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식물, 바다의 도시를 찾고 있다면 이곳으로
밝은 빛깔의 나뭇결이 있는 싱크대 찬장, 내 눈높이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해가 저문 뒤 하나둘 불이 켜져가는 포지타노(Positano)의 풍경 사진이 붙어 있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멋쩍지만 그래도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에 드는 사진을 몇 장 골라 엽서로 인쇄해서 주변에 나눠주곤 하는데 포지타노의 풍경이 담긴 이 엽서는 2014년 가을에 찍어서 인쇄해두었던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부엌에 제일 처음으로 붙인 사진이고, 낮에서 밤으로 가는 아름다운 시간이 담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난 여행의 기억이 마음속 깊숙이에서부터 여전히 잔잔하게 퍼져온다.
나는 여행지를 선택할 때 항상 노트북 모니터에 구글 지도를 띄워놓고 어디에 갈지 살펴본다. 그해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날씨가 너무 쌀쌀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일정에 맞춰 비행기표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었다. 배낭을 메고 도시를 몇 군데 옮겨 다니는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피렌체(Firenze)를 시작으로 아시시(Assisi), 포지타노 그리고 로마(Roma)까지 보름간 돌아보기로 순식간에 결정하고 비행기와 기차, 숙소를 후다닥 예약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인 포지타노에서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려고 한다.
포지타노는 10월에도 충분히 따뜻하고,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동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은 곳을 찾다 보니 결정하게 된 곳이었다. 가보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 내가 여행했던 10월 초 무렵 기온이 19~25도 사이로 정말 쾌적했다. 날씨에 따라 여행의 분위기도 크게 좌우되는데 누군가가 포지타노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30도를 훨씬 웃도는 여름보다는 10월에 가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그때도 충분히 바다 수영이 가능하고 한국보다 따뜻하니까. 여름에 여름 나라를 가는 것보다는 훨씬 매력적이지 않은가!
피렌체, 아시시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포지타노로 향하는 길. 아침 일찍 출발해 기차 두어 번, 버스도 몇 번 갈아타면서 한참을 갔다. 포지타노로 들어가는 버스에서는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 멀미가 너무 심하게 나서 두 번은 못 오겠다 하면서도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아기자기한 마을과 파란 바다가 빚어내는 새로운 풍경에 감탄했다. 먼 곳을 여행하다 보면 낯선 지역에서도 왠지 비슷한 느낌을 가진 한국의 소도시들이 떠오르게 되는데,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rio),레브롱(Leblon)이나 하와이(Hawaii) 와이키키(Waikiki)의 해변은 내게 부산 해운대를 떠오르게 했고, 포지타노와 아말피(Amalfi)는 통영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우면서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멀미와 감탄을 번갈아 하며 버스로 먼 길을 올라가 산 중턱 어딘가에 내렸다. 집이라고는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전혀 없었고, 깎아놓은 듯한 절벽 바위에 거짓말처럼 초인종만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사기를 당한 건 아니겠지?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 있나? 손가락 끝까지 뻗치는 의구심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작동이 될지조차 의심스러웠던 작은 초인종 너머로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곧 네모나고 작은 도르래가 내려왔다. ‘저걸 타고 올라가야 하는 건가’ 또 한 번의 의구심이 고개를 드는 순간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환하게 웃으며 스쿠터를 타고 내려왔다. 다행히 우리가 도르래에 타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짐만 실어 올려 보내는 용도였다.
가방을 보내고 10분쯤 걸었을까. 반딧불이처럼 알알이 귀여운 전구들이 매달린 좁은 오솔길로 들어가다 보니 드디어 에어비앤비 숙소가 보인다. 조금 전의 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초록색으로 칠해진 창문이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돌담 저택이 나타났다. 호스트를 따라 안내받은 방에서 나는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에어비앤비 웹사이트에서 예약할 때 묵을 숙소의 사진을 보고 온 것이긴 하지만)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의 풍경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그 순간의 기쁨이란! 그저 감격스러울 수밖에. 멀미도, 초인종의 충격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저, 정말 정말로 좋았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
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즐길 수 있는 저녁을 이미 예약해두었다. 그곳에 묵는 사람들끼리 한 식탁에 둘러앉아 호스트가 직접 키우는 유기농 재료들을 베이스로 해서 만든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다. 긴긴 저녁 식사 동안 우리 옆에는 독일의 중년 부부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은 한국 클라이밍 선수 김자인의 팬이었고, 이곳에서는 주로 트래킹을 하며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최근 나는 여행과 휴식의 의미를 한동안 생각했다. 분명 모든 여행이 휴식은 아니다. 특히나 유명 관광지만 도장 찍듯 콩콩 도는 식의 패키지여행은 오히려 극기 훈련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있고, 언어의 제약에서 자유로우니 그것은 패키지여행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겠다. 보통은 나도 한곳에 가서 그 지역만 충분히 즐기고 오는 편인데 이번 이탈리아 남부 여행은 한곳에서 3, 4일 정도만 머무르고 이동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열흘을 머문다는 그 부부가 왠지 부러웠다. 같은 지역을 가더라도 사람마다 각자 깊이가 다른 여행을 하겠지.
포지타노에서 머물던 며칠 동안 산 중턱에서 저 아래 해변까지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했던가! 지중해를 앞에 둔 그 비탈길과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내려오는 찰나마다 짙게 훅- 하고 다가오던 무화과 향기는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것 같다. 야생의 무화과 향을 맡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향이라 평소에도 무화과 향수를 쓰고, 가을에 접어들 때쯤이면 늘 챙겨서 사 먹곤 했는데 나무에 달린 무화과는 이런 향을 내는구나 싶었다. 향수보다도 더 진한 향이었다.
