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가 여행의 목적이 되는 시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집이라는 공간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진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부터 였을까. 50대 중반에 이른 엄마는 요 몇 년 부쩍 집을 답답해했다. 사람 네 명에 강아지, 고양이까지 총 여섯 식구가 복작거리는 집에서 종일 지낸다는 건 생각보다 답답한 일이었겠거니 겪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겨울이 되면 으레 그랬듯 엄마는 김장과 할아버지 제사를 앞두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령 엄마의 노동력이 그러했다. 나의 친할아버지 제사에 엄마의 노고가 들어가는 것이 어째서 당연한 일이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없었고, 그저 뒷짐을 지고 넘어가는 수밖에. 엄마가 큰집에 가기 며칠 전이었다. TV에 아주 예쁜 제주도 게스트하우스가 소개되고 있었다. MC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여행 가서만큼은 근사한 곳에서 살아보고 싶잖아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엄마를 보고 나는 발칙한 생각을 했다. 생각에 살을 입히기 위해 나는 곧장 항공권을 알아보았고, 사이판, 괌, 말레이시아를 후보로 에어비앤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에어비앤비가 눈이 돌아갈 만큼 마음에 들었다. 바로 엄마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여기 어때?”
“와! 이런데 한번 살아보고 싶다.”
“엄마! 할아버지 제사 끝나고 우리 둘이 놀러 가 버릴까?”
“그래! 근데 거기 유명한 게 뭔데?”
“나도 몰라! 엄마 쿨병이라고 있거든? 엄청 쿨해지는 거야! 옷 없으면 가서 사고, 할 거 없으면 그냥 자고 수영하고 그런 거 말이야~ 우리 쿨병 걸린 거처럼 가버리자!”
일상에서의 해방구가 필요했던 갱년기와 취준기 모녀의 여행은 이렇게 cool하게 기획되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우리는 두 군데의 에어비앤비를 경험했다. 그중 우리가 먼저 지낸 곳은 캄풍 바루(kampong Baru)에 위치한 말레이시아 젊은 부부의 집이었다. 샤키르&라티파 부부의 집에는 ‘플러스’ 배지가 달려있다. 호텔에 5성급이 있다면 에어비앤비에는 ‘플러스’가 있는데, 플러스 배지는 평점 4.8 이상에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해야만 받을 수 있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에 수영장이 두 개나 있는 샤키르의 집을 빌리는 건 당연히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착했다. 누구한테 뺏길세라 보자마자 당장 예약했다. 무려 평점 4.99에 달하는 숙소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호스트들 만나면 ‘헬로~ 나이스 투 미츄~’ 하면 되지?”
부부를 만나기 전 엄마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고급 아파트인 탓에 숙소의 경비는 아주 삼엄했다. 샤키르에게 미리 전해받은 QR코드를 가드들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삼엄한 분위기에 얼어붙은 엄마는 샤키르 부부가 나타났을 때 그만 준비한 멘트를 뱉지 못하고 수줍게 웃고 말았다.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현관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Welcome Kim’이라고 적힌 환영문구가 우리를 반겼다.
“엄마! 이것 봐! Kim 환영한대~!”
엄마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하긴, 엄마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 뒤에 감춰져 있던 날들이 얼마나 오래일까?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에게 내 이름을 불리며 환영받는다는 게 엄마에겐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경험이지 않았을까?
밤에는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인 트윈타워의 화려함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아침엔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 럭셔리한 아파트 밑에는 아주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별안간 이 동네가 궁금해져서 호스트 샤키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샤키르, 말레이시아는 빈부격차가 심해?”
그는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답변해주었다.
“앞에 있는 작은 주택가 때문에 그런가 본데, 그 땅의 가치는 수억 링깃 이상이야.(1링깃=약 300원) 다만 주민들이 정부에 팔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야.”
