의 작업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작업에 방해될 것 같아 사진 촬영은 하지 못했지만 한 장 한 장, 눈에 담으며 감탄을 하기도 자극을 받기도 했다. 내 콧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이런 귀한 장면도 못 보고 떠났겠지.
내가 아바나를 떠나기 직전까지 야넬라의 가족들은 매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내 상태를 체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딱히 그들이 내게 대단한 치료를 해준건 아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고마웠다. 중간에 비냘레스를 다녀온 며칠을 제외하면 열흘간 여기서 지내며 완전히 이 가족들과 한 식구가 되어있었다. 아바나를 떠나는 날, 까사 식구들 한 명 한 명과 포옹을 하며 “아디오스(Adios)”라고 인사하는 것이 많이 슬펐다. ‘아디오스'는 ‘챠오(Ciao)'보다는 더 오랜 작별의 인사라서. 알레한드로가 코코 옆에서 내가 그려준 그림을 손에 꼭 쥐고 “아디오스!”하며 손을 흔들 때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나는 그렇게 쿠바에 새로 생긴 가족들과 아쉬운 안녕을 하고 남미 대륙으로 날아갔다.
제로(Zero)와 만난 것은 칠레의 발파라이소(Valparaiso)에서였다.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에서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 발파라이소. 마을 전체가 언덕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버스터미널과 광장, 큰 상권은 언덕 아래 항구 근처에 형성되어 있고 주거지역은 거의 대부분 언덕 위에 밀집되어 있다. 내가 지냈던 에어비앤비 숙소도 물론 언덕 위에 있었다. 집을 게스트가 혼자 찾기엔 좀 외진 곳에 있어서 터미널까지 곤잘로(Gonzalo)가 마중을 나왔다.
곤잘로는 호스트인 마리아(Maria)의 남자 친구였고, 그들은 동거 중인 커플이었다. 우리는 조금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터미널을 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특이하게 발파라이소 택시는 쿠바처럼 콜랙티보 택시였다. 여러 명과 합승을 하고, 택시 기사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중간중간 승객을 태우고 떨구기를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요금은 어딜 가든 같은 금액이었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도 거침없이 올라 커브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폭주기관차 같은 택시는 금방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탁 트인 동네 전경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높은 지대에 지어진 집이 곤잘로의 집이었다. 철계단을 오르는데 곤잘로가 “제로!” 하고 부르니 흰 개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고개를 쏙 하고 내민다. 네가 제로구나! 제로는 나를 보고 짖지도 않고 겅중겅중 반가워하며 달려들었다. 인간에게 이렇게 친한 척을 하지 않는 고양이들하고만 지내봐서 그런지, 나는 개들의 이런 격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른다. 어쨌든 그냥 같이 겅중겅중 뛰었다.
연신 뛰어오르는 제로의 뒤로는 동화 같은 집의 정원이 있었다. 집 자체는 단층인 단독주택이었지만 지대가 높아서 정원이 꼭 옥상 같기도 했다. 아까보다도 더 동네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심은 화분과, 정성스럽게 가꾸지 않아도 쑥쑥 잘 자란 나무들이 어지러운 듯 조화롭게 그 자리에 어울려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며 곤잘로가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이라고 읊조렸는데 말 그대로였다. 세상에 이런 '홈 스위트 홈'이 또 어디 있을까. 세월이 켜켜이 쌓이고, 손때가 묻어있는 가구와 소품들이 집안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인테리어가 아닌 진짜 사람 냄새나는 집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늑하고 예쁜 곳. 옛날 동화 속 할머니가 꽃무늬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본격 집순이의 생활이 시작됐다. 발파라이소에는 총 일주일간 머물 생각이었고, 나는 식비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 외식을 하지 않았다. 주로 산티아고 한인마트에서 사 온 라면이나 현지 슈퍼에서 산 쌀과 계란, 소시지 등을 요리해서 끼니를 때웠다. 내가 집 밖을 외출하는 순간은 주로 광장에 핸드메이드 마켓이 열렸을 때나, 카페에 가고 싶을 때, 편집샵에 들를 때, 동네 벽화들을 보고 싶을 때 정도였다.
발파라이소는 도시 전체가 그라피티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밖에 나가 언덕의 아무 계단에 털썩 앉아있기만 해도 눈에 닿는 모든 벽이 그림이었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보는 바다는 또 얼마나 예술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출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집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굳이 밖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호스트가 외출한 사이 나와 놀아줄 제로도 있지 않은가.
