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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Dec 09. 2019

영화 속 피렌체와 시에나에서 발견한 낭만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서


낭만의 불씨를 지피러 이탈리아로!

회색빛 우중충한 날들이었다. 여느 대한민국의 학생처럼, 고등학생 때는 대학 입시를 바라보며,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직과 진로의 기로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렇게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방향성 없이 무작정 달려온 24살의 나는, 더 이상 어디를 향해 뛰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기대감 없이 눈을 뜨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계적으로 해내면서, 그 중간중간에 ‘마지막으로 가슴이 뛰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하는 회의감이 들어 서글퍼지곤 했다.


그러던 중 마침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친구가 잠시 일상을 떠나 자신과 함께 낭만의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도무지 타오르지 않던 마음의 불씨가 ‘낭만 여행’이라는 말에 반짝하고 빛났다. 그 길로 바로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아직 설레고 두근대야 할 나의 청춘이기에, 식어버린 불꽃을 되살려보고자 낭만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우리의 낭만 여행지는 길거리만 걸어도 사랑을 꿈꾸게 될 것 같은 낭만의 나라 이탈리아였다.

▲ 여행길의 첫 출발지인 공항은 언제와도 신이 난다.



낭만 여행 Rule #1. 영화 속 그곳으로

나와 친구 모두 이탈리아 여행은 두 번째였다. 둘 다 가족들과 함께 온 패키지여행에서 이탈리아를 들린 적이 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봐야 하는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감흥을 즐길 틈이 전혀 없었다. 그때 아쉬움이 많았던 만큼,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깊게,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또한, ‘낭만’이 넘치는, 지친 마음에 설렘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한 여행이 되길 바랐다.

▲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와 <레터스 투 줄리엣>의 촬영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우리는 ‘영화 속 이탈리아의 낭만 장소’를 여행 테마로 잡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시작으로 수많은 로맨틱한 이야기들이 펼쳐진 이탈리아이기에, 영화 배경이 된 도시가 많다. 때로는 운명적 만남이 이뤄지기도, 때로는 가슴 아픈 이별의 배경이기도 했을 그 장소들을 방문해 그들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된 도시 피렌체(Firenze)와 <레터스 투 줄리엣(Leters to Juliet)>의 배경이 된 도시인 시에나(Sienna)로 향했다.




낭만 여행 Rule #2. 여유롭게, 또 즉흥적으로!

흔히들 여행은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하는데, 많은 장소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려고 하면, 단조롭고 지루했던 마음은 충전될지 몰라도 몸은 녹초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일정의 시작과 끝이 너무 가깝지 않고, 하루에 한 장소 이상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또한, 낭만 여행인 만큼, 계획과 일정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여정 속에서 그만의 매력과 낭만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는 ‘즉흥적이지만 열정적인’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우리의 여행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숙소 역시 매우 중요했다. 즉흥적이고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유동적인 체크인, 체크아웃이 필요했다. 또한, 피렌체를 거점으로 시에나에 다녀오고자 했기에, 짐만 남겨둔 채 숙소를 비워도 안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피곤한 날이면 푹 자고 일어나 오후 늦게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고, 늦은 밤까지 숙소에서 관련 영화를 보고자 했기에 늦은 아침이나 야심한 밤에 간단히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다. 뿐만 아니라 때는 무더운 8월이었기에 에어컨이 빵빵하고, 땀에 젖은 옷을 빨 수 있는 세탁기도 구비된 곳을 선호했다. 따라서 모든 게 즉흥적일지라도, 숙소만은 이러한 조건을 충분히 고려해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낭만 도시 #1. 피렌체

피렌체 두오모는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고들 말한다. 피렌체가 그러한 상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내 서른 번째 생일날 나와 함께 올라와주겠니?’라는 여주인공 아오이의 독백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로 시작된 주인공들의 엇갈리고 가슴 절절한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우리 역시 그 떨림을 느껴보고자, 우리의 첫 번째 낭만 여행 장소를 피렌체로 결정했다.


