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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Oct 28. 2019

‘조지아’라는 놀라운 선물

너무도 열심히 살아온 당신에게

겨우 서른한 살이었다. 아직 뜨거운 사랑은 시작도 못했는데 허리 디스크를 진단받았다. 덕분에 입사 6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가 생겼다. 정확히 얘기하면 ‘병가’이지만. 자유롭지 않은 몸으로 미라처럼 누워만 있다 보면 웹 서핑도 거기서 거기, 스마트폰 속 앨범을 찬찬히 살펴본다. 손때 가득한 3년 산 휴대전화  안에는 15,000여 개의 사진이 있다. 나도 모르는 새 쌓아온 일상의 기록들이다. 손가락을 탭 한다. 수십 장의 사진이 휘리릭 움직인다. 우스꽝스러운 사진에 미소 짓다가, 이런 사진도 찍었나 하고 놀라기도 한다. 일과 관련된 사진이 가득했다. 만나는 사람도, 가는 곳도, 찍는 대상도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결코 평범한 삶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퇴사할 용기는 있었느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만두는 건 엄청난 용기다. 나는 겁이 많은 일개미였다. 모아둔 돈도 없고, 장기간 견뎌낼 배짱도 없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우리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지난 6년 동안, 휴가는 짧으면 일주일 길게는 10일이었다. 회사에서는 신혼여행 휴가로 2주를 준다는데, 그게 너무 부러워서 결혼이나 빨리할까 했다. 그런 내게 약 3주간의 자유가 주어졌다. 건강을 잃고 얻은 자유지만, 그 어떤 시간보다 소중했다. 21일. 호캉스도 나를 찾는 여행도 중요치 않았다. 내겐 그 자체로 온전한 여행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지아(Georgia)라는 나라는, 완벽한 선물이었다.




우당탕탕 조지아 관찰 일지


여행이란 게 그렇지 않나. 여행을 가면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렇지만, 실상은 숙소에서 넷플릭스나 보고 한국에서도 마시는 코젤 맥주를 사다 먹으며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비행기만 13시간을 탔는데 다른 점 하나 없다면 그것 또한 여행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쓰는 게 있다. 관찰 일지다. 갑자기 분위기 급식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인데, 관찰 일지는 별거 아니다. 그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내가 살던 삶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무작위로 적는 기록이다. 


나의 별것 없는 관찰 일지를 펼치기 전에, 조지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말해보자.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아르메니아[Armenia])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나라. 위로는 러시아, 아래로는 터키 그사이 어디쯤 있달까. 보통 조지아에 간다고 하면 백이면 백 “미국 조지아?”, “조지아 커피? (PPL 아님 주의)”라고 말하는데, 조지아에 가거나 갈 예정인 사람이면 무조건 공감할 것이다. 

▲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는 조지아

그렇게 인지도 부족에 시달렸던 조지아는 내가 여행을 다녀온 후 딱 1년이 지나자, 라이징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일단 장기 여행자가 환장할 무비자 1년에, 환상적인 물가를 보장하는 나라. '저렴이 스위스' '가성비 유럽'이라는 말로 뜨고 있지만, 내게 조지아는 그냥 이런 나라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나라. 나만 알고 싶은 나라. 지금보다 더 뜰까 두려운 나라. 유럽의 비슷비슷한 풍경에 싫증이 나고, 인피니티 풀과 SNS 여행지의 성지인 동남아가 시들할 때 조지아라는 나라는 당신에게 새로운 옵션이 되어줄 것이다.  

▲ 마성의 매력, 수도 트빌리시(Tbilisi)

일단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풍경부터가 신박하다. 족히 1만 킬로미터는 달렸을 법한 7~80년대 메르세데스 벤츠가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다니고, 낡은 소비에트 연방 아파트가 줄지어 있는 곳. 마치 폭격 맞은 것처럼 노출된 외벽과 벗겨진 페인트, 신호등을 찾기 힘들어 렌터카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교통 환경. (사이드미러나 앞 창문 둘 중 하나는 무조건 깨져 있다) 출퇴근 지각 걱정 없는 체감 시속 30km인 메트로 에스컬레이터, 길거리에 책을 쌓아두고 강가에는 작은 책방이 줄지어 있는 곳. 엄청 큰 수박을 1000원에 팔고, 웰컴 드링크로 술을 한가득 주고, 한 가게 건너 와인숍이 줄지어 있어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곳. 골목마다 경찰이 있고 꽤나 치안이 괜찮은 나라. 길거리에 유유자적하는 개와 고양이들이 있고, 가는 곳곳 초목이 우거진 나라. 그리고 스탈린의 고향, 이건 별로네.