알고 보니, 캄풍 바루는 1900년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말레이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120년의 역사를 지닌 동네였다. 땅값이 매우 비싼 부촌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동네 산책을 하곤 했는데 처음 동네를 탐방할 때 엄마가 한 말이 참 웃겼다.
“엄마 얼굴에 뭐 묻은 거 아니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고 웃네.”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였다. 우리가 길가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면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고 가던 길을 멈춰 기다려주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은 클락션을 울리는 일도 없었다. 캄풍 바루에서의 시간만 천천히 흘러가는 듯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이 동네는 고양이도 여유롭다. 길 한복판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이방인에게도 경계 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주민들이 집 마당에서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의 집 마당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을 거시더니 손녀 셋을 데리고 대문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옆 상점에서 밥 먹고 있는 청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 아닌가. 꼭 트윈타워를 배경으로 찍어 달라고 당부하시면서 포즈는 브이로 하라고 정해주기까지 하셨다. 이 조용한 현지인의 동네에 한국인 모녀의 등장은 신선한 이슈였던 모양이다.
처음엔 대가 없는 미소와 애정 어린 시선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래,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잘 보이려 애쓰고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돼. 네가 못나서가 아니야. 우리 모두 여유가 없었던 거야.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이 건넨 미소가 그동안 나를 결박해 왔던 뭉근한 짓누름에 답을 주었다. 이 순박하고 여유로운 동네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따스했다.
해외에 나가면 이상한 자신감이 생긴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떠냐며 과감한 수영복도 입을 용기가 솟는다. 더운 나라니까 가슴이 시원하게 파진 수영복을 챙겼는데 아뿔싸! 이곳은 호텔이 아니라 현지인이 사는 아파트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히잡을 쓰고 수영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문화충격받은 건 차치하고 그 사이에서 까꿍 내민 내 가슴 반쪽은 괜히 움츠러들었다. 할 줄 아는 수영이라고는 배영뿐인데 둥둥 떠다니는 허연 살덩이가 괜히 민망스러운지 몸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그때, 저기 한 소녀가 아빠와 깔깔거리며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영 보조 킥판과 큰 튜브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워서 머뭇거리다 아이 아빠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아주 잠시만 이 킥판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때만 해도 아주 잠시가 두 시간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킥판을 계기로 소녀와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소녀의 이름은 재스민,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는 12살의 무슬림 친구였다. 아빠로 보인 남자는 사촌오빠로, 쟈스민의 보모 역할을 하는 아르바이트 중이라고 했다. 쟈스민은 외동이라 말동무를 만난 것이 무척 반가웠는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특히, 엄마를 보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며 자신의 튜브를 양보하기까지 했다. 할머니라는 말에 잠시 당황하던 엄마는 쟈스민의 ‘I love your 옴니’ 소리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말레이어로 엄마를 옴니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우리는 쟈스민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이 살잖아, 어때? 평화롭니?”
“응. 우린 평화로워. 학교에서 영어도 배우고 우리는 서로 대화해.”
하지만 말레이시아 사람은 중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나의 질문에 쟈스민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답했다.
“우리 엄마는 이번 대통령을 싫어해. 전 대통령은 좋았는데 이번 대통령은 다른 민족만 편애해. 우리는 안중에도 없어. 그러니까 자꾸만 차이니즈와 아프리카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 우리 동네도 아랍인과 아프리카 사람이 너무 많아졌어. 아프리카 사람은 술을 진탕 마시고 금목걸이를 차고는 으스대며 다녀.”
쟈스민은 금목걸이를 하고 썬베드에 누워있는 아프리카 사람을 고갯짓 하며 입을 삐쭉 내밀어 보였다. 쟈스민의 말을 듣고 말레이시아 정치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말레이시아는 61년간 여당이 통치해왔고 ‘부미푸트라(Bumiputera)’라고 불리는 말레이계 및 무슬림 우대정책으로 무슬림이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에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부미푸트라 정책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에 많은 무슬림이 불만스러워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수영장에 발만 담그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무슬림 친구로 인해 어쩌다 말레이시아에 대해 깊이 알아버렸다.