첫날 아침 일찍 피렌체에 도착한 우리는 예약해둔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첫 이탈리아 여행을 했을 때에는 산타 마리아 델피 오레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등이 모여 있는 아르노 강(Arno River) 위쪽만 보고 떠났기에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르노 강 아래쪽에 있는 실비아(Sylvia)의 아파트에 머물기로 했다. 우선 아르노 강 위쪽보다 가격이 저렴했고, 기차역에서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짐을 옮기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크인이 가능한 오후 2시보다 이른 시간에 에어비앤비에 도착하게 되자 당황했다. 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호스트인 실비아에게 짐을 맡겨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실비아가 흔쾌히 짐을 두고 가라고 해서 에어비앤비에 짐을 놓고 두 손 가볍게 외출할 수 있었다.


실비아의 아파트는 낭만 여행에 들뜬 우리를 더욱 두근거리게 했다. 에어비앤비는 좁지만 한적한 골목에 있었는데, 골목이 온통 노란색 벽인데다가 곳곳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 중 한 대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가 세워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번잡한 거리에 위치하지도 않고, 현지인들이 사는 아파트여서 그런지 제대로 피렌체에 살아보는 느낌을 받았다.

▲ <열정과 냉정 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가 나타날 것만 같았던 실비아의 아파트가 위치한 골목 풍경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 실비아는 ‘아직 청소 중이라 미안하다’며 오히려 우리에게 사과했다. 당연히 체크인 시간 한참 전이라 우리가 미안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친절한 실비아의 말에 놀랐고, 또 꼼꼼하게 청소하는 모습에 놀랐다. 여러 사람이 묵는 곳이기에 위생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싱크대와 화장실 구석구석을 쓸고 닦을 뿐만 아니라 쿠션 시트와 화장실 물품까지 교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놀란 이유는 실비아의 집 곳곳에 숨겨진 공간들 때문이었다.

▲ 우리가 머물렀던 에어비앤비의 첫인상

처음 봤을 땐 침대와 주방이 보이지 않아서 당황했다. ‘숙소 예약 시 옵션을 체크할 때에는 에어컨, 세탁기, 주방과 2인용 침대가 있는 숙소였는데….’라고 생각했을 때쯤, 실비아가 우리 집의 비밀을 보여주겠다며 소파 쪽 선반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짠하고 침대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옷장인 줄만 알았던 가구 문을 열자 싱크대도 짠하고 나타났다. 나무로 된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유럽식 돌바닥에 깔끔한 흰 벽지로 꾸며진 숙소는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아기자기하고 비밀을 숨기고 있는 실비아의 아파트는, 낭만과 실용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우리가 딱 찾던 아파트였다.

▲ '짠'하고 나타난 침대와 부엌

비밀스러운 숙소 탐험을 마치고, 우리는 본격적인 피렌체 구경에 나섰다. 고대 예술품을 복원하는 공방에서 일했던 준세이의 땀과 노력을 느껴보고자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을 방문했는데, 왜 피렌체가 예술품의 도시, 복원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장엄하고 방대한 그림과 조각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피렌체에 머무는 며칠 동안은 구체적인 계획 없이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어 다녔다. 피렌체 시내는 좁고 비슷한 골목 여러 개가 모여 있어서 길을 헤매기도 했는데, 미로 찾기 같은 재미가 있었다. 피렌체의 수많은 장소들 중에서도, 내가 찾은 나만의 낭만 스폿 몇 곳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피렌체의 낭만 스폿 #1-1. 레푸블리카 광장

피렌체에서 발견한 첫 번째 낭만 스폿은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이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유럽의 광장 같지만 그 가운데에 회전목마가 있어 독특했다. 사실 피렌체 두오모는 아름답기야 두말할 것 없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낭만이나 감흥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나에겐 레푸블리카 광장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전목마가 한눈에 보이는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 질리(Caffè Gilli)에서의 광경이 훨씬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피렌체에서 다양한 디저트와 거의 유일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카페 질리의 야외석은 항상 만석이다. 그러나 안쪽 실내석은 한적해서 여유로웠다. 유리창 밖으로는 회전목마가 있고, 거리의 악사들이 행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북적이는 화려함 속의 평화로움이, 유리창으로 분절된 나와 사람들 사이의 적당한 거리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레푸블리카 광장과 회전목마가 <냉정과 열정 사이>에 등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꼭 준세와 아오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연인들이 이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에서 두 손을 맞잡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 레푸블리카 광장 한편에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있다.



