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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Sep 30. 2019

메콩강을 여행하는 노마드

내향적인 여행자에게 완벽한 시간, 동남아에서의 5개월

2017년 봄, 어렵게 휴가를 내어 친한 회사 동료와 라오스로 떠났다. 10일 정도 되는, 당시 회사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연차를 긁어모은 휴가였다. 우리가 라오스를 가기로 결심했던 건, 무언가 때 타지 않고 숨겨진 보석 같은 여행지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사실 <꽃보다 청춘> 같은 TV 프로그램에 자주 노출된, 이미 한국인들이 포화상태인 곳이라는 걸 늦게야 알아차렸지만.


우리는 알차게 라오스를 정복하고 돌아오겠다는 포부로 꽉 찬 일정을 짰다. 수도 비엔티안에서는 짧은 무박 2일을 보내고, 액티비티의 도시 방비엥에서는 푸른 에메랄드 빛 호수에 다이빙도 하고, 루앙 프라방에서는 승려들의 탁발 행렬에 보시도 하고 말이지… 심지어 여행 경비 대비 과한 부티크 호텔을 과감하게 결제하기도 했다. (그곳은 야외 월풀 욕조가 있는 프라이빗 숙소로, 연예인 부부인 지성과 이보영의 신혼여행 숙소였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아름다운 여행지를 뒤로 하고 가장 여운이 남는 곳은, 수도 비엔티안이었다.

▲ 라오스 비엔티안의 한적한 낮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오래된 수도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 등 유명한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나는 이 비엔티안이, 정확하게는 삶에 급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유유자적한 비엔티안의 여행자들이 좋았다. 대낮부터 아무도 없는 한적한 바를 연 주인이나, 그곳에서 두꺼운 안경을 끼고 책을 읽는 사람, 노트북으로 신중하게 타자를 치며 글을 쓰는 사람. 그들은 한 곳에 길게 머물렀지만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10보 걸을 때마다 사진 찍기 바쁜 단기 여행자였던 나는 라오스 여행 이후 어떤 강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건 바로,


"아주 길고,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다"




메콩강을 여행하는 노마드가 되는 법


그로부터 1년 후,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것도, 미얀마에 가는 비행기에 올라 10개월에 가까운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중 5개월은 메콩강 줄기가 흐르는 동남아에만 죽치고 있었던 것도, 이 모든 사건의 원인(원흉?)에는 2017년 라오스 여행이 심은 욕망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명치를 지나 발끝까지 가라앉은 어떤 욕망이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한 여름에 회사를 그만두고 그보다 더 뜨거운 동남아로 떠난 것은 아닐까? 그때 나는 라오스에서 어떤 여행균에 감염되어 온 것은 아닐까?

▲ 라오스를 여행한 지 1년 후,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동남아로 떠났다.

최초의 계획은 메콩강이 흐르는 나라를 모두 가보는 것이었다. 동남아 최대의 강 메콩강은 티베트에서 발원하여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지나 남중국해로 흘러나간다. 다섯 나라 모두 한 달 살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한번 눌러앉은 곳이 좋아 계획 일정이 변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노마드다운 행동이 아니겠냐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기는 미얀마 한 달, 태국 석 달, 베트남 한 달, 즉 관광 비자가 허하는 모든 일정을 꽉 채워 표류한 노마드의 단편선이다. 동남아 장기 여행을 하며 그림 그리는 취미가 생기기도 했다.




순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미얀마 양곤(Yangon)


미얀마로 가는 비행기에서 크리스틴 조디스의 <미얀마 산책>을 읽었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스위스 작가이자 여행 작가인 니콜라 부비에가 그린 한국의 정경을 보고 한국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어떤 글을 읽고 알지도 못하는 곳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내가 미얀마를 첫 번째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조지 오웰의 책 <버마 시절> 때문이었으니까.

▲ 미얀마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크리스틴 조디스의 <미얀마 산책>을 읽었다.