엄마가 에어비앤비에서 가장 좋아한 것은 바로 창가에 위치한 바 테이블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 비가 오는 날이면 마루에 배를 깔고서 비 오는 걸 구경했다고 한다. 빗방울이 장독대를 두드리는 소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사랑했던 소녀는 장성한 자녀를 둔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엔 한참 동안 창 밖을 바라보곤 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한 손에 커피 잔이 들려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에겐 오랜 버킷리스트가 있다. 바로, 방을 카페처럼 꾸미고 창가에는 화룡점정으로 바 테이블을 배치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집안에 ‘오롯이 엄마만의 공간’은 없었다. 엄마에겐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음을 그제야 느꼈다. 그런데 마침, 우리 에어비앤비에 엄마가 그리도 소망하던 바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통 유리인 창 옆에 말이다! 그곳에 앉으면 캄풍 바루 마을부터 저 너머의 빌딩 숲, 끝없이 펼쳐진 하늘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엄마의 아침은 항상 그곳에서 시작됐다. 기도를 하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이 참으로 평온해서 나는 커피 향이 짙게 밴 늦잠을 자곤 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지면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24시간 푸드코트에 갔다. 대학 건물 1층에 위치해 있어서 많은 학생 및 현지인이 이용하는 곳이었고 가격은 정말 저렴했다. 비싸야 3000원가량이었는데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다.
말레이시아 사람은 거의 다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푸드코트 대부분의 직원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우리가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 직원은 괜히 분주한 척을 했다. 마치 원어민 선생님 수업 때, 눈이 마주치면 말 시킬까 봐 필기하는 척했던 짠한 과거가 떠올랐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근처에 있던 종업원 두 분과 단어 한 두 개 정도로 야매 의사소통을 했으나 메뉴를 몰라서 주문할 수가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인상 좋은 아저씨가 해맑게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다 싶은 두 종업원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바쁜 척을 했다. 아저씨는 아예 영어를 하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에겐 무적의 메뉴판이 있었다. 그저 음식 사진을 턱턱 가리키면 그만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가 방문하면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자연스레 아저씨가 한국인 모녀의 전담 서버가 된 셈이었다.
다들 마른 가운데 유독 혼자만 큰 배를 이고 있던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배뽈아저씨라고 별명 지었다. 배가 뽈록 나와서 그렇다는 건 우리만의 비밀이다. 배뽈아저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자랑했다. 누구라도 한번 보면 마음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빠를 닮은 올챙이 배가 익숙했는지 닫혀 있던 엄마 입에서 땡큐 소리가 절로 나왔다. "헬로. 땡큐. 바이" 우리가 아저씨와 나눈 대화는 하루에 고작 단어 세 개뿐이었지만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낯선 동네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고 돌아왔다.
우리는 조용한 마을을 떠나서 빌딩 숲 한가운데에 있는 두 번째 에어비앤비로 이동했다. 오늘은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니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호스트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았다. 기왕이면 동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알렌의 집이 딱 조건에 맞았다. 알렌의 집은 방이 많아서 우리 말고 두 팀을 더 수용할 수 있었다. 호스트와 다른 게스트들, 거기다 동물들까지! 이보다 더 색다른 경험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완전히 적중했다.
“난 중국인인데 괜찮겠어?