▲ (왼) 이것이 조지아 웰컴 드링크의 클래스, (오) 어디든 길거리 책방이 가득한 도시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쿠라(Kura) 강이 있다. 마치 우리네 한강처럼, 파리의 센 강처럼. 강은 녹조 라테 같아서 아름답진 않지만, 이곳은 조지아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된다. 큰 플라타너스가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어 40도의 더위에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한강변처럼 고급 아파트가 종종 늘어서 있지만, 오히려 멋 부리지 않은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운치 있다.

▲ 조지아의 상징인 어머니 상

도시 중간에는 조지아의 상징인 ‘어머니 상(Mother Of Georgia)’이 있다. 터줏대감 개들의 똥을 용케 피해 다니며 올라온 어머니 상은 웅장하고 거대했다.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어머니 동상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전쟁 영웅이나 뛰어난 정치가 등 대부분 남자 동상이 주를 이뤘는데, 무려 어머니 상이라니. 여행자의 흥미를 돋우는 데는 충분했다. 어머니 상의 왼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손님이 오면 와인을 대접하겠지만 적이 침입하면 함께 나가 싸우겠다는 다짐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조지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적이 침입했을 때 남자들이 나가서 싸우는 건 당연하지만, 조지아에서는 어머니도 나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말해주었다. 역시 전 세계의 어머니는 위대하다. 힙하고 멋진 나라다. 참, 저는 손님이니 칼은 거두시고 와인 한 잔 주세요, 어머니!




조지아 리틀 포레스트


에어비앤비는 역시 아무 데나 잡는 게 아니다. 특히 건널목 하나 없는 이곳은.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기 위해 2km는 걸어야 하는 이곳 오르타찰라 골목(Ortachala St.)은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낯선 곳이다. 자, 구글 지도를 살펴보자. 앞으로 찾아갈 나의 숙소 근처에는 대형 마트가 하나 있고(좋아!), 뭔가 굵직굵직한 대사관과 공공기관이 위치해 있으며(완벽해!) 근처에 은행도 있는 걸 보니 뭔가 나쁘지 않은 위치인 듯하다. 하지만 구글 지도의 파란 점은 그 뒤편 어느 골목 언저리에서 깜빡이고 있었으니, 이곳은 말 그대로 정말 현지인들만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역시 에어비앤비의 숙소를 찾아가는 맛은 이런 것에 있다. 언제나 반전을 선사하거든.

 ▲ 조용하고 아늑한 오르타찰라 동네

디스크 환자라 배낭은 사치다. 몸만 한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조용한 동네를 올라갔다. 동네 주민들이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동양인 여행자를 낯설게 바라본다. 작은 구멍가게가 드문드문 있고, 2층 창 너머 테라스에는 빨래가 정갈하게 널려있다. 골목 어귀에는 15년 전 우리나라의 그때처럼 아이들이 고무공으로 축구를 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뭐가 그리 웃기는지 숨 넘어가게 웃으며 나 같은 이방인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또 다른 상점 앞에는 동네 아저씨들 네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나를 보더니 마치 아는 사람처럼 손을 붕붕 흔든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하지만 이미 이 동네에 대한 의심이 풀려버린 나는 홀리듯 그들에게로 간다. 아저씨들은 갑자기 앉아있던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하더니 난데없이 어깨동무를 한다. 잠시 당황한 내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가리키며 찍으라고 한다. 그제야 나는 미소를 띤다. 조지아 사람들은 이렇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여행자에게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푼다. 조지아가 현재까지 나의 No.1인 이유도 이렇게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원, 뚜, 뜨리! 찰칵. 뭔지 모를 것 같은 이 마을이, 순식간에 좋아진다.

 ▲ 웰컴! 조지아 F4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참을 헤매다 비포장도로에 접어든다. 여기가 맞나 의심이 들 무렵 멀리 대문 너머로 전구를 주렁주렁 단 집이 한 채 보였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멀리서 보는 순간에도 느낌이 온다. 호스트인 기오르기(Giorgi)는 대문 옆 화문에 열쇠를 두었다고 했다. 화분이 여러 개인데요? 선생님. 실컷 보물 찾기를 하며 마지막 화분을 들췄더니 녹슨 열쇠가 있었다. 어릴 때 엄마가 자주 썼던 방법이었는데 여기서 이걸 하네. 오래간만에 추억에 젖으며 철문을 열었다. 숙소를 보자마자 목구멍 너머로 탄성을 나왔다. ‘아, 이거지. 이곳이 조지아 판 리틀 포레스트구나.’

