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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Sep 26. 2019

보르도 농부의 루아르 와인 여행

노부부 호스트의 식탁에 둘러 앉아 나눠 마신 와인 네 병


보르도에서 앙제로, 그리고 뤽과 지주


“프랑스 도착하면 앙제(Angers)에서 하는 와인 행사는 꼭 참여해야 돼!” 


보르도(Bordeaux)로 가는 송별회 자리에서 한 소믈리에가 던져준 말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2017년에 나는 보르도 와이너리에서 일을 해보겠다며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와인 양조라 하면 화려해 보이지만 포도밭에서 일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기에 내게 붙여진 별명은 '보르도 농부'였다. 송별회에서 소믈리에는 1년에 한 번,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주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행사인 라 디브 부테이(La Dive Bouteille)에는 꼭 한번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프랑스에 도착하고 나니 고민이 앞섰다. 많지도 않은 퇴직금을 들고 워킹홀리데이로 온 나였다.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이 상황이 얼마까지 이어질지 몰랐기에 선뜻 여행길에 오를 수 없었다. 고민을 하다 ‘못 먹어도 고’라는 마음으로 앙제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 폭설로 정차 대기 중인 역사

앙제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악명 높은 SNCF(프랑스 국영 철도 공사)을 이날에서야 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린 탓에 열차는 연거푸 멈춰 섰고, 결국 리옹(Lyon)에서 파리(Paris)가 아닌 루아르(Loire)로 바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그 뒤로도 두어 번의 연착을 더 경험하고 예상보다 4시간이나 뒤에나 앙제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차 탓이라지만 약속시간을 세 번이나 바꿨고 역에서 만나기로 한 호스트가 그냥 가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몸과 마음은 이미 너무 지친 상황이었다. 


다행히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뤽(Luc)을 만났고 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파김치처럼 축 처진 몸이었지만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어딘지도 모르는 집으로 이동하는데 무섭지 않은 것은 용기가 있거나 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용기는 조금 있었지만 의심이 많은 나는 잔뜩 움츠린 채 고요 속에서 가고 있는 길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말이 없고 긴장한 모습을 보이니 분위기를 조금 풀어볼까 했는지 그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보니 와인 기자라고 남겨놨던데, 와인을 많이 좋아하는가?”

“아… 네 맞아요 저는 와인 기자고 며칠 동안 와인 행사가 있어서 취재 차 왔어요. 와인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곳 와인은 로제와 스파클링이 유명하대서 먹어보려고요"


그러자 뤽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는 레드 와인이 엄청 맛있다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같이 한번 먹어보지 않겠나? 좋아할 게야."


뤽 또한 와인을 매우 좋아해 와이너리도 여러 군데 다니며 좋아하는 와인은 와이너리로부터 직접 정기적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뤽이 건네준 몇 마디 말이 나를 안심시켜줬고 이내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물에 비해 비교적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흰색의 2층짜리 집이 나왔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뤽이 오기까지 기다렸다. 안쪽에서 제일 먼저 반갑게 맞이해줬던 건 요크셔테리어와 한쪽에 시크한 듯 앉아있는 뱅갈 고양이었다. 조금 뒤에 뤽이 들어왔고 딱 봐도 인심 좋은 시골 할머니 인상의 아내 지주(Gizou)를 소개해줬다. 그리고선 2층으로 나를 데려가 내가 5일간 묵을 방을 보여주었다.

▲ 뤽과 지주의 에어비엔비 개인실

“여긴 내 아들이 사용하던 방인데 이제 여기 살지 않아서 방을 에어비엔비로 내놓고 있다네. 여기 테이블도 있으니 간단한 작업을 하기엔 좋을 거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조금만 기다리게. 그리고 여기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으니 쓰면 되고. 옆방에는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쓰면 된다네.”


짐을 풀고서 간단히 씻고 바로 집을 나섰다. 여행의 첫 시작은 항상 로컬 와인샵 방문이었다. 사실 선호하는 와인은 샴페인(Champagne)이나 부르고뉴(Bourgogne), 보르도와 같은 와인들이다. 하지만 그런 와인들은 어디서나 사 마실 수 있지만 이렇게 로컬 와인샵을 가게 되면 그 지역만의 특색 있는 와인을 고를 수 있기에 어떤 지역을 가든 항상 가장 먼저 들리곤 한다. 8시면 대부분의 가게가 닫는 탓에 근처 와인샵을 갈 수밖에 없었다. 급히 나가는 나를 붙잡고 뤽은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 겐가?”

