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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Feb 03. 2020

매일 새로운 미술관에 갑니다

남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낭만을 따라 걷기


▲ 안녕 나의 눈부신 비행기!

2년 다닌 회사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꽤 오래 이어져온 고민이었지만 결정은 한순간이었다. 퇴사 준비와 여행 준비를 동시에 하며 마냥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답지 않게 회사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동료들은 잔뜩 불안해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너 없이도 어떻게든 굴러가게 돼있어. 이제부턴 니 걱정이나 해.”  그래, 회사는 내가 없어도 괜찮지만 내 인생에 내가 없어선 안 되지. 특정 다수에게 업무를 인계했고 무기한 자유를 인수받았다. 홀가분했다.


퇴사 후 처음으로 맞이한 평일 오전, 모두가 나른한 표정으로 사무실 자리를 지키고 있을 무렵. 거실에서 사이클을 돌리며 100만 원 남짓한 항공권 결제 문자를 받았다. 60일간의 여정이었다. 이렇게 긴 기간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질 파도와 싱그러운 꽃향기, 이국땅의 아침식사, 와인 한 잔, 낯선 이의 인사말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녀야지. 씩씩한 걸음걸이로.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가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레이오버로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니스로 향하는 작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기내 빈자리마다 햇살이 채워졌다. 두꺼운 플리스 재킷을 벗고 스포츠 샌들을 꺼내 신었다. 해수면에 드리운 비행기 그림자는 마치 유영하는 거대한 해양 동물처럼 보였다. 



미술관, 샌드위치, 성당


남프랑스로 여행지를 정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기 위해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 피에 드 포드(Saint Jean Pied de Port)로 가야 했는데 순례길 전후로 2주가량은 가까운 지역을 혼자 여행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프로방스 지역은 최적의 여행지였다. 


 하루에 미술관 한 개, 샌드위치 한 개, 성당 한 개. 스스로 정한 데일리 체크리스트였다. 저 세 가지를 경험하고 나면 그날의 계획과 일정은 끝이다. 요즘 한창인 ‘한 달 살기’는 나와 맞지 않는 여행 방식이었다. 난 그와 반대로 뚜벅뚜벅 하염없이 걷고 생각하다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휴전선을 따라 걷는 국토 대장정에 다녀왔으며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는 것이 20대의 버킷리스트였다. (내 여행 체질을 굳이 분류하자면 ‘도장 깨기’ 스타일이 아닐까?) 


자연스럽게 나의 프랑스 남부 여행도 머무는 도시마다 짧으면 하루, 길어봤자 3박인 여행으로 윤곽이 잡혔다. 매일 다른 풍경을 맞이하는 것이 즐거웠고 2주 동안 10개 남짓한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해변의 작은 마을들


더위를 피해서 바다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8월의 니스는 서울보다 기온이 높았다. 니스(Nice)는 정말 'nice'한데, 찌는 무더위와 더불어 시차 적응을 도통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피곤했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서라도 가장 먼저 바다를 보고 싶었다. 8.5kg의 배낭을 짊어진 나. 그리고 내 앞엔, 낮잠을 자다 깬 동물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 망막을 찢을 듯 강렬한 태양, 그리고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남 프랑스의 파도가 영화처럼 펼쳐졌다.

▲ 알록달록 빛나는 파라솔과 청명한 니스의 파도

첫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떠난 곳은 바로 샤갈 미술관(Musée national Marc Chagall)이었다.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 태생이지만 죽기 전까지 니스 부근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전시는 성서 속 인물과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로 구성되어있었으며 미술관 한편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글라스 데코 아트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샤갈 특별전이 열려 관람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초기 판화 작품에 치우친 전시 구성에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샤갈 미술관 구석구석을 둘러볼수록 그 갈증이 차차 해소되는 것 같았다.

▲ 벽면을 가득 채운 마르크 샤갈의 글라스 데코

 미술관을 빠져나와 숙소까지 걸었다. 미술관은 북적거리는 니스 시내에서 좀 떨어진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울로 친다면 조용한 삼청동 골목의 분위기를 풍기는 곳.


니스는 전형적 해변 관광지의 모습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관광객들이 즐비했으나 혼자 여행 온 사람은 흔치 않았고 동양인 또한 거의 드물었다. 자유로움과 동시에 고독감이 바닷바람을 따라 은은하게 밀려왔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이곳이 왠지 나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니스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아쉬웠다. 바다 도시만이 지니고 있는 청명한 날씨와 생동감에 서서히 빠져들게 된 것일까. 니스에 머물며 방문한 에즈(Èze), 생폴 드 방스(Saint Paul du Vance) 등 작은 해변 마을들도 하나같이 저들만의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 반짝이는 니스의 해변

 니스에서의 마지막 밤, 혼자 해변을 거닐던 내게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니스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낸 이제디네(Ezzeddine)은 자신을 은퇴한 셰프라고 소개했다. 일 때문에 젊은 시절은 바쁘게 보냈으나 요즘 대부분의 일상을 바다에서 즐긴다고 했다. 아침엔 해변 산책을, 낮엔 수영을, 밤엔 다시 해변으로. 그가 매일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한결같았지만 때론 나와 같은 관광객을 만나 친해지는 새로운 날들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어 했지만 밤이 늦었고 다음날 아침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숙소 가까이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해변을 돌아 분수 광장을 거쳐 숙소로 가는 길,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불어를 알려주었다. 주로 간단한 인사나 감정 표현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표현은 한 개뿐이다.


