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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Nov 25. 2019

비건의 낙원, 베를린의 재발견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된 이색 베를린


우리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리 부부는 결혼 전부터 '나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을 그려주고,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며 세계를 돌아다니면 재밌겠다'라고 의기투합했었다. 여행 전에도 지인들을 초대해서 요리를 대접하고 수다 떠는 것을 즐겼던 우리 부부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과 다이닝을 즐겨보고 싶었다.

▲ 여럿이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것, 초대된 지인들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었던 우리 부부의 일상

남편은 초대 손님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들과 함께 즐길 메뉴를 구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요리를 내고 다 함께 즐기는 모든 과정이 마치 하나의 관객 참여형 공연 같다고 항상 말했었다. 나 역시 그의 식탁 위 공연에 매료되어 결혼까지 한 골수팬으로서, 남편의 멋진 퍼포먼스에 나의 그림을 곁들인다면 무척 신나고 의미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세계 여행을 시작했고, 현재는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에서 방황 중(?)이다. 그중 베를린에서 겪은 잊지 못할 이색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매우 잘못된 만남, 고기 애호가의 비건 하우스 입성

설렘을 안고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나와 맞지 않는 호스트를 만날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행 초보인 우리는 단언컨대 그런 가능성을 염두해 본 적이 없었다. 집 전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방 한 칸 위주로 예약을 하며, 게스트하우스보다는 프라이빗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더구나 호스트가 부부나 커플이라면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로컬 라이프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맛집이나 로컬 스팟 등도 추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가격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에어비앤비는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마침 베를린에 예약한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노아(Noah)와 스테파니(Stephanie)라는 커플이었고, 우리는 두 커플이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문화와 음식과 연애담을 나누며 도란거릴 생각에 들떠있었다.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남편은 독일 하면 맥주와 소시지 아니겠냐며, 맛있는 맥주와 품질 좋은 육류로 실컷 요리할 생각에 아주 신이 나 있었다.

▲ 우리 부부가 꿈꾸었던 독일식 다이닝. This is Germany!

그런데, 미리 사 왔던 우유와 요거트를 냉장고에 넣으려던 순간, 호스트 노아는 무척 당황하며 예약 전에 숙소 이용규칙을 읽지 않았냐고 물으며 우리를 저지했다. 순간 우리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들은 비건(Vegan)이며 이 에어비앤비는 비건 하우스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육고기와 어패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도 먹지 않고 반입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숙소 주방에서 값싸고 질 좋은 육고기로 원 없이 요리하고자 했던 우리는 깊은 절망에 탄식했고, 그런 우리를 보며 노아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마다 햇살이 눈부신 발코니에서 푸르른 녹음을 바라보며, 베이컨과 치즈를 양껏 올린 호밀빵에 카페라테로 유럽 감성을 잡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부어스트(Wurst,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한 잔에 하루의 피로를 씻어 내고자 했던 우리의 낭만은 이렇게 좌초되는 듯했다.

▲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던 에어비앤비의 발코니(좌) / 발코니에서 모닝커피를 즐기는 호스트 커플과 마감 중인 나(우)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 나는 상단에 기재된 체크인 체크아웃 시간만 보고 나머지는 읽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에어비앤비 예약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아에게 미처 숙소 이용 규칙을 숙지하지 못한 채 덥석 예약부터 해버린 나의 과오를 사과했다. 단 한 번도 비건의 삶을 살아본 적도, 관심을 가진 적조차 없는 고기 애호가지만, 그들과 함께 이 집에 머무는 동안만은 비건으로 지내보기로 결심했다.

 

나처럼 몰랐다고 딴소리하는 게스트 때문에 애먼 호스트들의 맘고생이 심했겠다고 추측해본다. 숙소 예약 전에는 반드시 그 숙소의 이용규칙을 꼼꼼히 체크함으로써 서로 얼굴 붉힐 일을 사전에 방지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여행의 팁 하나를 얻었다.




비건식 홈 다이닝에 도전!