“아 저 지금 와인샵 가야 돼서 오면서 뭐 사 와서 먹을게요”


하고 집을 나섰다. 눈이 오던 날씨는 어느덧 비로 바뀌었고 보르도에서 사 온 앙증맞은 3단 우산으로 막기엔 역부족인 비바람을 뚫고 와인샵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 작은 마을에 놀러 온 동양인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점원을 마주했다. 나는 우선 어떤 와인이 있는지 보기 위해 둘러보겠노라 말해두고 찬찬히 가게를 살펴봤다. 앞쪽에는 루아르 지역의 와인들이 즐비했고 그 옆쪽으로 프랑스 다른 지역의 와인들이 보였다. 충분히 둘러본 뒤 추천을 부탁했다.


“여기 지역이 처음인데 추천해줄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추천해주세요”


참고로 이건 여행할 때 효용성이 매우 높은 스킬이다. 점원이 좋아하는 걸 추천받겠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뭔지 모를 사명감에 불타오르며 질 좋은 와인을 추천해줄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아닌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게 문제지만 대부분은 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 점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와인샵 점장이 추천해준 슈냉 블랑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 6가지

“자 당신이 있는 여기 지역에서 화이트 와인은 보통 슈냉 블랑(Chenin Blanc) 품종으로 만들고 레드 와인은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품종으로 만들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이라면 오늘 밤 이 두 와인은 꼭 마셔야 잠이 들 거예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들이거든요.”


그러면서 와인을 화이트와 레드 하나씩을 추천해줬다. 난 점장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이 앙제라는 마을이 마음에 들기도 해서 와인을 더 사기로 결정했다.


“음... 조금 더 사고 싶은데 레드랑 화이트 6개씩 추천해주면 그중에 제가 고를게요.”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신이 나 와인들을 순식간에 골라 계산대 위에 깔아놓기 시작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 각각 6종류씩 먹음직스러운 와인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모두 데려가고 싶었지만 화이트 와인 3병과 레드 와인 2병을 골라냈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고 오던 길에 봤던 케밥(Kebab) 집이 생각났다. 와인과 함께 먹을 요량으로 5유로짜리 케밥을 포장해 숙소로 돌아와 보니 지주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뤽만 남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냐는 질문에 포장해 온 케밥을 보여줬다. 샵에서 구매해 온 와인도 보여줬다.


"여기 근처에 있는 샵에서 사 온 와인이에요. 케밥이랑 같이 먹으려고요."라고 말했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집 밖으로 나섰다. 잠시 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 뤽의 손에는 와인 한 병이 들려있었다.

▲ 뤽이 마시라며 꺼내온 와인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야.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정말 좋아."라며 앙주 후즈(Anjou Rouge)라고 적혀있는 와인을, 한눈에 봐도 오래돼 보이는 오프너로 약간은 촌스러운 '퐁'소리를 내며 와인을 땄다.


“그럼 나도 오늘 사온 와인 한 병을 딸게요. 오프너 주시면 제가 딸게요."

“혼자 2병을 다 마시겠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걸?”

“네? 다 같이 마시려고 가져오신 거 아니에요?”

“이건 내가 주는 선물. 오늘 사온 와인은 다른 날에 같이 먹자꾸나."


그리고선 식사 맛있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쿨하게 돌아섰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게 프랑스 생활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말도 똑바로 할 수 없는 외국인에게 그리 살갑지 않았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제도는 내가 쉽게 정착하고 살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곳으로 와 만난 따뜻함이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 씻어내 주었다. 그렇게 따스함을 마시며 스르륵 잠이 들어 꿈도 꾸지 않은 채 달콤한 밤을 보냈다.




처음 사랑에 빠진 날


첫날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맞은 이튿날에는 꽤나 에너지가 넘쳤다. 행사까지는 이틀이 남아 오늘은 관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실로 내려오니 이른 아침부터 지주와 뤽은 이미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나는 수면바지를 입은 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식탁에 앉았고 지주가 아침으로 빵과 주스를 권했다. 그러더니 조금 뒤 바게트와 비스킷, 4종류의 잼과 버터, 그리고 오렌지와 사과 주스, 커피까지, 시골 할머니 인심이 가득한 한 상이 금세 차려졌다.

