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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Sep 20. 2019

에든버러, 그 향기에 잠겨 죽어도 좋다

스카치위스키, 예술의 흔적 그리고 낭만에 취했을 때

언젠가부터 친한 친구들은 내게 무얼 하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열에 아홉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한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차나 커피를 마신다. 휴학 후 홀로 나선 여행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유가 생기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고, 예쁜 카페를 발견하면 앉아서 책을 읽었다. 시장에서 커피를 마시다 친해진 이방인이 자기 집에서 차를 한 잔 하겠냐 물었고, 그 물음에 응하고 싶어 관광지 투어 일정 정도는 가벼이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의 집에서 차는 와인으로 변했고, 그와 그의 배우자가 방문했다던 90년대 한국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외국에서 외국인에게 내가 태어나기 전의 모국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기묘했고, 그래서 좋았다.

▲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본 목가의 풍경.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는 기차로 3시간보다 조금 덜 걸린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여행 기간 중 2주가량의 시간을 영국에서, 그중 일부는 에든버러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하는 밴드인 퀸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고, 엄청나게 빠져들었던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발자취를 쫓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해리 포터,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 태어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 도시의 정취를 온전히 느끼기 위하여 늘 선택하던 저렴한 호스텔이나 한인 민박이 아닌 에어비앤비를 큰맘 먹고 예약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백 번 옳은 선택이었다.


정해진 예산이지만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몇 가지 기준을 세워두었다. 우선 슈퍼호스트일 것.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는 예약 횟수, 메시지 응답률 그리고 평점으로 정해지며 하나라도 조건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슈퍼호스트 인증 마크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슈퍼호스트의 집을 선택한다면, 실패 확률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렇게 추려낸 숙소들의 최근 후기들을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듯, 방 컨디션이나 호스트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누적 평점은 좋지만 최근 평점이 나쁜 숙소의 경우 체크인 후 애로사항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에는 호스트가 무단으로 예약을 취소한 사항도 보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봉변을 당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마지막으로는 기재된 욕실 컨디션과 욕실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여행지에서의 행복도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특히 날이 덥거나 추울 때라면) 쾌적하고 따뜻한 환경에서의 샤워라는 것을 몇 차례의 여행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으니 기차역에서 거리가 좀 먼 것쯤은 괜찮았고, 방이 아주 넓지 않은 것도 괜찮았다. 이렇게 챙길 것은 챙기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자 예산에도, 취향에도 맞는 방은 딱 하나로 좁혀졌다.



“Would you like a cup of tea?”


예쁘고 오래된 유럽의 건물들이 으레 그렇듯 숙소에는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나의 숙소는 5층이었다. 20kg가 넘는 캐리어를 도저히 혼자 들고 갈 자신이 없어 미리 도움을 청해 두고 숙소 앞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호스트인 크리스(Chris)는 수염이 멋진 백발의 노신사였고, 그와 함께 사는 스테파니(Stephanie)는 미소가 아름답고 온화한 분이었다. 힘을 합쳐 짐을 간신히 가지고 올라간 후 숨을 고르기도 전에 크리스는 내게 차를 권했다.


“차 한 잔 마실래?”


지독하게 영국적인 그 상냥함이 나를 그렇게 기쁘게 만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비스킷과 잼,

맛있는 홍차를 내어주며 원한다면 언제든 마시라고 보여 준 찬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차가 가득했다.

벌써 직감이 왔다. 아, 여기로 오기를 잘했다.

▲ 깔끔하고 좋은 냄새가 났던 주방. 분주히 차를 만드는 크리스의 팔이 함께 찍혔다.

숙소는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웠고, 내가 쓰는 방의 모든 시설과 창밖의 풍경도 완벽했으나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것은 거실의 벽난로였다. 실제로 작동하는 벽난로를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터지기 직전인 내 광대를 본 두 사람은 기꺼이 벽난로에 불을 피워 주고 거실에서 영화를 보게 해주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좋았고, 나무가 타 들어갈 때 수학여행 캠프파이어에서 맡았던 냄새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11월 초 스코틀랜드의 적당히 쌀쌀한 공기 속에서 불을 쬐며 TV로 영화를 보던 그 순간의 행복한 마음이 여전히 생생하다.