남편이 먼저 호스트 커플에게 함께 홈다이닝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우리에게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비건식으로 어떻게 메뉴를 구상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향을 대표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로 하며 함께 집 근처 대형 마트인 카우프란트(Kaufland)로 장을 보러 갔다. 카우프란트에는 비건을 위한 섹션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제품군도 다양했다. 노아는 내게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와 비건 요거트를 골라주었는데, 비건식 대체제가 모두 기대 이상으로 맛있고 훌륭해서 감탄했다.


남편은 함께 장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순간부터가 요리의 시작이라고. 상대방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재료를 싫어하는지, 어떤 재료가 집에 있고 어떤 재료가 집에 없는지 등등의 디테일한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면서, 서로의 취향을 파악하고 친밀해지는 데 더 없이 좋다고 했다. 함께 재료를 고르며 대화하다 보니 각자 요리할 메뉴의 윤곽이 잡혔고, 각국의 가정식을 나누며 즐기기로 결정했다.




함께 나누고 즐긴 비건식 홈 다이닝

▲ 샥슈카의 핵심인 달걀 대신, 두부와 두유로 달걀 모양을 재현해냈고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이스라엘 출신인 노아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식 가정식 샥슈카(Egg in Hell, Shakshuka)와 후무스(Hummus) 만들어주었다. 노아와 스테파니는 베를린의 한식당에서는 비건 메뉴를 찾기 어려워서 단 한 번도 한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그들을 위해 한식을 준비했다.

▲ 막상 한국에서는 김치를 잘 안 먹었는데, 타지에서 다시 만난 김치가 어찌나 반갑던지!

제일 처음 만든 것은 김치이다. 남편은 젓갈 대신에 납작복숭아를 사용해 김치를 만들었다. 여행 전에 잠깐 배웠던 사찰음식에서 영감을 받아 레시피를 바꾸었다고 했다. 김치의 감칠맛이 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가볍고 산뜻한 맛이어서 아주 맛있었다.

▲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파전과 매콤한 두부조림

우리는 한식을 만들며 노아와 스테파니에게 몇 가지 한식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비 내리는 소리와 프라이팬에서 전을 부치는 소리가 비슷해서, 비가 내리는 날이면 파전에 막걸리를 먹는 문화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노아와 스테파니는 손뼉을 탁! 치면서 코리안 스타일 팬케이크의 향토적 스토리가 무척 흥미롭다고 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귀찮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리고 명절 이후 냉장고를 정리하고 싶을 때 종종 모든 재료를 한 보울에 담아 고추장에 비벼먹는다고 알려주었다. 나물을 하나하나 맛본 호스트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밥그릇에 나물을 담아 두부조림 국물을 휘이 두르더니 참기름 두 방울을 떨구곤 알차게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술 더해 김치를 턱턱 얹어서 큰 숟갈로 즐기는 모습에 남편은 아빠 미소를 금치 못했다.


또한, 남편은 비건인 노아와 스테파니를 위해 표고 오이 편수탕을 만들어주었다. 남편은 오후부터 만두를 정성껏 빚었는데, 그 고운 외양에 모두 탄복했다. 버섯과 오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인 줄 몰랐고, 고기 없이 두부와 채소만으로 풍부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단연코 최고의 메인 요리였다.

▲ 채소와 버섯 육수가 녹진하게 우러나 개운한 맛을 자아낸 표고 오이 편수탕

여러 문화중에 식문화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생활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만큼 가장 직관적이고 확실한 소통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음식에 대한 감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자국의 문화를 나누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따듯한 저녁이었다.




힙스터의 도시 베를린, 요즘 가장 힙한 비건 문화 

베를린에 사는 지인에게 에어비앤비 비건 하우스 입성에 대해 털어놓았다. 지인은 우리에게 베를린은 베지테리언과 비건에게는 천국이며, 그만큼 비건 문화가 발달해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부는 고기와 우유, 버터와 치즈 없이 무슨 맛을 내겠느냐며 비건 하우스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호스트인 노아의 추천으로 방문한 비건 레스토랑인 1990 비건 리빙(1990 Vegan Living)에 가서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게 되었다.


이후 노아가 추천해준 비건 식당 몇 곳을 더 방문했다. 비건 만둣집 모모스(Momos), 비건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쿠키 크림(Cookies Cream)까지, 비건 식당의 손님들은 거의 다 젊은 사람들이었고 메뉴 구성이 재미있었으며 음식도 아주 맛있었다.