▲ 리틀 포레스트 낮과 밤 (조지아 ver.)

먼 훗날 집을 짓는다면 딱 이런 곳이면 좋겠다. 주렁주렁 매달린 전구와 초록색 포도 덩굴이 가득하고, 삐걱대는 녹슨 철제 그네와 따뜻한 마당이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는 곳. 유명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곳에 하루만 머물러도 이 마을의 일원이 되는 느낌 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느낌 있는 그림과  컬러풀한 색상의 인테리어, 곳곳에 아늑한 조명이 새로 온 손님을 맞이한다. 방은 또 어떻고? 여느 4성급 호텔 못지않은 컨디션이었다. 호스트 기오르기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운영하는지 알 수 있는 디테일이 온 집안에 가득했다. 당장에라도 요리 천재가 될 것만 같은 주방과 각종 양념, 한편에 놓인 와인 병. 비록 저녁은 도시락 라면으로 때웠으나(역시나) 갑자기 행복해졌다. 좋은 숙소를 만나면 여행이 풍요로워진다. 한 달 살기가 무엇이냐, 단 하루면 충분하다. Don’t go to Georgia, Live in Georgia.

▲ 호스트의 배려와 디테일이 묻어나는 실내



조지아 와인을 만나다


▲ 사랑… 아니 와인의 도시 시그나기

싼값에 와인을 즐기고 좋아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조지아는 무조건 와야 한다. 1일 1병 가능한, 와인 천국이니까. 특히 와이너리 중심인 소도시 시그나기(Sighnaghi)에 가면 아주 저렴한 가격(5~6000원)에 홈메이드 와인 한 병을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도시는 ‘사랑의 도시(The City of Love)’라고 불리는 곳으로, 24시간 일주일 내내 밤낮없이 혼인 신고가 가능한 곳이다. 그러니까 두 명의 증인과 여권만 있으면 되는 진정한 의미의 스몰 웨딩. 실제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하트 시그널이 난무하는 곳이라 많은 커플이 결혼한다고 한다. 물론 나와 관계없는 슬픈 전설일 뿐이고 이곳은 와인으로 유명하다.

▲ 홈메이드 조지아 와인

조지아 와인 최대 생산지인 카헤티(Kakheti) 지역에 있고, 가까운 와이너리 투어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조지아 와인 맛에 대해 스포일러를 좀 하자면 한 입 머금는 순간 씁쓸한 쓴맛이 번지고,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타고 돌 때쯤 약간의 달달함이 퍼지며, 마침내 위장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늘어지는 마성의 맛이다.


"Would you like to join our tour(우리랑 같이 와인 투어 가지 않을래)?" 대낮에 와인을 반 병 마시고, 시그나기를 유유자적 돌아다니고 있는데 미드에서나 나올 법한 연예인 외모의 여자 두 명이 말을 건넸다. ‘Would you’라는 표현이 매우 정중하게 들렸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그나기는 와이너리 투어로 잘 알려졌는데, 게스트 하우스나 숙소를 통해서 가면 더 저렴하다. 보통 와이너리 투어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다. 돈을 나눠 내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저렴하게 4명이서 갈 수 있는 투어를 선택했는데, 나머지 인원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나와 마주하게 된 것! 와인 마시러 조지아에 왔다고 할 정도였으니 나는 그녀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운명에 이끌리듯 합류하게 되었다.




이국의 와인과 이국의 여행자에 취한 날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각각 27세, 21세의 나이였고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였다. 정말 예쁜 사람들이 서슴없이 말을 거니까 혹시 사기꾼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보이스 피싱을 당한 적이 있는 호구력 만렙), 그들은 그저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는 평범한 자매였다. 영업한 투어는 택시 투어로, 드라이버는 그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친구였다. 영어는 못하지만 미소가 아름답고 따뜻한 아저씨였다. 그나저나 한국인 아닌 외국인 동행이라니,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다. 혹시 오해라도 살까 설명을 덧붙이자면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은 처참하다. 그나마 넷플릭스 덕에 얼추 뉘앙스만 알아듣는 수준으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알 못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건, 사지 멀쩡하면 보디랭귀지로도 외국인 친구와 하루쯤은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 아름다운 독일의 청춘, 라라 자매 그리고 다정했던 드라이버