▲ 샤또 당제(Château d’Angers). 여느 유럽의 성과 다른 모습이지만 내부는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평소보다 더 많이 챙겨 먹고 난 뒤 숙소를 나섰다. 앙제는 꽤나 작은 마을이었다. 1시간을 넘게 걸으며 그저 그런 곳들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오늘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앙제 성(Château d'Angers; 샤또 당제)이었다. 이 성을 처음 본 인상은 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날이 채 다 풀리지 않아 조금은 어둑어둑했고 성벽을 잇는 둥근 탑들의 위쪽으로 칠해진 검은색은 악몽에 종종 등장하는 거대한 까마귀 같은 느낌을 줬다. 이 멀고 작은 도시까지 오는 관광객도 많지 않아 성은 더 황량해 보였다.


입장권을 산 뒤 들어가 보니 성 바깥과는 전혀 다른, 예쁜 내부 모습이 보였고 한순간에 앙제 성이 마음에 쏙 들게 되었다. 겉으로는 센척하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여린 사람의 내면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안쪽에는 잘 꾸며진 정원이 있었고 동화에 나올 법하게,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성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예배당이 있었다. 무엇보다 와인 쟁이인 내가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은 성곽을 따라 걷는 도중에 발견한 포도밭이었다. 겨울이라 포도가 열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포도를 재배하는 듯 깨끗하게 정비가 되어있었다.


이곳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샤또 당제(Château d'Angers)' 같은 이름의 와인이 있으면 꼭 사야지 하고 서둘러 기념품 샵으로 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성 내부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고 성곽을 따라 여유롭게 걸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보니 성곽을 따라 걸을 때 앙제 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 앙주 와인 협회 건물. 일반인도 무료 시음이 가능하며 저렴한 가격에 와인 구입도 가능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만족스러운 방문을 마치고 정문 앞으로 나왔는데 익숙한 글자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간판에는 이 지역 와인 협회를 의미하는 '메종 뒤 방 드 랑주(Maison du Vin de l'Anjou)'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난 문을 열어젖혔다.

▲ 협회에서 테이스팅 한 와인들. 가볍게(?) 6종류만 했다.

“안녕하세요. 바깥에 시음이 된다고 쓰여있는데 얼마인가요?”

"어서 오세요. 우린 와이너리들과 일을 하는 협회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는 시음은 무료예요. 뭘로 줄까요?"

“정말요? 일반인도 그냥 무료로 시음을 할 수 있다고요?”

“네 그럼요."

“아 그럼 어떤 식으로 시음이 진행되죠?”

“자, 여기 리스트에 있는 건 뭐든 할 수 있어요. 단, 1인당 9종류까지만 가능해요.”


아직 이 지역 와인들을 많이 먹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내가 잘 모르던 세부지역의 와인들을 주로 마셔봤는데 대부분 슈냉 블랑 포도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었다. 이곳에서 시음할 수 있는 와인들은 사실 그리 비싸지 않은 와인이었지만 열렬한 팬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거기다 시음해본 와인을 현장에서 저렴한 값에 판매하고 있어 와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첫날 와인을 많이 산 탓에 더 사지는 못하고 기념품 두어 가지만 집어 계산을 하고는 문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 뤽과 지주와 함께 한 음식들

이번 에어비엔비의 가장 큰 장점은 9유로를 추가로 내면 지주가 요리한 현지식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마다 뤽과 함께 셋이 가족처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제는 늦은 시간에 도착해 아쉽게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늘부터 보르도로 돌아가는 날까지 함께 저녁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사 온 와인을 먹자며 냉장고에 넣어둔 화이트 와인을 꺼냈지만 뤽은 어림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가로저어 보이며 이미 가져와서 심지어 따놓은 와인을 보여주며 얼른 앉으라 했다. 따뜻하게 고집불통인 노인네였다.


전채로는 호박 수프와 바게트 빵을 함께 먹었다. 사실 별다를 게 없는 음식이었다. 현지인이,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먹는 식사였다. 하지만 그들의 특별할 것 없는 ‘밥'을 함께 먹는다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금세 수프를 비워냈고 다음으로 고기가 잔뜩 들어간 오믈렛이 나왔다. 본식과 와인을 뱃속에 깔끔하게 넣은 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계가 남아있었다. 바로 치즈로 입과 위장을 준비시키고 디저트를 먹는 시간이다. 


오늘의 디저트는 오렌지 향의 리큐르(Liqueur)로 만든 케이크였다. 테이블로 가져오기도 전부터 주방을 가득 매운 오렌지 향에 취했다. 뭘로 만들었냐 물었더니 코앵트로(Cointreau)라는 병을 가져와 이 술을 넣어 만든 전통 디저트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무엇보다 이 리큐르가 너무 궁금해졌기에 거의 코를 병 안에 넣고 향을 맡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껄껄 웃던 뤽은 샷 잔 하나를 가져와 먹어보라며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오렌지 농축액을 맛보듯 진한 오렌지 맛에 이어 40%의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와 오랜만에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하하 이 친구 먹으랬더니 진짜 이 독한 걸 마시는구먼 그래, 맛이 어떤가?"

