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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Jan 20. 2020

루마니아에서 한 달 살기

모든 여행에는 계획하지 않은 목적지가 있다


어쩌다 세계일주


"남편아, 사는게 재미가 없다."

"그럼 우리 세계 여행이나 갈래?"

"그래!"


우리 부부는 13개월간의 세계 여행을 떠났다. 매일 왕복 3시간 걸리는 출퇴근에 지쳐가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가볍게 던진 나의 말을 무겁게 받은 아내가 다음 날부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당황할 기색을 표할 수도 없이 아내는 이전에 미처 본 적 없는 생기를 띠고 있었다. 늘 그렇듯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출발일을 정했다. 처음부터 13개월이라는 기간은 정한 건 아니었다. 서로 가고 싶은 나라를 나열하고 대략적인 루트와 머물 시일을 대충 채우다 보니 1년은 걸리겠다 싶었다. 우리는 출발 전에 최소한의 기간을 정하는데 만족했다. 출발 일을 정하고 나서는 늘 퇴근하고 잠들기 전 계속해서 서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진짜 가?"


그때만해도 우리가 떠날지는 불분명했지만, 분명한 점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걱정과 고민은 ‘우리 진짜 가?’라는 물음 앞에 사라졌다. 그리고 심장이 뛰었다. 아이를 가질까 고민하는 시기였지만, 대책 없이 우리의 미래와 출산을 뒤로 미뤄버렸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는 일을 그만두고,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왕복 3시간의 출퇴근보다 더 치열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 우리는 가장 먼저 배낭을 샀다. 그리고 세계 지도를 벽에 붙였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여행은 생각보다 더 피곤하다는 것이다. 치열했던 출퇴근, 만성피로에 시달려도 주말에는 놀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그때의 삶보다 더 피곤했다. 특히나 장황한 계획을 세워가며, 체크 리스트까지 만들어 가며 다녔던 동남아시아에서는 1년이라는 여행 기간을 우리가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유발한 결과였다. 여행 초반 의욕과다로 인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아마추어 여행자의 성장통이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 보니 초반에는 다툼도 잦았다. '이러다 집에 혼자 돌아가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 서로 그 기운을 느꼈는지 싸움이 잦아들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다. 여행지마다 익숙한 피로감이 몰려들었고, 3개월 차에 접어들자 슬럼프가 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많은 나라를 가는 것보다 우리가 좋은 곳에 머물며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여행이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최대한 많은 나라를 가고자 했던 미련스러운 목표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13개월의 시간은 우리 부부에게 반짝반짝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내가 가 본 산 중 가장 높은 산은 히말라야가 되었고, 재혼이나 해야 가볼 것 같았던 몰디브도 다녀왔다. 인도에서는 장염으로 20kg이 빠졌고, 연애 포함 여덟해를 같이 보낸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 대해 전혀 다르게 알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지 않지만 가족 같은 친구들이 생겼다.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이것을 끝으로 난 등산과 이별했다. 우리는 평생 오를 계단을 다 올랐다.
▲ 재혼하지 않는 이상 갈 일 없을 줄 알았던 몰디브에서 한 컷.

"여행을 우리의 일상처럼 휴일을 만들자!"


슬럼프를 겪고 나니 우리의 여행에도 휴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여행을 일처럼 하던 우리는, 여행을 여행 그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 숙소에서 쉬어가기도 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병가를 내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호스트와 죽이 잘 맞는 에어비앤비에서는 호스트와 함께 하루 종일 밥을 해 먹고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




루마니아에서 한 달 살기


4월의 뜨거운 동남아를 돌고 네팔, 인도, 몰디브, 스리랑카를 지나 두바이에 도착했다. 또 다시 만난 더위에 결국 중동을 패스하고 우리는 재빨리 유럽으로 가는 제일 싼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곳이 루마니아(Romania)의 부쿠레슈티(Bucharest)였다. 그렇게 우리는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두바이에서 가장 싼 유럽행 티켓이고, 물가가 싼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갔다. 어쩐지 메모도 사진도 많이 남기지 않은 곳이 루마니아였다. 여행을 다녀 온지 몇 년이 지나 기억이 흐릿 해진 곳도 많다. 그럴 때는 여행 중 남긴 사진과 메모를 보고 기억을 반추하기도 한다. 루마니아처럼 별 기록이 없는 곳은 우리가 그곳에서 진정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여행이 즐거우면 사진 찍기도 귀찮고 일기도 안 쓰게 되더라.