▲ 나를 그리도 들뜨게 했던 벽난로. 우측의 선반에는 다양한 영화들과 음반이 빼곡했다.

훈훈해진 몸으로, 추천받은 몇 군데의 장소 중 숙소와 가까운 곳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도보 5분 거리의 공원과 그보다 5분 더 걸리는 중고 서점을 방문했다. 아기자기한 서점에서는 손때 묻은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10파운드도 채 안 되는 가격으로 책 두 권을 사고 공원에 가 풀밭에 앉았다. 맑고 예쁜 하늘과 강아지들이 보였다. 홀린 것처럼 기차표를 미루고 크리스에게 내 뒤에 연이어 올 게스트가 있는지 물어봤다. 3일간 머무를 계획이었던 에든버러에 그 두 배인 6일 동안 머무르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  내부를 촬영해도 되냐 묻자 상관은 없지만 엉망이라서 미안하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다이애건 앨리와 녹턴 앨리가 혹시 익숙한가요?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와 함께 트립도 예약했다. 무려 ‘해리 포터 투어’라는 이름이 붙은 투어가 있었다. J.K. 롤링이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 카페인 엘리펀트 하우스(The Elephant House), 다이애건 앨리와 녹턴 앨리의 배경이 된 골목길 빅토리아 스트리트(Victoria Street), 롤링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 영감을 받았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Greyfriars Kirk) 등을 돌아보았다.

▲ 왼쪽은 다이애건 앨리, 오른쪽은 녹턴 앨리의 모티브가 된 길. 두 길 모두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위치해있다.

다이애건 앨리와 녹턴 앨리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골목길의 이름들로, 다이애건 앨리는 비교적 밝은 시내이며 녹턴 앨리는 어두운 뒷골목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주인공들이 없음에도 길의 구석구석에 사랑했던 캐릭터들의 정취가 배어 있었고, 심지어는 알아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것이 흥미로웠으며 가이드는 쾌활했고, 결정적으로 날씨가 좋았다. 우리의 투어 가이드는 강한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날씨이지 않나요? 녹턴 앨리의 배경이 된 이 길은 보통은 이렇지 않아요! 평소에는 굉장히, 음, 녹턴 앨리다운 모습이랍니다!”


‘녹턴 앨리답다’라는 말을 그곳에 모인 열댓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두 알아듣고 모두 함께 웃고 있다는 것이 내심 기뻤다. 지구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영화 한 편을 통해 모여 같은 농담을 알아듣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마법처럼 느껴졌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테러 소식, 난민 문제 같은 어두운 부분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의 묘지는 해리 포터 외에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프랑켄슈타인 등의 작품을 쓴 작가들도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곳이다. J.K. 롤링은 내용 자체보다는 이름을 정할 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볼드모트의 본명인 톰 리들(Tom Riddle)부터, 맥고나걸 교수나 무디 교수 등의 이름을 곳곳의 묘비에서 볼 수 있었다. 이름 외에도 불의 잔의 마지막 부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그 묘지 또한 이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 묘지의 영향을 받았다.

▲ 리들(Riddle) 가문의 묘비. 아래의 꽃들은 관광객들이 놓고간 것이다. 

유명세 덕분인지 톰 리들과 맥고나걸의 묘비에는 꽃이 많이 놓여있었다. 과연 저들의 직계 가족은 이러한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할머니, 혹은 증조할머니의 이름이 한 작품 때문에 유명해져 익명의 여행자들이그들의 묘비에 꽃을 놓아주는 일. 어떤 이유에서든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망자를 축복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퍽 기뻤다.


마지막으로 해리 포터 관련 기념품 가게들을 돌아보고 공식 투어 일정은 끝이 났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한참을 걷느라 굳어진 몸을 녹이기 위해 커피나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덕질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어디에서 왔어요, 혼자 왔나요, 아이가 귀여워요 정도의 인사말로 어색하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가장 좋아하는 해리 포터 캐릭터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으로 끝을 맺었다.