조지 오웰은 영국이 버마를 통치하던 시절 경찰로 복무했다. 버마는 미얀마의 다른 이름이다. 제국주의 시대 때 ‘버마’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인들은 국명을 ‘버마’로 했고, 그것이 한동안 공식 국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엔 ‘미얀마’를 정식 국명으로 채택했으나 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아직 버마라는 국호를 쓴다. 복잡하고 아픈 역사를 가진 은둔과 미소의 나라 미얀마, 나는 미얀마에 가장 먼저 가고 싶었다.

▲ 미얀마 양곤. 건물에 낀 곰팡이와 이끼가 곧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축축한 동남아의 기후에 부식된 서양식 건물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양곤의 건물은 대부분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고, 긴 역사와 이끼가 켜켜이 쌓여 낡아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타나카를 바르고 다니는 미얀마 여자들. 타나카는 자외선 차단과 미용의 목적으로 나무를 돌에 갈아 물에 희석시켜 바르는 나무액이다. 남녀 불문 '론지'라는 전통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도 인상 깊다. 이들의 얼굴은 같은 듯 다른데, 미얀마는 130개의 소수민족이 함께하는 다인종 국가이기 때문이다.

▲ 천연 자외선 차단제인 타나카를 바른 여인
▲ 양곤 역을 지나다니는 현지인. 남녀 불문 '론지'라는 치마를 입는다.

어느 날은 양곤의 현지를 잘 느낄 수 있다는 순환열차를 타러 양곤역에 갔다. 양곤 전역을 한 바퀴 도는 순환 열차는 한번 순환하는데 3시간 정도 걸린다. 나는 열차 출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초조하게 걸어 간신히 시간 내에 도착했지만 사람들은 느긋하게만 보였고, 열차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게 열차를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열차를 탄 후 세 시간은 금방 갔다. 실컷 사람을 구경하고, 창 밖을 봤다. 머리에 임을 지고 가는 여성들과 코끼리 바지를 입은 서양 여행객, 학교에 가는 듯 책을 읽고 있는 어린 학생... 불현듯 나는 순환 열차 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환 열차는 목적지가 없다. '어디로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는 게' 목적인 순환열차. 나도 정주와 이동 자체가 목적인 여행을 하고 싶다.

▲ 순환 열차의 풍경
▲ 양곤역의 전경. 뒤편으로는 사원들의 금색 첨탑이 보인다.



가이드북에서 말하지 않는 것

미얀마, 바간(Bagan)


양곤에서 바간으로 이동했다. 바간에 온 이유는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선 불탑, 즉 파고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숙소에서 전기 자전거를 빌려 시원한 바람을 쐬며 바간의 초원으로 달렸다. 올드 바간을 달리고 달려 바간의 명물 일몰을 보기 위한 적당한 사원을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올라가는 게 막혀 있었고, 가이드들은 자기만 아는 시크릿 파고다를 알려주겠다며 호객 행위를 했다. 간단히 파고다를 찾을 줄 알았던 나는 일몰 시간이 다돼가자 초조해졌다. 나는 어떤 귀여운 소녀가 안다는 시크릿 파고다에 가기로 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프리란다. 다만 자기 대나무 기념품만 하나 사면 된다고. 오케이. 소녀의 이름은 찌진이었다.

▲ 바간의 일몰. 흙색 탑인 파고다에 올라가면 넓은 올드 바간이 한눈에 담긴다.

찌진이 이끄는 파고다로 가기 위해 전기자전거를 타고 꽤나 달렸다. 한적한 곳에 도착한 후 찌진의 시크릿 파고다로 올라가는데… 그때까지 나는 고소공포증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몰을 보려면 어딘가 올라가야 하고, 그곳은 꽤 높은 곳일 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파고다의 가파른 벽돌을 잡고 올라가는데 엉덩이와 다리가 계속 후들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오랜만에 렌즈를 낀 탓에, 먼 풍경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그렇게 사원의 벽돌을 밟고 올라가며 나는 섬찟한 공포를 느꼈다. 사원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며 바간의 풍경에 넋을 잃다가도, 한편으로는 계속 “여기서 떨어져서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같은 사원에 올라온 외국인 여자 한 명은 자기는 여기에 못 있겠다며 내려갔다.