호스트와 함께 나눈 여행


우리는 숙소를 예약할 때 보통 호스트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것이 호스트에게 귀찮을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호스트와 예상하지 못한 인연으로 이어지거나,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을 만나게 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환상적인 장소를 알게 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그런 일은 루마니아에서 많이 벌어졌다. 호스트들과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 곳이 루마니아였다. 차가울 것 같았던 동유럽의 루마니아 사람들은 말을 트면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어떤 계획도 없이 왔던 이곳에서 우리는 여러 도시를 돌며 30일을 넘게 보냈다.


루마니아의 첫 도시 부쿠레슈티의 첫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마리아(Maria)는 우리의 루마니아에 대한 첫인상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새벽 3시 공항에 도착하는 우리를 위해 마리아는 새벽 4시에 체크인을 해줬다. 사실 어찌 보면 1박을 더해준 셈이다. 마리아는 우리의 공항 도착 시간을 묻더니, 조금의 망설임 없이 자기는 친구들이랑 놀고 있겠다며 부담 갖지 말고 에어비앤비로 오라고 했다.


우리는 새벽 4시가 다 되어서 마리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적막한 새벽의 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차갑고 어두운 동유럽의 으스스함이 느껴졌다. 마리아의 아파트는 번화가도 아니었고, 바사라브(Basarab) 역 근처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1970년대에 지은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수동으로 문을 열고 닫아야 했다. 삐걱대는 철문이 닫히자 오래된 기계음을 내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나와 아내는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해 몸을 움츠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조심스레 문을 두들기자 문이 열렸다.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화면이 변하듯, 차갑고 어두운 시멘트 복도의 철문이 열리자 마리아와 친구들이 우리를 따스히 맞이해주었다. 새벽 4시임에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마냥 신난 여고생들처럼 마리아와 친구들은 연신 깔깔대며 자기소개를 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집을 비워주면서 집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마치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 부쿠레슈티 호스트 마리아의 집. (좌) / 마리아가 처음 우리를 위해 채워놓았던 냉장고와 비슷하게 다시 채워 넣고 나왔다. (우)

"너희들을 위해 준비했어. 마음껏 루마니아를 즐기고 가."


우리 방의 냉장고는 가득 채워져 있었다. 먹다 남은 치즈와 빵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정감이 들어 좋았다. 우리는 일주일간 부쿠레슈티 곳곳을 돌며, 마리아가 채워둔 냉장고를 바닥까지 비웠다. 그리고는 마리아의 취향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다시 가득 냉장고를 채워 놓았다.


일주일간의 부쿠레슈티는 우리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독재자 니콜라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의 인민궁전(Parliament Palace)도 어두웠던 과거를 묻은 채 아름답게 보였다. 헤러스트러우 공원(Herăstrău Park)에서는 오랜만에 한가로움도 즐겼다.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은 립스카니 거리(Strada Lipscani)를 거닐 때면 왠지 모를 감당 못할 낭만도 느껴졌다.

▲ 독재자 니콜라 차우셰스쿠는 고대하던 인민궁전이 완공되기 전에 처형당했다. 
▲ 과거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은 아름다운 립스카니 거리의 입구.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루마니아에 왔던 우리는, 부쿠레슈티 일정이 끝나갈 때쯤 또다시 마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리아, 근처에 다른 도시 추천 좀 해줘!"


마리아는 시나이아(Sinaia)를 추천했다.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마리아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했지만, 여러 가지로 고맙다는 메모를 남기고 부큐레슈티 북역으로 향했다.