▲  테마 파크가 아니라 기념품 상점의 인테리어가 이 정도 스케일이라니! 

독일에서 온 클라라(Clara)는 시리우스 블랙이 가장 좋다고 했고, 미국에서 온 꼬마 친구는 해그리드가 가장 좋아서 자기도 오두막집에 살고 싶다고 했다. 스네이프 교수를 가장 좋아하는 나와 그 꼬마 아이의 어머니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헤어졌다. 역사에 남을 명대사 “Always.”를 동시에 외치며 나와 함께 좋아했던 그 아주머니의 웃음은 아직도 소녀 같았다. 낯선 도시의 낯선 이들이 완결된 지 10년도 넘은 책 하나로 이토록 쉽게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 여행의, 예술의 마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80년 전통의 독립 영화관, 도미니온 시네마


“너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추천해 줄 곳이 있어!”


도착한 첫날 불을 쬐며 행복한 얼굴로 영화를 보던 내게 크리스가 말을 건넸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인이 운영하는 영화관이 있었다. 상영관은 단 4개이며, 모든 좌석은 푹신한 소파로 이루어져 있고 좌석마다 컵 홀더가 아닌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다고 했다. 스낵바에서는 평범한 팝콘이나 탄산 음료 외에도 맥주나 와인, 심지어 샴페인까지 판매한다고. 로컬들이 자주 가는 영화관이라서 마감 시간에는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장님이 관객들에게 직접 인사를 건넨다고 했다. 심지어 가격도 일반 영화관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했다.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 아쉽게도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우측의 화려한 문 앞에서 극장 주인이 인사를 해준다고 한다.

마침 그때의 에든버러에서는 한국에서도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막 개봉했을 때였다. 쉽게 감상에 빠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타고난 기질 탓에 ‘이건 운명이야!’ 같은 생각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관은 딱 기대했던 만큼 멋졌고, 고급스러운 소파 좌석은 몸을 거의 눕힐 수도 있었다. 상영 시작 후 1시간쯤 지났을 무렵부터 울기 시작했고, 그 푹신한 자리는 웅크리고 편안히 울기 좋았다.

▲ 광고가 나올 때 찍어둔 사진. 영화관에서 반쯤 누웠다는 것에 신이 나 발을 쭉 뻗고 사진을 찍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옆자리의 할머니께서 훌쩍이는 내게 휴지를 건네셨고, 잠깐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어디서 왔어? 너는 몇 살이니? 너도 퀸의 노래를 듣고 자랐니? 같은 질문이 그렇게도 정겨웠다. 인종 차별에 크게 시달리진 않았으나, 여행지에서 나를 향한 순수하고도 상냥한 호기심을 마주하는 것이 귀하고도 행복했다.


아름다운 로컬 독립 영화관이라니, 듣기만 해도 예술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가. 그곳에서 사랑하는 예술가의 영화를 봤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혹은 낭만에 취약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을 내어 방문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칼튼 힐(Carlton Hill), 어스름한 저녁 빛이 깔릴 때


여행을 하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기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두 번 이상 방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도시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비교적 작은 도시인 에든버러에 6일이나 머무른 덕에 좋아하는 장소를 여러 곳 만들 수 있었고, 그중 하나가 야경 명소로 알려진 칼튼 힐이었다.

▲ 해가 채 지기 전, 앉아서책을 읽기 좋았던 시간의칼튼 힐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방문했다. 4시경이면 해가 지기 시작했기에 부지런을 떨어가며 출근 도장을 찍었다. 노을이 질 때쯤부터 칼튼 힐에 올라가 벤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책을 읽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어둑한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면 저녁을 먹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밝을 때, 노을이 질 때, 어두울 때의 하늘을 모두 보고 싶은 욕심에 샌드위치를 사 들고 올라가 3시부터 네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칼튼 힐 위에 머무른 날도 있었다. 차가워진 공기에선 청량한 냄새가 났다.

▲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의 전경. 구름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모양새가 잘 보인다.