여행 후기에 이런 건 없었다. 사원이 아름답다. 일몰이 아름답다-라고만 하지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사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1년 전 라오스에서 짚라인을 탈 때가 떠올랐다. 나는 짚라인 체인을 메고 신나게 내려오는 것만 생각했지, 짚라인을 타기 위해 수많은 오르막길을 등산해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 아름답지만 무서웠던 그 당시

그래서 일몰은 적당히 보고 내려왔다. 너무 어두워지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찌진은 마지막으로 기념품을 보여줬는데.. 생각보다 살게 없었고 생각보다 비쌌지만 그냥 샀다. 좋은 파고다도 안내하고, 편하게 길잡이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같이 노을도 기다려줬으니까. 그렇게 내 손엔 정체불명의 작은 보석함 다섯 개가 남았다. 1년 간 짐을 늘리지 않기 위해 기념품은 안 사기로 했는데, 또 고맙거나 미안해서 샀다. 소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소비를 종종 하게 된다. 그래도 그게 찌진이어서 다행이었다.

▲ 찌진에게 산 보석함은 치앙마이에서 만난 친구에게 선물했으니 좋지 아니한가.



한 번쯤은, Addicted to work

태국 치앙마이(Chiang Mai)


치앙마이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코워킹 스페이스 도장 깨기를 해보는 것. 디지털 노마드의 천국 치앙마이의 수많은 작업공간을 모두 가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곳에 출석 도장을 찍겠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하지만 처음 간 장소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다른 곳은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님만해민 구석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Addicted to work”는 내가 치앙마이에 머무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방문한 코워킹 스페이스다.


어딕티드 투 워크의 분위기는 한적하고, 조용하다. 신발을 벗고 공간에 들어서면 장부에 이름을 적고 도착한 시간과 마시고 싶은 음료를 적는다. 하루 이용료는 음료 1회를 포함하여 120바트. (약 4,700원. 반나절, 한 시간 단위로도 이용할 수 있다.) 애매한 카페를 전전하는 것보단 이곳에서 주전부리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 채광이 좋아 언제나 실내로 그림 같은 햇살이 들어오고,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화단이 시야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이 곳은 세련된 카페보단 정갈한 가정집 같았다. 졸릴 때엔 스탠드 데스크에서 서서 일하다가, 정 안 되겠으면 커다란 빈백에 누워 자도 된다.

▲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 Addicted to work

어딕티드 투 워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발자들이었다. 이곳에서 몇 달간 치앙마이에 머무르며 개발자로 일하는 한국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마다 개발자 모임을 했다. 나는 디지털노마드가 가득한 이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유일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져온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편집하다가 귀찮으면 노트북을 닫고 그림을 그렸다. 조용하고 느리게 가는 이곳에서 시간을 빈둥빈둥 때우다, 밥시간 때는 호스트의 식사 시간에 끼여서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어딕티드 투 워크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호스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맛있는 태국 채식 홈푸드를 만들어주는 '핌'은 사글사글한 미소와 친화력으로 모든 이들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고 식사 때가 되면 밥그릇을 내민다. 성실하고 훤칠한 '라끼'는 까무잡잡한 남자 호스트인데, 언제나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며 화단을 가꾼다.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열 평 남짓한 이 공간에는 따뜻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치앙마이에는 워낙 신식의 편안한 카페와 코워킹 스페이스가 많다 보니, 다들 님만해민의 골목 구석에 위치한 이곳까지는 찾아오지 않아 한적한 편이다. 하지만 한번 온 사람들은 잊지 않고 이곳을 다시 찾아온다. 치앙마이에서 홀로 생일은 맞은 날에도 나는 이곳에 왔다. 그래도 생일이니까, 외롭지 않게 마무리하고 싶어서. 호스트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생일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핌이 해주는 따뜻한 밥을 한 끼 먹고 책을 읽으며 생일을 마무리했다.

