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대신 몽땅 에어비앤비! 유럽 신혼여행기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결혼은 하나도 안 부러운데, 신행은 진짜 부럽다”
청첩장 모임의 인기 토픽 절대 1위는 단연 ‘신혼여행’이다. "우리 2주 동안 유럽으로 신혼여행 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이 커지면서 자신의 유럽 여행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태리에서 갔던 그 파스타집 정말 맛있는데", "프라하에 진짜 분위기 좋은 바가 있었는데 추천해줄까?", "스위스에서는 꼭 그린델발트에 숙소를 잡아야 해" 등.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한 우리는 여유로운 휴양보다는 더 많이 걷고, 움직이고, 경험하고, 보고 듣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신혼여행을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유럽이었다.
나는 유럽여행 경험이 전무했지만 신랑은 유럽을 3번이나 다녀온 나름 전문가(?)였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그의 주도 하에 열심히 루트와 스폿을 모아 여행계획서를 완성했다. 직업군인인 신랑의 계획표는 매우 철두철미한 편이어서 훗날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들에게 족보처럼 찔러주곤 했다. 청량하고 맑은 호수와 아기자기한 감성의 오스트리아, 신랑이 좋아하는 사람과 꼭 함께 가고 싶었다는 낭만적인 프라하, 친구들의 거짓말 같은 풍경사진을 보며 꼭 한번 가보겠다고 다짐해온 스위스까지. 그렇게 윤환과 은형의 14일간의 [오스트리아-프라하-스위스] 신혼여행이 시작됐다.
꼭 그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어쩌다 보니’ 신혼여행의 모든 숙박을 에어비앤비로 해결했다. 신혼여행이라고 하면 대부분 인스타그래머블한 고급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하기 쉽지만, 우리에게 숙박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숙박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면 맘에 드는 기념품을 하나 더 사고, 맛있는 맥주를 몇 잔이고 더 마실 수 있으니까!) 어디에서나 갈 수 있는 호텔보다는 그 지역만의 감성과 스토리가 듬뿍 담긴 공간이 더욱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에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마포에서 보낸 신혼 첫날밤부터 취리히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만난 호스트들의 공간을 내 집처럼 이용했다.
5/26 ~ 5/27 : 독일 뮌헨(Munich), Gerrit & Drik
5/27 ~ 5/29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 Timo
5/29 ~ 6/1 : 오스트리아 비엔나(Vienna), Sandra
6/1 ~ 6/3 : 체코 프라하(Prague), Tomas
6/3 ~ 6/7 : 스위스 인터라켄(Interlaken), Remo
6/7 ~ 6/8 : 스위스 취리히(Zurich), Jean
“Hello! I’m Gerrit’s husband!”
5월 26일, 루프트한자 항공을 타고 독일 뮌헨으로 유럽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가 독일에서 숙소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은 ‘위치'였다. 뮌헨에는 하루만 머물고 다음날에 바로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도심가에 있는 숙소를 원했다. 우리의 첫 숙소였던 게릿(Gerrit)의 에어비앤비는 중심가인 마리엔 광장(Marienplatz)과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는 호텔보다 찾기 어렵고 방도 작았지만, 접근성도 좋고 가격도 합리적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1박에 약 10만 원!) 입구를 찾지 못해 건물을 두 바퀴째 돌던 와중에 현관에서 그의 남편인 드릭(Drik)을 만났다. 친절한 안내 덕분에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우리가 예약한 개인실에 도착했다.
방에서 만난 게릿은 예상과는 달리 풍만한 배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남자 호스트였다. (2017년 독일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23번째 국가가 됐다.) 서로에게 남편인 부부인 줄도 모르고 당연히 그가 아내일 거라 예상한 나의 편견에 놀란 순간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방은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 옆에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포근하고 아늑했다. 예쁜 창문 덕분에 작은 방이 햇살로 가득 찼다. 따뜻한 분위기에 긴장됐던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다. 짐을 내려놓자 게릿은 뮌헨 지도를 펼쳐놓고 우리에게 이것저것 구경할 곳들과 맛집 등을 설명해주었다. 다정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냥해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의자와 테이블 사이에 낀 뱃살도 귀엽게 느껴졌다. 사랑스러운 그의 에어비앤비 덕분에 뮌헨에서 보낸 시간이 신혼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스트리아에 무려 5일을 있었는데, 날씨가 좋았던 건 마지막 날 단 하루뿐이었다. 비도 비였지만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돌아다니는 내내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자연경관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 숙소였던 티모(Timo)의 에어비앤비 상태가 가히 충격적이어서 이 곳을 직접 예약한 신랑이 매우 속상해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즐겁고 재미난 경험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비엔나로 옮겨가며 여행을 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렌터카를 이용했던 터라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넓고 고급진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잘츠부르크 에어비앤비의 호스트였던 티모는 젊은 아시아계 남자였다. 그는 우리가 예약한 이틀 중 첫날, 집에 일이 생겨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되었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을 척 예약해주고는 짐을 옮겨주고 유유히 떠났다. 그가 잡아준 호텔은 시설은 깨끗하고 훌륭했지만 세탁이 안 되는 곳이어서 비를 맞아 꿉꿉해진 옷을 빨지 못해 난감했다. 그래도 내일이면 넓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빨래도 하고 요리도 해먹을 생각에 불편함을 꾹 참고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티모의 아파트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뽀오얀 자태의 ‘귀염뽀짝’한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고양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우리에게 다가와 여기저기 몸을 비비고 애교를 부렸다.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졸 따라다니며 기웃거리고, 짐을 꺼내려고 펼쳐둔 캐리어에 뻔뻔하게 들어앉아서는 야옹거리기까지 했다.