말레이시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하다고 말했더니 알렌은 자신이 중국인인데 괜찮겠냐고 되물었다. 여러 민족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어서 ‘멜팅팟’ 이리고 불리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이미 무슬림 소녀 재스민의 표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안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권의 80% 이상을 휘어잡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라고 한다. 19세기 말 중국은 대기근을 앓았다. 살기 어려워진 중국인은 집단적으로 탈주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말레이시아는 좋은 선택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많은 중국인이 광부, 사탕수수 노동자 등 단순 노동자로 들어왔다고 한다. 경제에 밝은 중국인은 말레이시아가 독립할 때 한 자리씩 제대로 차지했다. 그때 그들은 여전히 말레이시아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그래서 말레이 민족은 중국계를 돈만 밝히는 요물쯤으로 생각하고 중국계는 말레이 민족을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공존하며 사는 법은 배웠지만 완전한 융화가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 듣고 보니 확실이 알렌이 중국계라는 표가 났다. 집 곳곳에 불교 장식이 되어 있어서 샤키르의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30대 청년이 이렇게 좋은 집에 사는 거 보면 중국계 말레이시안이 부자는 부자인가 봐.’ 엄마와 나는 속닥거렸다.
알렌의 집은 klcc지역과 부킷 빈탕(Bukit Bintang) 지역을 보도로 오갈 수 있는 환상적인 위치였다. klcc 지역은 관광객이라면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PETRONAS Twin Towers) 사진을 찍기 위해 꼭 들르는 곳이다. 고급 호텔들과 고층 빌딩들로 인해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지금도 끊임없이 높은 빌딩들이 지어지고 있는데 그 구조가 굉장히 독특하다. 동일한 디자인의 건물은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개성 있는 빌딩들이 생겨난 덕분이다. 부킷 빈탕은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대형 쇼핑몰들과 야시장이 있다. 저렴한 마사지 샵도 포진해 있어서 여행 분위기를 십분 즐길 수 있다.
관광지 한복판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에어비앤비 집이었다. 구경하다가도 ‘집이 제일 재미있네.’ 소리를 버릇처럼 뱉곤 했다. 바로 알렌의 사랑스러운 여섯 반려동물들 덕분이었다. 알렌은 푸들 세 마리,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았는데, 여섯 친구들은 아주 예의 바르고 사랑스러웠다. 언제 봤다고 달려와서 배를 내놓고 환영해주는지 행복이 별건가 싶었다. 특히, 그중에서 우리는 유일한 암컷 고양이 ‘소피’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알렌의 집에 도착한 후 짐을 풀고 있는데 소피가 슬그머니 들어와서는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냄새를 킁킁 맡더니만 이내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 집 고양이도 안 해주는 꾹꾹이를 해주었다. ‘우리 구면이니..?’
아침이 되면 고양이 세 마리가 문을 열어달라고 앞발로 문을 톡톡 두드렸다. 부리나케 문을 열어주면 한 마리씩 방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이마를 비비며 해주는 아침인사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알렌의 집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사랑스럽게 시작됐다. 특히 소피는 우리가 나갈 때까지 뒹굴뒹굴 침대를 차지하곤 했다. 소피가 대장인지, 다른 친구들이 들어오면 ‘이 닝겐들은 내 꺼다옹’ 하는 눈빛으로 다 쫓아내고 우리를 독점했다. 소피와 함께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서 쿠알라룸푸르를 언제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대도 셋이 함께 하늘을 바라보던 그 평화로운 시간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방이 시끄러워졌다. 글쎄 엄마가 그새 옆방 중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옆방 친구들이 다 우리 방에 몰려와 소피와 함께 놀고 있었다. 내성적인 엄마가 말도 안 통하는 중국인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는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26년 간 보아 온 엄마가 낯설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먼저 옆방 친구들 불렀어?”
“응. 여기 소피 있다고, 와서 보라고 했지!”
“엄마 말레이시아에 몇 달 살면 영어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우겠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여기 와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나도 엄마 덕분에 자연스레 옆 방 게스트들과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눴다. 양쪽 다 짧은 영어 실력 탓에 “언제 왔어요? ”이후에 멋쩍은 웃음으로 허공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제시카가 방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영어를 못하는 제시카가 여행을 간다니 걱정이 된 남편이 번역기를 사줬다는데 고것 참 기깔난다. 제값 톡톡히 하는 번역기 덕분에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아침에 헬로를 하고서 말문이 막히면 제시카는 번역기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번역기 칭찬을 하루에 두 번 이상 했다. 번역기 사진을 찍어가니까 뒷면도 찍으라고 내밀어준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문제없겠다.