▲ 생일날 자연스레 껴서 먹었던 저녁밥
▲ 라끼에게 선물한 그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일상을 보내며 나는 '좋은 공간'이란 어떤 곳인지 생각했다. 집처럼 편안하면서, 집과는 다른 설렘과 긴장감을 주는 곳. 내겐 어딕티드 투 워크가 그런 곳이었다.




내게 커피로 남을 그 도시

베트남 호찌민(Ho chi minh)


베트남에서 자주 보던 풍경은 길가의 노점 앞 목욕탕 의자 같은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이었다. 출근 전에도, 식사 후에도 언제나 진한 커피를 들이켜는 그들의 삶에 커피는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주 메뉴는 진한 에스프레소에 달달한 연유와 얼음 몇 알을 넣어 만든 연유 커피, '카페 쓰어다(ca phe sua da)'다.

▲ 저녁 시간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커피 생산량이 확대되면서 커피 문화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커피에 신선한 우유를 넣은 카페라테를 마셨지만, 가난한 현지 사람들은 커피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우유 대신 연유를 넣기 시작했고 그것이 베트남의 대표적인 시그니처 메뉴가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카페 쓰어다를 직접 만들어보기 위해 장을 보러 나갔다. 원두와 연유, 핀 드리퍼만 있으면 됐다. 핀 드리퍼(Phin Dripper)는 베트남 식 핸드드립 커피 기계로, 집에서 간단하게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드리퍼에 원두를 판판하게 담고, 뚜껑을 닫고 물을 부으면 간단하게 에스프레소가 나온다. 여기에 연유를 섞어 달달하고 진한 커피를 만들기만 하면 금방 셀프 카페 쓰어다를 만들 수 있다. 호찌민에 있는 한 달 동안 나는 매일 카페 쓰어다를 만들어 마셨다.

▲ 베트남식으로 내린 카페 쓰어다(왼), 콩카페에서 먹던 코코넛 커피(오)

집에서는 핀 드리퍼로 커피를 만든 한편, 밖에서는 항상 콩카페의 코코넛 커피를 마셨다.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점인 콩카페는 나의 완벽한 작업용 카페였다. 비록 비둘기가 들어와 의자와 바닥 드문드문 하얀 똥을 싸지르긴 했지만.


여행의 마지막 도시 호찌민에서는 긴 여행을 갈무리할 특별한 것을 사볼까 했다. 하지만 눈을 뜨니 귀국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결국 내가 산 것이라고는 핀 드리퍼와 콩카페에서 산 커피잔 세트가 전부다. 요즘엔 이걸로 커피를 자주 내려 마신다. 진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려 초록색 잔에 담아 마시면, 순식간에 축축한 콩카페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산 그때로 돌아간다. 호찌민에서의 한 달을 그대로 사온 느낌이다. 그럼 다시 동남아로 가는 티켓을 끊고 싶어 지는 것이다.




내향적인 여행자에게 완벽한 방

에어비앤비로 여행한 200일


나는 내향적인 여행자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보통 근처 카페와 밥집을 전전하는 싱거운 하루를 보낸다. 동남아의 나이트 문화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방에 머무르며 작업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나에게 맞는 방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이런 성향의 여행자일수록 에어비앤비는 완벽한 플랫폼이다. 낯선 방을 유랑하는 것도 어쩌면 여행의 일종이 아닐까.

▲ 치앙마이의 에어비앤비에서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 태국 빠이의 에어비앤비에는 앞마당이 있어서 매일같이 우쿨렐레를 쳤다.

동남아의 5개월을 포함해 200일간 에어비앤비로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가장 사적인 타인의 집에서 취향을 수집할 수 있었다. 원룸 오피스텔에서만 살아온 내가 어쩌면 룸메이트와 같이 투룸에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게 된 것도 에어비앤비 덕분이다. 독립적인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서로의 개인 공간을 존중할 줄 아는 파트너만 있다면 넓은 공간에 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각자의 방이 있으면서, 거실은 큰 탁자가 있는 공종 작업 공간으로 조성하고, 같이 먹을 원두를 공동 구매하는 삶,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집엔 호스트들의 집에서 본 재미있는 아이템들로 하나씩 채워야지. 미얀마의 숙소에서 매일같이 원두를 내려마신 커피메이커에 반해 한국에 오자마자 커피메이커를 구매하기도 했다.