호스트는 아침 식사로 집 근처에서 직접 딴 과일들을 비롯해 갓 구운 빵과 케이크를 내주었고, 식탁 위에는 항상 무화과가 있었다. 내가 알던 검붉은 보랏빛 과일이 아니고 풋사과처럼 싱그러운 연둣빛 열매였다. ‘덜 익은 맛이 날까?’ 하고 입에 넣었을 때 퍼져오는 전에 모르던 달콤함이란.
그렇게 선선한 테라스에서 풍요로운 아침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으면 키우는 고양이인지 놀러 오는 고양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이곳이 익숙한 듯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귀여운 녀석들이 다가와 다리를 휘감곤 했다. 이미 사람 손을 타버려서 낯도 가리지 않고 연일 애교를 부리는 야옹이들과 같이 놀아주다가, 경치를 감상하다가, 끄적끄적 드로잉을 한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즐기는 여유는 내가 여행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는 평소에 걷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포지타노는 그런 내 취향에도 딱 맞았다. 무화과, 석류, 협죽도, 선인장, 올리브, 레몬, 부겐빌레아, 도토리. 내 지식으로 식별 가능한 수종을 비롯해 지중해의 태양빛을 머금은 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 사이로 한산한 산비탈을 걷다 보면 계단에, 지붕 위에, 현관 앞에 어디든 누워 자는 고양이와 개들이 참 많았다.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것을 보니 너희들도 한량이로구나.
걸어서 해변까지 내려오는 데는 한 시간쯤 걸리던가?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길을 잘못 든다 해도 언제든 좋은 산책이 되었다. 언덕 위 집들의 문 옆 번지수가 모두 예쁜 그림의 타일로 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상의 작은 낭만이 느껴진달까. 집주인들은 이 타일을 고를 때 무엇을 기준으로 두었을까. 이걸 붙일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적한 산에서와는 달리 해변가로 내려오면 제법 관광지 시내의 느낌이 난다. 여느 관광지나 그렇듯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고, 이곳에는 특히 레몬으로 만든 특산품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반가웠던 것은 레몬이 그려진 숫자 타일. 그렇잖아도 해변으로 내려오는 길 집집이 붙여놓은 타일들이 예뻐 보였는데, 이렇게 발견했으니 안 살 수가 없지!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포지타노에서 산 그 숫자 타일을 집 현관문 옆에 붙였는데, 어느 날엔가 경비 아저씨 두 분이 보시고 “이런 건 어디서 사나?”, “다이소 가면 다 팔아”라고 주거니 받거니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하하! 지금도 문 옆에 잘 붙어 있는 추억의 포지타노 전리품이로다.
그렇게 소소한 쇼핑을 즐기며 상점들을 둘러보고, 젤라토를 사 먹으며 당이 떨어지기도 전에 보충해주고, 이탈리아에 온 여행자답게 와인과 파스타를 실컷 먹고, 짭조름한 바다에 몸을 담가보고, 수평선 너머로 아름다운 석양을 보았다. 매일을 그렇게 보낸다면 그것 역시 특별히 기억할 만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리겠지? 열심히 일하고 가끔은 이렇게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꿈 같은 일상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그것이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하루는 배를 타고 아말피 해변에 다녀오기도 했고, 매일 청량한 풍경에 감탄하며 가을의 포지타노를 만끽했다. 어느 곳에 가도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나 식당이 없어 좋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내가 묵었던 숙소였다. 이 여행에서 나는 에어비앤비를 처음 이용했고, 수녀원 기숙사에서 묵었던 아시시를 제외한 세 도시에서는 모두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했다. 대략의 위치와, 사진, 후기 들을 꼼꼼히 보고 결정했는데 정말 완벽할 정도로 세 군데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국내외 어디든 여행을 떠날 때는 호텔뿐 아니라 에어비앤비도 꼭 살펴보고 숙소를 정한다.
포지타노에서 머물던 집은 한 팀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Feel Like Home’을 모토로 자코모, 마르코, 파스콸레 3형제가 운영하는 곳으로, 모두 테라스가 있는 바다 전망의 방이 여섯 개쯤 있고, 어느 식당보다도 훌륭한 식사와 어느 전망대보다도 훌륭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종종 이용하고 있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 넘버원, 투로 남아 있는 곳이다. 사실 이곳이 계속 넘버원이었으나 최근 남프랑스 생쥘리앵(Saint-Julien)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 숙소가 막상막하 1, 2순위로 등극하였다.
포지타노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로마로 떠나기 위해 산속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나올 때도 대관령, 미시령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굽이굽이 커브 길을 통과하며 과연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멀미를 또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멀미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언제라도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지나고 나면 늘 좋은 기억만이 크게 남는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도 좋지만 다녀와서 돌아보는 시간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다녀온 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가는 포지타노, 그때 그 시절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기억을 되살려 여행을 추억해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등 뒤로 고무나무, 협죽도, 레몬, 선인장, 올리브가 있다. 모두 내가 키우고 있는 화분들이다. 참, 무화과나무도. 실내에서 키우니 아무래도 비실비실하지만 그래도 무척 정성을 들여 가꾸고 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새에 지중해의 나무들을 그리워해서 곁에 두고 있었나 보다. 지금 보니 놀랍네.
무화과 향을 실컷 맡고, 겹겹이 피어 있던 협죽도에 반했던 여행의 추억은 그림이 되어 남았다. 다녀와서 그렸던 몇몇 그림 중 하나는 나의 자그마한 침실 한편에 걸려 있다. 그림 속 고양이의 미소처럼 나도 미소 짓게 되는 그림이다. 오늘도 자기 전 바라봐야지.
: 화가. 모던 민화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시작. 개인 작업과 더불어 설화수, 이마트, 정관장 등 커머셜 작업도 활발히 하고 있다.
홈페이지_ www.seoha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