"알코올이 너무 세긴 한 데 오렌지 향이 너무 좋네요 한 잔만 더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그래 하지만 알코올이 40%나 되니 조심해야 해."


높은 알코올이 들어간 탓인지, 두 번째 밤을 함께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난 이들이 가족같이 느껴졌다. 식사 자리는 금세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동굴에서의 와인 테이스팅

▲ 동굴에서 진행된 내추럴 와인 시음회인 라 디브 부테이(La Dive Bouteille) 참가 와이너리 리스트

닷새째, 오늘은 옆 마을 소뮈르(Saumur)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미리 예약한 기차에 몸을 실었고 여전히 그치지 않는 비에 시간이 돼도 오지 않는 셔틀버스에 짜증이 조금 난 상태였다. 이내 차가 왔지만 그것은 버스라고 부르기 민망한, 7인승 밴이었다. 그 좁은 벤에 9명이 꾸역꾸역 탔고 차는 나를 싣지도 못한 채 떠났다. 애꿎은 허공에다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10분 뒤에 온 같은 사이즈의 다른 셔틀 차량을 타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미리 온 방문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그 행렬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행사는 독특하게 대규모 지하 셀러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10분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넓은 동굴에 300개가 넘는 와이너리들이 있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감도 안 잡혀서 무작정 동굴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독특한 문구가 쓰인 가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 지나가다 눈을 한눈에 사로잡은 파격적인 문구

‘Sex & Drug & Pinot Noir’ 그만큼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이 중독성이 있다는 표현인가 하며 백발의 멋있는 할아버지가 있던 그 부스부터 시작했다. 프랑스의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멋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와인 또한 그러했다. 등급은 받지 못했지만 그들은 와인을 더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탄생한 와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개성이 넘쳤고 훌륭했다.

▲ 동굴에서 진행되는 시음회라 분위기가 묘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동굴 안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오후가 되고는 쉽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꽉 찼다. 전 세계의 내추럴 와인 마니아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일반적인 시음회와는 조금 달랐던 것은 방문객들 또한 '내추럴'했다는 점이었다. 손이 미끄러져 잔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지나가다 부스 앞에서 기웃거리면 "이 친구가 당신네 와인이 마시고 싶나 봐 한 잔 줘"라며 손을 잡아끌곤 했다. 너무 많은 와이너리가 있었고 시간은 한정적이었던 탓에 샹파뉴, 부르고뉴, 루아르 등 몇 개 지역의 부스만 훑고 6시간이 훌쩍 지나 셔틀 시간에 맞춰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일요일인 탓에 기차 운행은 많지 않았고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출출했으나 근처에는 레스토랑은커녕 케밥 집도 없었다. 역사에 있는 작은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 허기를 달랬다. 2월의 소뮈르는 여전히 추웠고 하릴없이 열차만 기다리며 몸은 금세 지쳐갔다. 그렇게 영원 같았던 두 시간이 지났고 얼어붙은 몸을 일으켜 열차에 실었다. 뤽이 보르도에서 돌아오는 날이었고 내가 옆 마을에서 행사가 있다는 것을 듣고서는 흔쾌히 역까지 마중을 나와줬다. 앙제 역에서 다시 뤽의 그 온화한 미소를 봤을 때 내 집에 온 것과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숙소로 들어와 우린 또 한 번의 파티를 벌였다.




그리고 안녕, 오흐부아(Au revoir)


다음 날이 밝았고 이틀간 루아르 지역의 와인을 선보이는 ‘살롱 데 방 드 루아르(Salon des Vins de Loire)’라는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어제 피곤한 하루를 보냈지만 오늘 또 다른 행사를 한다는 기대감에 일찍 눈이 띄어졌다. 10분여를 달려 박람회장 정류장에 내린 뒤 등록해둔 마스터 클래스가 열리는 세미나실로 향했다. 해외에서 오는 참가자들은 어쩌라는 건지 모든 마스터 클래스가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역시 프랑스였다. 어설픈 불어 실력으로 어림짐작하며 그저 테이스팅에 의의를 두자 생각하며 클래스를 들었다. 