‘엄마 우리도 다음에 저거 사서 갈까? 하하하’
친구들은 쓰촨, 판다의 고향에서 왔는데 이 친구들의 여행법은 우리와 달랐다. 처음엔 둘이 외출 후에 따로 들어오길래 싸운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서로 개인 시간을 존중했던 것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고 한 명은 쇼핑을 하고 한 명은 집에 와서 낮잠을 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저녁에는 같이 저녁을 먹고 밤에는 함께 중국 드라마를 봤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들의 여행 스타일을 구경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유튜브의 매력에 폭 빠지셨다. 특히 예쁜 인테리어, 플레이팅, 미니멀리즘 영상 등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걸 보면 힐링이 되신 다나? 그래서 에어비앤비를 통해 다른 집은 어떻게 꾸며놓았는지, 어떤 소품을 쓰는지, 다른 집 살림 들여다보는걸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변기 솔까지도 관심 있게 보시니 말 다했다. 알렌의 집은 엄마에게 큰 영감을 준 모양이었다. 특히 알렌은 고양이들을 위한 방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그게 마음에 쏙 드셨는지 내게 선전포고를 하셨다. 한국에 돌아가면 창고에 있는 짐 싹 다 치우고 밤톨이 방으로 만들 테니 시일 내로 짐 빼라고 말이다.
엄마는 우리 방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라탄 소품에 반하셔서는 글쎄 ‘쿠알라룸푸르 라탄’이라고 네이버에 검색까지 해보셨다. 근방에 말레이시아 각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품, 민속 공예품 등을 파는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 Kuala Lumpr)에 라탄이 있다며 철저히 엄마의 주도 하에 센트럴 마켓에 가게 되었다.
센트럴 마켓은 1888년 영국인이 지었는데 당시에는 시민과 광부가 이용하던 재래시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는 걸로 보아 오히려 관광객이 더 모이는 관광지가 된 듯 보였다. 시장에 들어가 몇 걸음 걷자마자 자그마한 라탄 가게가 나왔다. 정말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며 ‘이 여행, 정말 잘 왔다’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라탄 사랑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근처에 라탄 배우기 수업을 찾았다. 항상 엄마가 활동적인 취미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본인이 좋아서 직접 움직이시는 걸 보니 덩달아 행복해졌다. 아직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나중에 라탄 공방을 차리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웃기지만, 갱년기를 씩씩하게 이겨낼 방법을 찾은 엄마가 멋져 보였다.
그저 도망치듯 보따리 하나 들고 떠났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배웠으며 간국을 헤쳐 나갈 힘을 얻어왔다. 여행은, 내 자존심이 헐벗은 찰나의 틈을 여실히 보여낸다. 그 순간 가장 민낯의 ‘나’와 마주하게 한다. 실은 이미 내 안에 있지만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만든다.
자꾸만 지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서, 미친 척 떠났던 우리의 여행.
묵은 마음을 비워내니 비로소 새로운 것들을 채울 공간이 생겨났다. 불만으로 일그러져있던 나를 아무런 경계 없이 품어주는 나라여서 참 고마웠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나를 더 아껴주기로 했다. 내 삶을 나만의 가치로서 향유하고 싶어 졌다. 애써 의미를 찾으려 들면 여행도 숙제가 된다. 삶에 쉼표가 필요할 때, 한 번쯤은 아무 계획 없이 떠나보길 바란다. 생각지도 못한 가치를 얻어올 테니.
16살엔 전 세계의 음식을 먹기 위해 세계여행을 하겠다고 말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포부만 컸던 소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다. 언제까지나 철들고 싶지 않다. 어떠한 모습이든 행복하게 살아가야지.
*인스타그램 @u__d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