주말이 되자 마리아가 발파라이소에 돌아왔다. 내가 잠시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집의 철문 여는 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탓에 열쇠가 돌아가질 않아 낑낑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에어비앤비 어플로 호스트와의 채팅창에 SOS를 보냈다. 몇 초 후 대답 대신에 안쪽에서 ‘철컹'하고 문이 열렸는데 마리아가 서있었다. 깜짝 놀란 내 얼굴을 보며 호탕하게 웃는 마리아와 볼을 마주치는 인사를 한 뒤 우리는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집순이 게스트 때문에 잠시 역할이 바뀐 날도 있었다. 호스트들은 주말에 소풍을 나가고 게스트가 집을 지키면서 잠옷 차림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주말 소풍은 제로도 함께하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아 담벼락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롱아롱 해가 비치는 거실 탁자에 앉아서 밀린 일기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렸다. 앞으로 이동해야 할 루트를 짜기도 했다. 결제만 남겨두었던 버스나 비행기표들을 하나씩 예매하고 커피를 내려 마셨다. 정원에 나가 나무 밑 의자에 앉아서 콧노래를 불렀다. 호스트가 집에 있어도 똑같이 했던 일상을 반복한 것 뿐이었지만 온전히 혼자인 시간 속에서는 더 평온했다. 아, 이 집이 내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먼 훗날에는 이런 집에 살고 있으면 좋겠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렸다. 마리아는 일 때문에 다시 산티아고로 떠난 후였다. 발파라이소를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서 내 기분은 조금 울적한 상태가 되었다. 전 날부터 쓸쓸한 기분이 들어 제로의 맑은 눈과 마주치면 벌써부터 눈물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아 이게 웬 청승이람. 떠날 때 대성통곡하면 너무 창피한데.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지. 나는 떠나는 날 곤잘로와 제로 앞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줄 거라고는 그림과 어설픈 스페인어 편지뿐이라서, 그걸 손에 겹쳐 들고는 곤잘로에게 다가가 내밀었던 순간부터 울먹이기 시작했다. 사려 깊은 곤잘로는 두 종이를 번갈아 보며 ‘오오'라고 외치며 가슴에 손을 얹고 너무 감동받았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내 눈물샘은 그 모습에 빵 하고 터져버렸다. 속도 모르고 제로는 옆에서 자꾸 놀아달라고 나를 툭툭 치고 있었다. 그런 제로 때문에 더 많이 울었다.
택시를 타고 집을 떠나면서 멀어지는 곤잘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콜랙티보 택시 안에는 이미 나 말고도 동네 사람들이 몇 더 타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떨리는 아래턱을 보이는 게 창피해서 자꾸만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러다 떠올랐다. 내 모자를 방문에 걸어두고 그냥 나왔다는 걸. 아차, 싶었지만 그냥 그것도 선물로 남겨둔 셈 치자 하며 제로가 그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제야 입술의 떨림이 멈추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는 보름 동안 고양이 라파(Rafa)와 키키(Kiki)의 집사로 살았다. 호스트 룰리(Luli)는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딱 우리 또래 취향으로 심플하고 모던하게 꾸며진 집에서 고양이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룰리는 프리랜서였고, 역시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침에는 룰리가 일을 했고, 저녁에는 내가 일을 했다. ‘일'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지만, 여행일기를 그리거나 쓰는 작업이었다. 일부러 시간을 정하고 교대로 거실을 쓴 건 아니었는데 생활패턴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여기를 거치고 나면 난 이제 이과수 폭포(Iguazu Falls)를 거쳐 브라질(Brazil) 리우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로 건너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래서였는지 머물 수 있는 한 최대의 날짜로 한 곳에서 오래 있고 싶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오기 전에는 파타고니아(Patagonia)를 거쳐왔기 때문에, 고된 트레킹과 추위에 심신이 좀 지쳐있었다.
라파와 키키는 그런 나를 생각보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온데간데없이 숨어버릴 줄 알았지만 내가 고양이 집사인걸 알았는지 몇 분만에 옆으로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어느새 내 침대를 점령한 라파와 매일 같이 잠에 들었다. 키키는 막상 다가가면 도망가버리는 겁쟁이였는데, 그래서 일부러 무관심한 척하면 자꾸만 내 방에 나타나 점프를 하고 다녔다. 어느 날은 방에 벌레가 들어왔는데 두 고양이가 벌레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통에 나는 침대에서 쫓겨나 고양이들의 성이 찰 때까지 사냥하도록 기다려줘야만 했다.
룰리는 아르헨티나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부심도 대단했다. 나에게 매일같이 가보면 좋을 곳이나, 맛있는 식당 같은 곳을 요목조목 알려줬다. 꼭 갈 필요는 없고, 가고 싶으면 가라- 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했다. 룰리 덕에 나는 가이드북 없이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이곳저곳을 헤매지 않고 잘 누비고 다녔다.
평화로운 나날 사이,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딘가에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우버를 불러 보조석에 앉아 기사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퇴근길 러시아워에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기사는 갑자기 나에게 뜻 모를 스페인어와 바디랭귀지를 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희롱이었다. 당시 일을 회상해보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무려 ‘바디랭귀지'로 성희롱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버 기사는 나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간단한 스페인어 단어 몇 가지는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고, 아주 정성스럽게 성희롱 발언을 했다. 내가 알아들을 법한 단어들을 나열하며 손가락과 손바닥, 주먹 등을 이용하여 쿵쿵 찧는 시늉을 하는 등 누가 보아도 성적 수치심을 받을 내용의 바디랭귀지를 시연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적당히 웃으며 넘어갔지만 기사는 집요하게 계속해서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이 내용을 전달하려 용을 썼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엔 ‘나’ ‘너’ ‘원한다', 키스와 포옹하는 시늉, 손바닥을 주먹으로 쿵쿵 찧은 후, ‘지불'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나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NO ENTIENDO! NO ESPANÕL! (나 스페인어 모른다고!)”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헤실헤실 웃으며 운전을 계속했다.