야경 명소이지만 해 질 녘의 조용하고 반짝이는 칼튼 힐을 가장 좋아했다. 지는 해가 섞어놓고 떠난 색채들 또한. 커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는 뜻을 모름에도 듣기가 좋았다. 사람이 유독 없을 때는 큰소리로 음악을 틀어두기도 했고, 책을 읽으며 맥주를 한 잔 마시기도 했으며, 한국어가 들리면 조심히 다가가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행을 하며 하릴없이 상념에 빠지는 사치를 부리기에 좋은 장소라서 더욱 사랑에 빠지기 쉬운 곳이다. 콧속이 시린데도 마음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음악, 그리고 술 한 잔, 나 홀로 여행자가 꿈꾸던 낭만


구글맵의 창시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방향으로 큰절을 몇 번 올리고 싶다. 길치에다가 장소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구글맵이 없었으면 여행은 애초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에든버러에는 직관적인 이름을 가진 장소들이 많았다. 물론 길은 구글맵이 다 찾아 주었으나, 지금까지 수많은 장소들의 이름이라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 멋졌던 연주, 공기, 분위기. 말 그대로 분위기에 취하여 이곳의 사진을 많이 남겨두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음악도 술도 그리고 낭만도 갖춘 재즈 바를 방문했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이름의 ‘The Jazz Bar’. 올드 타운의 중심지,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의 뒤쪽 골목에 위치해 있다. 왁자지껄한 느낌보다는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부러 이른 시간을 선택했고 낯선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술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딱 꼬집어서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입에 붙지 않는 이름과 맛이었다. 정체성이 모호한 칵테일의 맛은 이상했으나 연주는 훌륭했고 음악가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칵테일의 맛도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재방문 때 또 그 칵테일을 시켰다. 여행 기간을 연장했을 때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졌다.

 ▲ 인테리어도 멋졌던 The Whiskey Shop

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스코틀랜드 위스키 정도는 한 번씩 들어봤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유명하다. 해리 포터 속 골목길의 모티브가 되어 준 빅토리아 스트리트의 한 복판에 위스키 양조장인 ‘The Whiskey Shop’이 위치해 있다. 위스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해도 직원들은 취향을 물어가며 친절하게 추천해 주고, 원하는 만큼 시음도 할 수 있다.


다섯 종류 가량을 시음해봤고, 사실 조금 취기가 돌았다. 시음해 본 것들 중 가장 향긋하게 느껴진 것을 200ml씩 두 병 구매했다. 하나는 나를 위해, 하나는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위해. 글렌로시(Glenlossie) 10년 산.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가볍고 달콤한 것이 좋았다. 편지와 함께 위스키를 건넸을 때 그들이 보여준 환한 미소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향을 맡으면 기억이 생생해져 아끼고 아끼느라 여전히 이 작은 병을 다 비우지 못했다.

▲ 호스트에게 쓴 엽서. 숙소에서 30분 가량 떨어졌던 해변가 포토벨로 해변(Portobello Beach)의 작은 바에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썼다.

생의 색채, 속도감, 방향성, 그 무엇 하나 남을 신경 쓰지 않고 결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 모든 것을 오롯이 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큰 매력이었고, 그 덕분에 이 적요하고 소박한 소도시가 내게 주는 행복을 천천히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었다. 길다 하기에도, 짧다 하기에도 애매한 나의 인생과 여행은 적당히 행복했으며 고만고만하게 힘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여행자들은 유난히 무거운 날을 짊어질 때마다 사랑하는 도시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씩 잘라먹으며 살곤 한다. 자를 조각이 사라지기 전에 이 도시에 다시 와 있는 나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이상한 맛이 나는 칵테일을 마시며 음악을 듣고, 그곳의 향기에 젖어들었으면 한다.




에어비앤비 작가, 이지흔

생물학을 공부하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대학생 독립 영화 잡지 <엔딩 크레딧>의 에디터로 활동중입니다. 좋아합니다, 여행을 포함한 많은 것을. 글은 주로 읽으나 쓸 기회가 있으면 기꺼이 씁니다.

- 인스타그램: @rather_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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