▲ 맛이며 디테일이며 가격 모두 압권이었던 1990 비건 리빙(좌) / 아시안 퓨전 요리. 타파스 형식으로 가격이 저렴하다.(우)

베를린의 여느 힙하다는 카페나 식당, 마트마다 베지테리언과 비건 메뉴가 세심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베를린이 베지테리언과 비건에게 얼마나 상냥한 도시인지 알 수 있었다. 젊은 베를리너들의 삶 속에 비건 문화가 융화되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환경에 대해 생각을 해보다

우리가 베를린 곳곳에서 동물해방에 대한 문화를 접하고 인지하게 될 때 즈음, 한국에서는 돼지 열병이 돌면서 인간의 식육 문화를 위해 동물을 가축 하는 방식과 에너지 비효율성에 대한 문제점들이 제기되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Greta Thunberg) 유엔 연설이 전 세계인들을 감화시켰고,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프라이데이 포 퓨처 시위 현장 모습

마침 환경에너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호스트들은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라는 이름의 전 세계적인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위는 기후 변화 대응 행동을 촉구하는 각국 청소년들의 파업의 일환으로서, 기후 행동에 나선 세계 청소년들의 연대 모임이다. 최근에는 베를린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동참하여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후 변화가 현재 우리 삶에 얼마나 위험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축이 내뿜는 메탄가스와 가축 시설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지구온난화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호스트들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되었다.


프라이 데이 포 퓨처 시위에 다녀온  노아와 스테파니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를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환희에 찬 눈빛을 보니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신념을 모른 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들은 단순히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윤리적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더 나아가 기후변화와 환경을 위해 삶의 방식을 바꾼 것이었다.

▲ 시위에 들고 나갈 피켓을 제작 중인 스테파니

노아와 스테파니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전해준 것은 너무나 멋진 삶의 방식, 그리고 값진 신념이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궁리하고 나누는 것, 강요하지 않되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호스트들과 함께 지내며 보고 느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베를린 문화였다. 이 모든 경험은 베를린을 그저 ‘힙한도시'가 아니라 ‘진짜 힙한 사람들의 이색적인 도시’로 추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고 비건(Go Vegan)?   

고기 애호가이며 환경 운동에 무관심했던 우리가 갑자기 베지테리언이나 비건이 되긴 매우 어려울 것임을 잘 안다. 다만 그 심각성을 똑바로 인지하는 것, 행동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용기를 응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힘을 보태보려 한다.


당장 내가 바뀌기 싫다는 이유로 그들의 노력에 초를 치는 언행이나 행동은 삼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어차피 지구는 멸망할 건데 왜 그렇게들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둥, 나의 좁고 비관적인 생각을 쿨한 척 포장하여 냉소를 던지던, 저열하고 무지했던 시절의 나를 깊이 반성한다.

▲ 유럽에서 우유 대신 마셨던 오틀리

우리는 계속 고기와 달걀을 먹으며 여행하고 있다. 다만, 나는 베를린 이후부터 우유를 사지 않는다. 대신 노아가 알려준 두유와 오트 밀크를 마시고 있다. 아주 미미한 시작이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방법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고 천천히 내 삶의 태도를 바꿔보려 한다.




호스트와의 작별인사

▲ 그들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노아는 글썽거리며 행복해 했다.

다음에 베를린에 오면, 게스트가 아니라 친구로서 기꺼이 방을 내어주겠다며 언제든 연락하라는 따듯한 작별인사를 건네주었던 노아와 스테파니. 서로 손을 맞잡고 부끄러워하다가 까르르대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그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서 선물해주었다.

노아와 스테파니 덕분에 우리의 베를린은 더 이색적이고 특별했다. 함께 도란거리던 거실과 발코니에서 함께 마신 커피, 따스한 햇살을 마음에 담고 다음을 기약해본다.





에어비앤비 작가, 양세은

집시(ZIPCY)라는 예명으로 활동중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드로잉 강사. 현재는 요리를 사랑하는 남편과 1년의 기간을 잡고 창작을 위한 인풋 수집과 각국의 다양한 요리 문화 체험을 목표로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zip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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