그러나 차 안은 어색함으로 숨이 막혔다. 당연했다. 그냥 돈 절약하고자 투어에 합류했는데 웨얼 알 유 프롬 빼고는 할 얘기가 없었다. 이때 동생인 라라(21, 대학생)가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이미 조지아 전역을 돌고 온 그녀는 꽤 저돌적인 친구였는데, 아이폰 속 사진을 보내주고 내 구글 지도에 별을 콕콕 박아주면서 꼭 가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언론 관련 공부를 했고, 한국인과 실제로 말하는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오 마이,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주진 않겠지. 나는 "두 유 노 OO?" 같은 흔한 질문은 버리고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을 쏟아내면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라라는 나의 고군분투 덕분인지(?) 한국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뿌듯하면서도 일말의 뻘쭘함과 어색함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사실 외국인 여행자에 대한 프로그램을 종종 만들었다. 그들과 며칠을 부딪치면서도 나는 연출자이고 그들은 출연자이기 때문에 서로 수십 번 허그를 하고 땡큐를 외쳤지만, 직접적인 사귐은 없었다. 그런데 택시 안에서 고작 한두 시간 얘기했다고 라라 자매와 내가 꽤 많은 걸 공유한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그녀의 휴대폰에 내 페이스북 아이디를 입력하고 있었고, 우리는 와이너리에 이르렀다.

 ▲ 장독대 같은 조지아 크레브리

조지아의 와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크레브리(Qvevri)라는 항아리를 땅속 깊이 묻고 숙성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전통 방식이다. 관광객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오크통에 와인을 숙성하는 것만 봤지 우리나라 김치 장독처럼 땅에 묻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바닥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 깊이가 어마 무시했다. 늘 15도를 유지해야 하는 지하에는 습기로 곰팡내가 가득했다. 와인 테이스팅은 10라리(약 3,900원) 정도였는데, 화이트 와인은 우리가 아는 색이 아니었고 약간은 황금빛을 띠었으며 맛이 상당히 좋았다. 레드와인은 떫은맛이 강했고, 전통주 차차는 양주 수준의 도수였다.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와 라라 자매와 나는 알딸딸한 상태가 됐다.

▲ 와인 시음. 음!

다시 말하지만 처음 만난 자리였다. 하지만 좋았다. 이런 이질적인 느낌.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같은 와인을 마시고 공통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우리는 투어 내내 종일 깔깔대며 웃었다. 아름다운 강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며, 수도원 밖 멋진 풍광들을 보며 서로의 카메라에 함께한 시간을 담았다. 그 후로 우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종종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금은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지 소식을 전하곤 했다. 물론 열심히 구글 번역기를 돌려야 했지만 말이다.


여행은 신기하다. 사람 한 명 잘못 만나면 지치고, 숙소 하나 잘못 구하면 하루를 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은 우리가 또다시 여행을 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오늘 하루는 풍경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여행이었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조지아를 여행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마음껏 누렸을 조상님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유럽인의 성지라고 불리는 메스티아(Mestia) 여행의 투 톱은 우쉬굴리(Ushguli)와 코룰디 호수(Koruldi lake)다. 특히 우쉬굴리는 코쉬키(Koshki) 타워로 유명한 오지 중에 상오지다. ‘고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문명이 닿지 않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갈과 쪼개진 바위로 뒤덮인 비포장도로를 3시간 정도 가야 한다. 날이 좋지 않으면 산사태가 발생하는 일도 있단다. 실제로 사고도 종종 있었는지 도로 곳곳에 십자가와 술이 놓인 곳도 있었다. 기사들은 그 십자가를 보며 한 손으로 성호를 긋는다. 자연의 민낯을 보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다.

▲ 절벽에 매달려 가는 4륜 구동 자동차

하지만 하루에도 두 번씩 이곳을 드나드는 베테랑 드라이버는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운전대를 잡는다. (심지어 통화도 한다!) 절벽의 좁은 길에 기대어 유유히 물웅덩이와 돌 위를 넘나 든다. 오직 드라이버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천 길 낭떠러지. 좌석 등받이에 딱 붙은 나는, 대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지옥의 오프로드를 지나면 비로소 자연의 허락을 받을 수 있다. 멀리 만년설이 펼쳐지고 그 밑엔 빙하가 흐른다. 말을 탄 사내가 유유히 산책하고 아기 돼지 오 형제가 진흙탕에 뒹구는 풍경. 1분 1초마다 보는 광경이 달라진다. 신이 내린 절경. 이게 현실일까 꿈일까, 이런 게 행복일까 수없이 되묻는다. 매일 이 풍광을 보는 사람들도 지겨울까. 며칠쯤 이곳에 고립되고 싶다. 