피렌체의 낭만 스폿 #1-2. 미켈란젤로 광장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낸 낭만 스폿은 해가 저물어 어둑해질 무렵의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이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던 날은 친구가 아파서 늦게까지 잠을 잤던 날이다. 저녁쯤이 되니 친구가 밖에 나갈 수 있다고 해서, 밤의 피렌체를 즐겨보고자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미켈란젤로 광장은 굽이 굽이 경사를 올라야 하는 곳으로, 강 위쪽의 피렌체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올라가 보니 <냉정과 열정 사이>의 포스터 배경 장소 바로 이곳인 것 같았다. 어둠으로 뒤덮인 피렌체 시내 역시 그 로맨틱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대 위 주인공들처럼 금빛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건물들과 거리를 밝히는 조명들이, 어둠에 잠긴 아르노 강에 비쳐 야경을 수놓았다.

▲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두오모 모습(좌) / ▲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모습(우)

그렇게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낭만적인 야경을 감상한 뒤 숙소로 돌아오니 그냥 잠들기에는 아쉬웠다. 오늘 하루 동안의 이 여운을 곱씹고자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자기 전에 복습하기로 했고, 영화 감상과 함께 허기진 배도 채울 겸 피자를 사려고 숙소 근처 골목의 피자집 중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꽤나 북적이는 펍이었는데, 주문한 피자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자 바텐더가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와인 두 잔을 서비스로 줬다. 피렌체의 낭만 효과인지, 미소가 매혹적인 바텐더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마신 와인이 이탈리아에서 마신 가장 맛있는 와인으로 기억된다.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낭만적이었던 우리의 야경 투어는 그렇게 한 판의 따끈한 피자, 영화와 함께 저물었다.

▲ 에어비앤비로 돌아와 피자를 먹으며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복습했다.



낭만 도시 #2. 시에나

우리의 다음 낭만 여행지는 피렌체 근교 소도시인 시에나였다. 시에나는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의 배경 도시 중 하나이다.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중세 이탈리아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 낭만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 노을이 지는 토스카나 평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와이너리나 농가에서 묵는 로망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운전 경험이 없는 나와 친구 중 누군가 이탈리아에서 운전을 한다면,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토스카나 평원 여행은 단념해야 했다. 평원 드라이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실비아의 아파트에서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시에나로 향했다.

▲ 실비아의 아파트에서 만들어 먹은 아침 식사. 전날 먹다 남은 피자도 데워 먹었다.

시에나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피렌체가 대도시여서 비교된 것도 있겠지만, 뜨겁지 않고 맑은 날씨 때문인지 유달리 더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가장 먼저 우리는 매년 경마 대회가 열리는 캄포 광장(Piazza del Campo)으로 갔다. 캄포 광장은 ‘조개껍데기’라는 별명처럼, 만자의 탑을 중심으로 넓은 부채꼴과 원형의 광장이다. 따사로운 캄포 광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젤라또를 먹으며 삼삼오오 쉬고 있었는데, 젤라토 덕후인 우리는 가장 큼직하고 맛있어 보이는 젤라토를 들고 앉아 따뜻한 햇살과 여유를 즐겼다.

▲ 캄포 광장 가장 자리에 있는 만지아의 탑(Torre del Mangia)의 모습 (좌) / ▲ 캄포 광장에서는 젤라토를 먹으며 쉬었다.(우)

실제 <레터스 투 줄리엣>의 주인공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는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 쪽이다. 정확히 시에나 대성당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 앞 젤라토 가게가 그 배경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결혼 전 이탈리아에 신혼여행을 온 주인공 소피가 줄리엣의 집에서 한 편지에 답장을 하게 되고, 그 편지를 쓴 할머니와 할머니의 손자가 소피와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비록 소피는 할머니를 처음 만났지만, 50년 전 첫사랑을 잊지 못해 영국에서 이탈리아까지 온 할머니의 이야기에 감동해 할머니의 첫사랑 로렌조를 함께 찾다가 시에나까지 오게 된다.