▲ 우리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었던 왕족의 여름 휴가지 펠리슈 성.

루마니아의 보물 1호 답게 펠레슈 성(Peleș Castle)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유럽의 수많은 성을 보고 나면 나중에는 감흥이 떨어지는데, 펠레슈 성은 정말 아름다웠다. 시나이아는 아름다운 산세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로,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어비앤비가 위치한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우리 부부를 본 호스트 폴(Pual) 아저씨는 시나이아 자랑에 열을 올렸다. 짐을 풀고 한숨을 돌리자 그제야 시나이아의 전경이 보였다. 아름다운 산세에 조금은 낡았지만 아름다운 양철 지붕의 집들이 아름다웠다.

▲ 에어비앤비를 고를 때 경치가 좋다는 것만 보고 선택했는데,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다. (좌) / 낡은 양철 지붕이 멋스러웠다. (우)  

시나이아에서는 이틀을 보내고, 아름다운 중세 도시로 알려진 브라쇼브(Brasov)로 향했다. 다행히도 역으로 가는 긴 내리막길까지 폴 아저씨가 태워다주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브라쇼브는 큰 도시로, 사람도 많고 활기가 느껴졌다. 올드 타운의 중앙 광장에는 수많은 아웃도어 브랜드가 있는데, 그 이유는 브라쇼브의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들 때문이었다.


브라쇼브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모니카(Monica) 아줌마는 만나지 못했지만, 브라쇼브의 정보를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다양한 트래킹 코스, 검은 성당(Biserica Neagră Brașov)의 오르간 공연,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 등 다양한 정보 중 가장 유익했던 정보는 맛집 비밀 통로였다. 그 골목만 지나면 브라쇼브의 근사한 레스토랑들이 펼쳐졌다.

▲ 맛집 비밀 통로는 KFC 근처에 위치한다. (좌) / 맛집 비밀 통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레스토랑의 음식들. (우)

거칠지만 환상적인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다양한 트레킹 코스는 저질 체력으로 너무 힘들었던 히말라야 등반의 후유증으로 인해 볼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브라쇼브는 미식의 도시로 남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템파 산 전망대(Telecabina tampa)로 만족하고 내려왔다.

▲ 케이블카를 타고 브라쇼브 전망대에 오르면 구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브라쇼브 폭식 여행을 마치고 다음 여정으로 이동한 곳은 정말 딱 한가지만 보고 간 시기쇼아라(Sighisoara)였다. 드라큘라의 고향이라는 사실만 알고 루마니아에 왔는데, 그래도 드라큘라 생가는 갔다 오자는 본전 생각에 방문했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중세적 멋짐이 넘치는 도시였다.

▲ 드라큘라 생가. (좌) / 중세 시대로 온 것 같은 시기쇼아라의 올드 타운. (우)

드라큘라의 주인공이었던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 왕이 태어난 생가는 좀 썰렁했지만, 올드 타운은 중세 도시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옛 그대로의 정취를 풍겼다. 사실 시기쇼아라는 에어비앤비에서 손주 마르코를 키우는 미하이 할아버지와 카리나 할머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두 분 다 우리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말로, 미하이 할아버지는 루마니아어로 이야기했다. 호스트의 역할은 도시에 있는 딸이 대신해주었다. 왠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화가 통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지막 날 운전하는 시늉을 하면 뭐라고 하시길래,


"네. 저도 한국에서 운전해요."


하고 들어왔는데, 딸이 보내온 메시지에는 할아버지가 내일 역까지 태워준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듣는 기분이라던 나의 말을 꼬투리를 잡고 깔깔댔다. 며칠간 수없이 나눴던 대화가 허무해지는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참 감사했다.