▲ 슈냉 블랑 품종으로 만든 와인 100가지를 한 번에 시음해볼 수 있었던 자리

첫 번째 세미나 주제는 불과 며칠 전에 사랑에 빠지게 된 슈냉 블랑 품종에 대한 이야기였다. 클래스가 끝나고는 옆에 따로 마련된 시음장에서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 100가지를 두고 테이스팅을 하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궁금증이 일어 바로 다음 마스터 클래스를 취소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기포가 있는 스파클링 와인부터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그 뒤로 달콤한 화이트 와인까지 다양한 와인들이 코와 혀를 자극했다. 마실수록 더 슈냉 블랑에 빠져들었고 테이스팅이 끝났을 땐 이대로 보르도로 돌아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때 난 앞으로 내 남은 프랑스 생활 중 내 테이블 위에는 항상 슈냉 블랑 와인이 올려져 있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와이너리 부스를 돌며 테이스팅을 했다. 수백 개 와이너리가 나와있어 어디서부터 마셔봐야 할지 몰라 결국 첫날 와인샵에서 점원이 추천해줬던 와인들 위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행사는 컸지만 와이너리들은 친절했고 와인들은 하나같이 다 좋았다. 10시에 시작해 5시에 끝나는, 7시간의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시음을 하느라 행사가 끝나면 금세 지쳐버리지만 하나같이 좋았던 와인 덕분에 사실 그 시간마저 붙잡고 더 남아있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던 길은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날 붙잡았다. 숙소로 돌아와 문을 열자 거실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뤽이 보였다.


“다녀왔어요.”

“무사히 왔구먼, 오늘 하루는 어땠는가?”

“아 오늘 너무 좋았어요. 당신이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전 화이트 와인과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좋았다니 다행이구먼! 올 때 눈이 엄청 내리던데 무사히 잘 왔네.”

“눈이 조금 내리긴 하더라고요."

“하! 조금이라니! 나도 원래 잠깐 옆 마을에 다녀왔어야 했는데 이 빌어먹을 눈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고!”

“아 눈이 많이 내렸었나 봐요. 전 하루 종일 행사장에만 있어서 몰랐어요.”

“이 동네가 눈이 참 안 내리는 곳이야. 그래서 오늘 같이 눈이 오면 아마 젊은 애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길가에 차 다 버리고 걸어 들어올 게다. 하하하."


곧 지주가 저녁 준비를 하러 들어왔고 나는 조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고 잠깐 쉴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내일은 다시 보르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꽤 오랜 기간 다른 지역에 나와 계속된 행사 일정을 소화하느라 약간은 피곤했지만 정감 많은 노부부와 마지막 저녁 자리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동안의 감사의 인사로 구입해 둔 와인 중 가장 비싼 와인을 따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뤽도 못 말리겠다는 듯 자리에 앉아 내 와인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호박 수프로 시작해 라자냐를 본식으로 먹고 내가 사 왔지만 못 먹고 있던 루아르 산 염소젖 치즈 4가지를 잘라 함께 먹었다.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지주도 와인 잔을 연거푸 비웠고 뤽이 또 레드 와인 1병을 가져와 순식간에 함께 비워냈다. 

▲ 함께 마신 화이트 와인과 보르도 친구들과 먹으라며 선물로 받은 스파클링 와인

식사가 끝나갈 때 뤽은 지주에게 슬쩍 눈치를 줬고 지주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지주의 손에는 스파클링 한 병이 들려있었고 뤽은 이별이 아쉬워 준비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보르도에서 이곳으로 오는 여행을 포기할까도 많이 고민했지만 정말 이 마음씨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마을을 못 와봤다면 평생 후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마움의 표현으로 지주는 물론 뤽에게도 볼을 맞대는 비주 인사를 하고 일자리를 찾은 뒤에 꼭 시간을 내서 이 마을을 다시 오리라, 뤽의 집에 다시 오리라 다짐을 했다.


‘안녕, 오흐부아(Au revoir).’


이걸로 내 프랑스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여행 이야기가 끝이 났다. 같은 가격이면 저렴한 호텔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겠지만 당시 나는 그런 차가운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사는 방식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나누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곳도 가볼 수 있었다. 2018년 2월의 따뜻한 기억을 안고 나는 다시 따뜻한 와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에어비엔비 작가, 오동환

와인에 빠져 나이 서른에 워킹 홀리데이로 프랑스 보르도로 날아가 와이너리에서 일하며 ‘보르도 농부’가 되었던 열정 과다 남자 사람. 말하는 걸 좋아해 와인 강의를 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해 와인 21 닷컴에 글을 기고하며, 와인과 마케팅을 좋아해 프랑스의 샤또 몽투스(Château Montus)의 브랜드 엠베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 인스타그램 : @daniel.oh.0722

- 블로그 : blog.naver.com/ohdongha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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