귀여운 고양이와 한참을 놀고 나서야 어수선한 거실 상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티모는 깜찍한 고양이로 게스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집 상태가 아주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식탁에는 피다 남은 담배, 옷장에는 마음대로 구겨 넣은 옷, 바닥에는 누군가가 먹다 흘린 하리보 등. 전형적인 지저분한 남자 대학생 자취방의 모습이었다. 차에서 내려 걷고 걸어 비를 쫄딱 맞고 추위에 달달 떨면서 도착한 집이었는데, 침대 시트는 빨았는지, 수건은 깨끗한 건지 하나하나 의심이 가서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의 개인실은 심지어 나선형 계단을 올라 복층 위에 있는 방이어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락내리락해야만 했다. 딱 하루만 참고 얼른 비엔나로 가자고 신랑과 함께 몇 번을 다짐한 밤이었다.
그의 집을 탈출해 빈으로 가는 내내 제발 다음 에어비앤비는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기차에서 내리고 보니 날씨가 우중충했다. 동네도 그로테스크한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숙소로 가는 내내 조금씩 겁이 났다. 불안한 마음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 호스트 산드라(Sandra)를 만나자마자 절반으로 줄었다. 산드라는 금발에 쇼트커트 헤어가 무지 잘 어울리는 예쁜 언니였다. 산드라는 오늘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었다면서도 엘리베이터에 우리를 먼저 태워서 올려 보내고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3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아파트 전체를 빌린 건 처음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넓고 쾌적했다. 주방에는 귀여운 커피머신부터 요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오븐과 전자레인지가 있었고, 욕실에는 튼튼한 세탁기(+친절한 영어 설명서), 침실에는 센스 넘치는 다리미와 건조대까지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산드라는 집안 구석구석을 상냥하게 안내해주고 난 후 개인 연락처까지 알려주고 떠났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유럽에서 요리를 해 먹는 용기를 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챙겨 온 예쁜 옷들도 못 입고 잊을만하면 비가 내려 사진 찍기도 힘들었지만, 우리가 돌아갈 집이 있다는 생각에 든든하고 행복했다. 판도르프 아울렛(Designer Outlet Parndorf) 쉬는 날을 모르고 헛걸음을 했을 때도 “집 가서 넷플릭스나 보고 뒹굴거리지 뭐!”하고 쿨하게 집으로 향할 정도였다.
와, 지금 생각해도 토마스(Tomas)는 정말 최고의 호스트였다. 그는 역 앞으로 우리를 마중 나와 집까지 직접 데려다준 처음이자 마지막 호스트였다. 타지에서 곤경에 처한 우리를 위해 애써주기까지 했다. 프라하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금까지 다닌 곳들보다 치안이 안 좋을 수 있다는 신랑의 말에 괜히 긴장이 됐다. 에어비앤비를 구할 때도 큰 길가에 있고, 현관 보안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삼았다. 가방 끈을 꼭 붙잡고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나게 큰 키에 듬직해 보이는 토마스가 나타났다. 함께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내내 그는 동네에서 유명한 식당들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토마스 덕분에 그의 추천지 중 하나인 안델(ANDEL)에서 근사한 점심식사를 했다.
터프해 보였던 그의 첫인상과는 달리 그의 아파트는 올 화이트 인테리어에 세련된 느낌이 가득했다. 산드라의 아파트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이 곳 역시 세탁과 다림질을 할 수 있어 편리했다. 소파와 테이블도 놓여있어서 훨씬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넓은 창과 밝은 색 커튼도 마음에 쏙 들었다.