물론 우리에게는 50년 전 첫사랑과 같은 오래된 사연은 없지만, 우리도 낭만을 찾아 즉흥적으로 떠나왔다는 점에서 조금은 소피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연히 만난 할머니의 잘생긴 손자’와 같은 친구도 만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잘 통하고 의지하는 서로가 있었기에 주인공들보다 몇 배 더 낭만적인 시에나를 감상할 수 있었다.

▲ 시에나 대성당의 오묘한 색감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었다.

긴 계단을 올라 시에나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걱정과 복잡한 감정들을 씻어 내려주는 듯했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시에나 대성당의 색은 정말 오묘하다. 분홍과 하늘색이 섞인 파스텔톤 같으면서도 금빛 노을을 받아 부드러운 크림 빛이 감도는 색감. 피렌체에서 봤던 피렌체 두오모와 닮았는데, 훨씬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피렌체에선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시에나에 오기 전, 시에나가 작은 도시여서 볼거리가 없으면 어떡하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시에나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즉흥적으로 들어갔던 음식점에서는 시에나에서 최초로 만들어 먹었다는 피치(Pici) 파스타와 하우스 와인을 맛볼 수 있었고, 다리가 아파 들렀던 카페에서는 진하고 풍미 좋은 에스프레소와 달콤 상큼한 유자 카놀리(Cannoli)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서서히 해가 질 때 즈음엔 벽돌로 둘러싸인 도시 전체가 붉은 주홍빛으로 물들었고, 새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도시의 주황빛이 마치 엽서 속에 있는 듯했다. 도무지 낭만에 빠지지 않을 수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였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면 단연코 시에나를 추천해줄 것이다.

▲ 시에나에서 먹기 시작했다는 피치 파스타(우) / 카페 나니니(Nanini)에서 맛본 부드러운 에스프레소와 유자 카놀리(우)
▲ 주황빛으로 물든 엽서 가게

그렇게 시에나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피렌체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에 겨우 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피곤해진 몸을 버스 창문에 기대고 있었는데, 출발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숨을 턱 멎게 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바로 토스카나 평원의 석양빛이었다. 비록 버스 창문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무슨 색이라고 설명해야 그 오묘한 아름다움을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 얇은 층층의 분홍, 연보라, 빨강, 남색의 빛깔들이 어두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경이로움에 처음엔 감탄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을 죽기 전에 볼 수 있다는 감사함까지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출발할 땐 각자 일행과 나누는 대화로 웅성거리던 버스 안이, 토스카나의 석양을 마주한 뒤로는 각자의 감상에 젖어 적막이 맴돌았다.

▲ 시에나를 떠나며 바라본 석양



낭만 여행을 마무리하며

사실 우리의 낭만 여행은 이탈리아를, 낭만을 제대로 보고 즐기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피렌체와 시에나는 아마도 나에게 영영 잊지 못할 도시로 남을 것 같다. 낭만을 찾아 떠난 여행이어서 그런 걸까? 넉넉하고 여유로운 일정 때문에 그런 걸까? 그 어떤 여행보다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감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던 것 같다.


꼭 연인과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쉼표가 주는 여유, 그 여유가 주는 낭만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을 치열하게 살다 보면 또 숨이 막히거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아름다웠던 이곳들을 떠올리며 잠시 동안 여유를 가져보려고 한다. 나처럼 정신없는 세상에 치여 피폐해진 누구든, 꼭 한 번 피렌체로, 시에나로 떠나 여유가 주는 낭만을 느껴보기를 권해주고 싶다.




에어비앤비 작가, 류예지

글로써 감정과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수많은 색다른 경험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래서 글이 절로 술술 써지는 여행을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한 만남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라 틈틈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고 한다. 현재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서 대학 졸업 이후 정치외교학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penca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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