피가 쭉 내려가며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순간 룰리가 떠올랐다. 나는 룰리에게 왓츠앱을 통해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며 번호를 알려준 상태였다. 현재 나의 상황을 알렸고 너무 무섭다고 했다. 룰리는 놀란 와중에 자신에게 현 위치 실시간 공유를 하라며 왓츠앱의 기능을 침착하게 알려줬다. 혹시 기사가 더 몹쓸 짓을 하려 한다면 차에서 내려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차에서 내가 내리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문자를 하는 것을 눈치챈 기사는 갑자기 입을 닫고 조용해졌다.
다행히 우버 앱에 표시된 루트대로 운행을 했고, 집 앞에 차가 도착했을 때 룰리가 나와있었다. 나는 차가 정차하자마자 빠르게 뛰어내렸고 차 문을 닫지 않은 채로 룰리는 운전석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내용을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내 귀에 들린 단어들로 추측하기로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여성 여행자에게 어떻게 그런 성희롱을 할 수가 있느냐" "얘가 얼마나 너 때문에 무서웠겠냐" "네가 우리 아르헨티나와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라고 하는 듯했다. 우버 기사는 펄쩍 뛰지도 않고 그 얘기를 다 들으며 ‘그런 거 아닌데 쩝쩝' 같은 얼굴을 했다. 아주 심드렁했다. 마지막으로 룰리는 너를 우버 측에 신고하겠다 라고 말한 뒤 차 문을 쾅하고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버는 줄행랑을 쳤고 그 꽁무니를 향해 룰리는 욕을 퍼부으며 차 번호판의 사진을 찍었다. 오! 나의 영웅, 룰리!
룰리는 내 어깨를 감싸고 빠르게 집에 들어갔다. 나를 거실 의자에 앉히고는 ‘염병할, 여자들은 꼭 이런 일을 어디서나 겪어야 하는 게 너무 화가 나'라고 영어로 말 한 뒤 따뜻한 차를 가져올 테니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멈췄고, 머리도 다시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키키와 라파는 식탁에 올라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봤다. 이 전까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묘하게 활동시간이 겹치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고, 게스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룰리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그날만큼 서로 많이 웃고 떠든 적이 없었다.
내가 룰리 없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더 무섭고 비참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현지인 호스트가 욕이라도 시원하게 퍼부어줬으니 망정이지, 오롯이 혼자 그 상황을 겪었다면 아마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나에게 있어 최악의 도시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룰리는 욕을 퍼붓는데 그치지 않고 바로 우버 아르헨티나의 공식 트위터에 항의 글을 남기며 공론화했다. 나 또한 우버 고객센터에 이 불쾌했던 정황들을 전달했고, 우버 측에게서 사과와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 기사를 퇴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얘기를 접한 한 아르헨티나 여성이 트위터를 통해 나에게 ‘너무 부끄럽다.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겠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알려줘라'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그 날 이후로 남미 여행이 끝날 때까지 선뜻 우버를 이용하지 못했다. 딱 하루를 제외하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던 날, 룰리는 내게 우버를 부르라고 했다. 차가 도착했을 때 룰리는 운전자에게 어떤 당부의 말을 해줬다. 여행자인 내 친구를 공항까지 잘 데려다 달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버 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는 답을 했고, 나는 룰리와 긴 포옹을 한 후 차에 탔다. 안전하고 친절하게 공항까지 날 데려다준 기사는 여행을 잘 하라며 묵직한 캐리어까지 손수 내려준 후 떠났다. 공항에 들어섬과 동시에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룰리가 SNS에 내 아이디를 태그 했다는 게시물의 알림이었다. 열어보니 내가 선물한 그림에 핑크색 하트가 번쩍번쩍거리는 이모티콘이 달려있다.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빨간 하트를 남기고 발을 옮겼다.
허안나. 만화가와 작가 사이에서 어물쩡거리고 있는 만화작가. 대학생 때 멋모르고 시작한 웹툰 ‘인생은꿈맛'으로 무보수 만화가 생활을 하던 중 일본에 건너가 1년간 자취를 해보고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엮은 ‘도쿄는꿈맛'을 출판하고는 돈 때문에 작가 생활을 그만두고 직장인이 되었다. 최근에 학자금을 다 갚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사한 후 3개월간 남미 여행을 다녀왔다. 현재는 이런저런 그림일을 하며 먹고사는 중이다.
- 인스타그램 : @annahuh
- 트위터 : @annada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