기분 좋은 체크인(+맑은 날씨) 덕분에 예약해두었던 웨딩 스냅 촬영을 무사히 즐겁게 마치고 프라하의 밤거리를 질리도록 걸었다. 신랑의 손을 잡고 까를교를 건너는 내내 지금 이 순간이 다 거짓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체코에서는 모든 끼니마다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맛이 진하고 거품이 풍성한 맥주는 여행의 풍요로움을 더해주었다. 우 트리 로지(U Tří růží)에서 맛본 흑맥주가 인생 맥주가 되었다. 꼭 다시 먹으러 올 거다.
그렇게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 같았던 프라하의 이틀 차, 신랑이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사진을 찍으려 핸드폰을 벤치에 내려놓은 사이 누군가가 집어간 듯했다. 독일을 제외하고 모든 여행 사진을 내 휴대폰으로 찍어와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여러 중요한 메모와 여행 계획표, 직업 특성상 카톡방에서 전파받아야 할 주요 내용 등. 즐거운 여행 와중에 모든 걸 한꺼번에 잃어버려 멘붕이었다. 여행 내내 나보다 몇 배로 모든 걸 꼼꼼히 챙겨 온 신랑은 더욱 속상해했다. 되는대로 일단 급히 통신사에 분실신고를 하고 전에 들어두었던 여행자 보험 필요 서류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현지 경찰서에서 폴리스 리포트를 받아와야 한단다.
보험 처리 때문에 경찰서는 반드시 가야했는데, 체코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고. 바디랭귀지와 어설픈 영어로 리포트를 받을 수 있을지, 동양인 관광객이라고 괜히 갔다가 인종차별만 겪지는 않을지 걱정이 태산같이 솟구칠 때쯤 토마스가 생각났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 그는 우리가 겨우 영어로 정리해서 보낸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체코어로 번역해주었다. 다음 날 토마스는 오전에 일이 있어 함께 경찰서에 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자신도 그랬던 경험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잘 안다며 놀란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경찰서에 리포트를 내러 가야 해서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체크아웃하게 되어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만, 토마스는 우리에게 정말 고맙고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소중한 기억이다. 그의 도움에 힘입어, 감사하게도 친절한 중개인(경찰에게 우리 사건을 체코어로 설명해주는 사람)을 만나 장장 3시간에 거쳐 무사히 리포트를 받을 수 있었다.
취리히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버스가 지나는 위치의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우리의 마지막 호스트였던 진(Jean)은 사실 나를 조금 화나게 했다. 약속한 체크인 시간이 되어 아파트에 도착했는데, 감감무소식에 아무런 안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첫인상이 퍽 별로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어서 3층까지 헉헉대며 도착해 벨을 눌렀더니 낯선 백인 커플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그들 역시 진의 집에 머무는 게스트였고,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현관에 어색하게 서서 호스트의 연락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어쩌다보니호스트 가 되어 빈 방과 욕실, 화장실을 소개해준 착한 친구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진에게 온 에어비앤비 메시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연락이 없었고 그의 룸메이트가 대신 메시지를 보냈었다.) 룸메이트가 우리의 체크인 시간을 착각했다며, 자신 때문에 우리가 허니문을 망쳤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사과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읽고 부스스한 얼굴로 첫인사를 했더니, 그는 거듭 사과를 하며 수줍게 밀카(Milka) 초콜릿을 선물로 내밀었다. 자신도 지난주에 허니문을 다녀왔다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 그를 보는 내내 내가 괜히 감정이 앞서서 쉽게 화를 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후에 그는 숙박비에서 일부 금액을 환불해주었다.)
진은 레고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버스 시간에 맞춰 체크아웃을 기다리며 집안 곳곳을 돌아보니 레고로 된 소품이 가득했다. 체크아웃 할 때도 본인 대신 현관에 놓인 월 E 레고에 열쇠를 넣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귀여운 레고 안에 집 열쇠를 쏙 집어넣는 것으로 우리는 재미나고 특별하게 마지막 체크아웃을 했다.
#어쩌다보니에어비앤비 덕분에 에어비앤비가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특별한 신혼여행을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생각해보니 더욱 그렇다. 관광객이 북적거려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던 할슈타트에서의 시간보다, 유튜버에 빙의해 판도르프 아울렛 쇼핑 언박싱 영상을 찍으며 신랑과 깔깔댔던 집에서의 기억이 훨씬 행복하다.
에어비앤비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낯선 여행지에서 숙소가 아닌 ‘집’이 생겼다.
곤경에 처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친구’를 얻었다.
친구가 소개해 준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주방에서 복작복작 요리를 했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과 여행이 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스물일곱, 스물여덟의 우리를 조금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준 최고의 신혼여행이었다.
2019년 5월 결혼한 새신부이자 초보 여행작가. 광고대행사 AE로 일하며 갈고닦은 기획력을 에어비앤비 기록에 쏟아부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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