▲ 물소 5 성급 뷔페 (만년설 VIEW 포함)

그리고 마침내 메스티아 도장 깨기의 끝판왕, 코룰디 호수(Koruldi lake). 아마 휴가가 일주일 정도면 이곳은 가장 먼저 걸렀을 장소였다. 최소 8시간 정도 지옥의 트래킹을 하거나 Jeep 차 같은 4륜의 오프로드 전용 차를 타고 험한 길을 와야 하거든. 그러나 내겐 허리디스크와 맞바꾼 ‘시간’이 있었다. 보호 복대를 부여잡고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만난 코룰디 호수는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통틀어 가장 동화 같은 곳이었다. 라이언 킹의 한 장면이었다. 작은 호수에서 물소 떼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 어떻게 찍어도 프로필 사진 각

디즈니의 악역들도 선하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언덕 위에 가만히 앉아 물소의 울음소리, 풀이 흩어지는 소리, 멀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열심히 살던 내게 신이 잠깐 멈추고 이런 미지의 세상도 보라고 기회를 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행복했다. 사람들 북적이는 도심도 좋고, 올 인클루시브 호텔도 좋지만, 인생에 이런 경험 한 번쯤은 괜찮잖아?




다시 돌아오더라도, 그땐


어디선가 노래 ’Shape of you’를 부르는 옛 된 목소리가 들린다. 작은 해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메스티아의 꼬맹이들이었다. 영화 <집으로>에 나올법한 시골 산골짜기라고 생각했는데, 유튜브로 스트리밍 중이었다. 잡스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며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잠시 후 익숙한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핏 들었는데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멜로디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좀 더 소리가 잘 들리는 쪽으로 나갔다. “~이 떨어져요. ~씩 멀어져요.” 완벽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후렴구가 확실했다. 방탄 소년단의 ‘봄날’이었다.


순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곳은 조지아에서도 시골인 메스티아였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허리를 부여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래가 바뀌었다. 역시 방탄소년단(BTS)의 Fake love였다. 또랑또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BTS의 목소리와 섞여 나왔다. 그 후로 그들은 블랙핑크, 볼 빨간 사춘기 노래까지 스트리밍 하며 한참을 들었다.

▲ 해먹에 누워서 K-pop을 스트리밍 중인 동네 꼬맹이들

호들갑 떨긴 싫었으나 이런 현상을 직접 경험하니 어쩔 수 없었다. 메스티아에 대나무 숲이 있다면 제가 한국 사람입니다! BTS랑 같은 나라에서 왔어요!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국뽕’이란 단어는 대중 콘텐츠에서 가장 먹히는 아이템이지만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화의 힘을 직접 느끼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한국인 손님이라서 일부러 그 노래를 틀었을까, 이들은 어떻게 한국 노래를 알게 된 걸까. 머릿속에 질문만 가득 채운 채로 잠들었다. 다음 날 나는 체크 아웃을 하면서 숙소 주인에게 물었다. BTS를 어떻게 아세요?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드라마 <주몽>을 즐겨봤다고 했다.


나는 실제 필드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회의감도 좌절도 자주 든다. 우리의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 먹힐까에 대해 의심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 일어나고 있었다. 고작 2,000명이 사는 메스티아에서도 우리의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BTS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일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서 대단한 걸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도망치듯이 왔던 조지아에서 적어도 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봤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사소하게는 그 나라의 지하철을 타거나, 그 나라의 치안에 놀라며 내가 살던 곳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다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건 또 다른 탈출을 불러일으키지만, 때론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 날도 있다. 결국 나는 휴가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사직서를 품기에는 새가슴이라 맡은 자리에서 또 열심히 살아갔다.

▲ 저 세상 텐션인 하츠밸리 전망대와 조지아에서 만난 매일의 풍경

조지아의 대자연 앞에서 초연해지던 나는 어디 가고 치열한 현장에서 일개미처럼 살고 있지만, 문득 생각난다. 1라리의 빵 한 덩이와 달콤 쌉싸름한 와인이, 별이 쏟아지는 메스티아에서 BTS 노래를 듣던 꼬마들이, 한국인 친구를 처음 사귀어본 라라 자매가, 조지아를 지키고 있던 굳건한 어머니 상이.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너무도 열심히 살았다면 한 번쯤 조지아로 인생 환승을 해보길 권한다. 아마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쯤 조금은 변화된 자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에어비앤비 작가, 신소영

집 상암동, 일터 상암동, 노는 곳 상암동. 상암동 뭉크이자 붙박이. 멜로 말고 먹는 게 체질, 고인 물 싫어하는 청정 1 급수를 추구하는 삶. 세상의 편견을 바꿀 아이디어로 가슴 두근거리고 싶은 콘텐츠 크리에이터.

인스타그램 @shin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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