▲ 에어비앤비 여행은 커피를 마시는 수많은 방법을 경험하는 과정이었다

에어비앤비의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느슨한 소통 방식도 마음에 든다. 에어비앤비는 숙소를 예약할 때부터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고, 체크인 순서나 미리 질문할 것들을 메신저로 나눈다. 또 여행 도중에는 언제나 메신저로 질문을 하고, 현지인만 알 수 있는 정보를 물어볼 수도 있다. 내가 호찌민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로지에게 가장 먼저 한 질문은 "근처 어디에서 과일과 야채를 살 수 있어?"였다. 로지는 과일과 야채를 같이 구할 수 있는 큰 마트의 위치와, 마트에 갈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인 그랩 오토바이 타는 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호스트를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에어비앤비 플랫폼을 통해 현지인과 느슨한 유대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나는 그 신뢰 속에서 안전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좋은 호스트를 골라야 하는 것만큼, 내가 좋은 게스트가 될 필요도 있다. 에어비앤비는 상호 간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공유경제 플랫폼이다. 이 신뢰의 기반은 호스트와 게스트의 쌍방향 후기 시스템에서 온다. 나도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에어비앤비의 방을 깨끗이, 내 집처럼 사용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쨌든 호스트의 집을 잘 사용하고 깨끗이 떠나는 것은 최소한의 덕목이다. 완벽한 여행을 보낸 숙소에는 구구절절 긴 후기를 남겨주는 것도 좋다.

▲ 나는 나쁘지.. 않은.. 게스트라고요..

일상을 떠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지라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빨리 나만의 일상을 다시 만들고 싶다. 그럴 때는 로컬들의 삶에 숟가락을 얹기만 하면 되는 에어비앤비만큼 좋은 곳이 없다.


당신이 방을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게으른 고양이 같은 영역 동물이라면, 타인의 취향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면, 에어비앤비는 완벽한 순간을 제공할 것이다. 대단한 에피소드를 만들 만큼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에어비앤비와 함께하는 동남아 여행은 낯선 타지에 아늑한 자기만의 방 만드는 일이었다.


Tip. 200일 이상 에어비앤비를 이용한 여행기가 더 궁금하다면, "200일간 에어비앤비로 여행하기"를 읽어보시길.




왜 나는 동남아를 사랑하는가


이 곳은 무위(無爲)가 일이 되는 곳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여기서 할 유일한 일이다. 하지만 오로지 그런 조건에서만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아이디어를 얻고는 한다. 삶과 사유에 느긋한 공백을 만들어주는 메콩강은 언제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촉촉한 자극을 준다.

▲ 라오스에서 바라본 메콩강

다시 크리스틴 조디스의 <미얀마 산책>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구경거리를 차곡차곡 쌓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면 종잡을 수가 없어져 시시콜콜한 밑바닥에만 집착하고, 전후의 다른 요소를 놓치기 십상이라고. 그러니 나처럼 ‘감상적 관광객’에게 중요한 것은 유연하게 세상과 만나며, 그저 그 안에서 흘러가는 대로 메콩강에 물드는 것이다.


나는 ‘꼭 봐야 할 곳’을 선택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이끌리고, 정복되고, 물들어가는 대로 놔두고 싶었다.

- 크리스틴 조디스, 미얀마 산책


언제나 나는 메콩강에 이끌리고, 정복되고, 물들어간다. 이번 겨울에는 캄보디아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나는 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수많은 것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에어비앤비 작가, 사과집

보통날엔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 <공채형 인간>을 썼습니다.

브런치: brunch.co.kr/@applezib

인스타그램: @pineapplez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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