▲ 나만큼 수다스러운 미하이 할아버지

우리는 동쪽의 클루지나포카(Cluj-Napoca)로 향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온 우리를 보고 부쿠레슈티의 호스트인 마리아는 우리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 공간 2위(지금도 1위는 어디인지 모르겠다)인 투르다 소금광산(Salina Turda)에 데려다주었다. 마리아는 우리를 데려다주고는 자기는 트레킹을 간다며 쿨하게 떠났다. 우리를 두고 간 마리아가 생각 안 날만큼 투르다 소금 광산은 환상적이었다.

▲ 과거 소금 광산이었던 곳을 개발했다. 간단한 구기 운동부터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클루지나포카에서는 다음 도시 시비우(Sibiu)로 가는 길은 카풀 서비스인 블라블라카(Blablacar)를 이용했다. 이 역시 마리아가 알려준 것인데, 기차보다 저렴하고 시간도 단축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루마니아의 마지막 도시 시비우로 떠났다.




시비우, 멜린다와 루시앙


시비우에서 우리는 멜린다(Melinda)와 루시앙(Lucian)을 만났다. 이들로 인해 '여행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할 수 있었다. 시비우의 에어비앤비 호스트 멜린다는 친절하게도 터미널까지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다. 보통은 처음 보자마자 여러 정보를 주고받는데, 멜린다는 우리의 루마니아 여행이 어땠고 밥은 먹었는지를 먼저 물었다. 처음 만난 낯섦이 아닌 특유의 편안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10여 분을 걸어 멜린다와 루시앙의 집에 도착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집안은 무척 아늑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걸을 때 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내가 무거워서라며 눈치를 주던 아내에게 멜렌다는 루시앙이 걸을 때도 항상 소리가 난다고 했다. 만나기 전이었지만 나는 루시앙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묶을 곳은 멜린다와 루시앙의 아들이 사용하던 방이었다. 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방을 보니 왠지 편안했다. 아들은 학교 때문에 타지에 있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멜린다는 우리에게 루마니아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어봤다. 그리고는 함께 시장에 가자고 했다.


아무런 계획이 없던 우리는 멜린다를 따라나섰다. 멜린다는 우리에게 루마니아 음식을 대접하겠다며, 집 근처의 재래시장인 시빈 마켓(Cibin Market)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멜린다의 단골 가게의 상점 주인들이 우리에게 시식을 권했다. 동양인인 우리가 음식을 맛보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서로 음식을 권유하는 통에 배가 불렀다.

▲ 시비우의 재래시장인 시빈 마켓.

그렇게 우리의 환영 만찬을 만들 재료들이 두 손 가득 채워졌다. 멜린다와 함께 장을 보니 거리감이 줄어 있었다. 멜린다는 그래도 여행 첫날인데, 시비우를 구경해야 한다며 일부러 구도심을 걸쳐 돌아서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시비우 특유의 창문이 우리를 호기심 가득히 쳐다봤다. '게으른 눈' 또는 '감시자의 눈'이라고 불리는 시비우 특유의 건축 양식은 사실 건물 위에 건조된 곡물 창고의 공간인데, 창문 모양이 이 도시를 이렇게도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 시비우에는 수많은 감시자의 눈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

손에 감각이 없어질 때쯤 멜린다의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멜린다와 루시앙의 세 아이들 사진이 널려있었는데, 그 사진들을 구경하다 보니 그 가족과 가까워진 것 같았다. 집안 구경을 하는 동안 멜린다의 남편 루시앙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웃음이 터졌다. 루시앙은 이유를 눈치챈 듯 나를 가르키며 친근하게 웃었다.


"너도? 이 바닥은 100kg가 넘으면 소리가 나."

▲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루시앙과 멜린다.

루시앙은 잭 블랙을 닮은 외모와 유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난 것처럼 함께 재료를 손질하고 접시를 나르며 저녁 준비를 했다. 뭔가 편안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시비우에서 보낸 며칠의 시간 동안 우리는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시답지 않은 대화로 하루를 보내고, 함께 시장에 가고, 오후에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밤이 깊어지면 차를 타고 빛이 없는 곳으로 가 은하수를 만났다.

▲ 핸드폰만 가지고 나가 사진이 좀 아쉽지만, 우리는 환상적인 은하수를 봤다.

시계가 밤 12시를 가리키고 잠이 들려는 타이밍이었지만, 루시앙에게 이끌려 나온 우리는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은하수를 봤다. 멜린다와 루시앙은 누구보다 여행을 좋아했던 부부였다. 세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그리고 맞벌이로 그들이 포기하게 된 여행을 여행자를 통해서 나누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여행은 당분간 이렇게 하기로 했어."

"그래서 너희들이 특별해 우리에게 나눠줄 여행이 많잖아."


멋진 말이었다. 여행을 나눈다는 말이 좋았다. 피자 한쪽도, 고기 한 조각도 나누지 않는 내가 그 말이 좋다고 하니 아내는 어이없어했지만, 먹는 게 아니니 얼마든지 나누어줄 마음이 있었다. 시비우에서의 며칠이 정말 빨리 지나갔다. 마지막 날 밤에 되자 루시앙과 멜린다가 말했다.


"너희들이 이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뭉클했다. 아내의 눈도 촉촉해졌다. 몇 초간의 침묵엔 따뜻함이 가득했다. 그런 따뜻함이 어색한 나는 재빨리 시비우 집값 시세를 물었다. 루시앙이 구체적으로 집값을 알려주는 통에 멜린다의 핀잔이 이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날도 수다스럽게 지났다. 얼마나 수다를 떨었는지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보내려 누우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왠지 이별도 전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우리는 한 게 별로 없지만 시비우는 아름답고 볼 게 많은 도시다. 일 년 내내 다양한 축제가 펼쳐지고 아름다운 16세기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대광장의 시의회 탑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가면 오크네이 거리(Strada Ocnei) 위로 아름다운 철교가 있다. 그 위에서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하여 ‘거짓말쟁이의 다리(The Bridge of Lies)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곳이다.

▲ 거짓말을 하면 무너져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는 구도심의 거짓말쟁이 다리.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관광지들은 사진을 봐야 기억이 난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계속해서 여러 관광지를 가게 되고 장기 여행의 특성상 그 수많은 관광지들의 특별함을 인식하고 감동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너무 얄팍하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었지? 뭐가 유명한거였지?"


오히려 베드 버그로 잠을 설쳤던 숙소, 이발보다 얼굴 마사지를 더 오래 하던 이발소, 아내와 심하게 다툰 침대 기차, 음식이 정말 입에 안 맞았던 어느 식당, 현지어를 몰라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갔다가 혼났던 일, 트레킹에서 만나 몇 달을 함께한 인연들, 길거리에서 사 먹은 주전부리들, 에어비앤비에서 나눈 호스트와의 싱거운 농담 등등. 그런 작은 조각들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사소한 일상의 그리움


여행을 마치고 2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여행 중에 있었던 사소한 여행의 일상들이 그립다. 여전히 지도를 펴놓고 아직 가본 적 없는 곳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뛴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다. 여행이 우리 인생의 엄청난 인생의 변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기대와는 다르게 사소한 생각들의 변화를 야기할 뿐이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각자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행이 가져온 변화가 우리 삶의 미묘한 파급력을 가지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사랑한다.


우리가 진정 여행을 하게 된 건, 어쩌면 시끌벅적하고 바쁜 도시 한가운데서 마음이 공허해 지거나 답답해질 때, 수많은 사람들과 여행을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한 번씩 꺼내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얼마 전 우리 부부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서우에게도 일상 같은 사소하고 소소한 여행을 나누어 주길 기대해본다.

▲ 대다수의 사진들은 관광지들의 사진이었다. 그땐 몰랐다. 이런 우리의 일상이 훨씬 더 그리워질것을….




에어비앤비 작가, 손일준

무언가를 찍고, 무언가를 쓰고, 무언가를 만든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혹한다. 부록 같은 가벼운 인생을 지향하지만, 난치병인 비만을 극복 못하여 무겁게 살아내고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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