“Joli.” 그는 내가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반복하여 발음해주었다. ‘쥬ㅎ리ㅎ’와 가장 유사하게 들렸고 혀를 굴려가며 열심히 따라 했다. 쥴리 죨리 졸ㅎ뤼... 아무리 흉내를 내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발음이야 어떻든 ‘예쁜’ ‘멋진’을 뜻하는 형용사인 ‘joli’는 니스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 Joli!



프로방스에서 물이 나는 도시, 엑상프로방스


니스를 떠나 다음 여행지인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향했다. 엑상프로방스는 작은 도시여서 하루 만에 둘러볼 요량으로 느지막이 숙소에 도착했다. 호스트는 로망(Romain)과 레아(Lea), 다국적(프랑스, 중국) 부부였다. 내가 도착한 날에 맞추어 자신들도 파리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다며 여전히 들떠 있어 귀여웠다. 모두가 한 바탕 짐을 풀고 옷가지를 정리하며 소란을 피웠다. 북적이는 틈을 타 내가 묵을 방으로 튀어 들어온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샴 고양이 나폴레옹. 사람 나이로 치면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호기심이 많아 내 물건을 이것저것 건드려보더니 급기야 내 침대까지 올라왔다. 

▲ 초면인 고양이와 함께 누워 저녁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일찍 눈이 떠졌다. 간단히 세안을 마치고 로망이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프랑스의 대학이 30%가량 모여 있는 도시답게 그는 자신을 대학 금융학 교수라고 소개했다. 집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했다. 천장으로 난 투명 유리창을 통해 흘러들어온 햇빛이 거실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어주었다.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의 고향이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의 아뜰리에(Atelier de Cezanne)를 방문하기로 했다. 세잔의 화실은 세잔이 생애 마지막 4년간 작업을 이어갔던 곳이었다. 빛이 잘 드는 산 중턱에 위치한 아틀리에의 열린 창문으로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세잔은 햇볕이 잘 들도록 직접 도면을 그려 아틀리에를 지었다고 한다. 자연 채광을 위해 북쪽의 벽면의 거의 전체를 유리로, 남쪽은 두 개의 창문을 만들었다. 구석구석 세잔의 옷가지와 십자가, 대형 캔버스 작업을 위해 필요로 했던 높은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물 잔, 병, 그릇, 작은 항아리와 같은 생활 용품, 사과들도 놓여있다.

▲ 아틀리에 내부엔 그가 당시 사용하던 화구뿐만 아니라 그림 그릴 때 입던 작업복과 코트, 모자 등이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벽 구석의 옷걸이에 걸려 있다.

 전 세계 곳곳에 소장되어있는 세잔의 정물화는 모두 이런 일상적인 소재들로 그려진 것이다. 관람객들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크고 작은 사물들과 그림을 관람했다. 자연과 완벽히 연결된 장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광의 힘에 압도당한 채로. 세잔의 아틀리에는 전형적인 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잔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남아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거리 곳곳에서 폴 세잔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 시가지를 둘러싼 오래된 성곽이 보였고 중세 시대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곳은 14세기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겼던 ‘아비뇽 유수’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교황 궁전(Palais des Papes)에서 내려다본 광장

아비뇽의 교황 궁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어있는 유럽 최대 고딕식 궁전이다. 총면적이 15,000평방미터에 육박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교황의 방, 식당, 재무실 등 20여 개의 방이 공개되어있다. 더불어 다양한 그림과 조각상 등도 만나볼 수 있다. 

▲ 교황청 내부 전시. 휴대용 3D 가이드가 있어 교황청 내부의 구성과 스토리를 이해하기 쉬웠다.


생 베네제 다리(Pont Saint Benezet)는 12세기 양치는 소년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받고 직접 돌을 쌓아 올려 920m의 길이로 완성했다는 전설이 담긴 다리이다. 1226년 루이 8세가 아비뇽에 쳐들어왔는데 전투 당시 다리의 반 이상이 파괴되었고 그 후 겨우 재건하였으나 17세기 홍수에 의해 붕괴된 후 현재까지 복구 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특별한 유산이다. 반 토막 난 채 그대로 남겨진 긴 세월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어 입장료를 지불하고 다리 위에 올랐다. 어떤 여행객 무리들은 손을 맞잡고 빙빙 돌며 유명한 동요 ‘아비뇽 다리 위에서’를 열창하기도 했다. 만약 이 다리가 보수가 된 채로 유지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명소가 될 수 있었을까? 그저 평범한 다리 중 하나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현재 4개의 아치만 남아있는 생 베네제 교(Pont Saint Benezet)



남프랑스는 어느 곳이라도 아름다울 거야


아비뇽을 떠나는 날, 가까운 도시 아를(Arles)로 향했다. 아를은 고흐의 걸작들이 탄생한 영감의 도시다. 고흐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했지만 파리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남프랑스는 어딜 가더라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고흐는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파리에서 기력을 되찾고 균형을 취하여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은신처를 갖지 못하는 한 더 이상 작업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복잡한 도시 파리를 떠나 1888년 2월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작은 마을 ‘아를’에 도착하게 된다. 긴 겨울을 지낸 고흐는 5월이 되자 아를의 라 마르탱 광장 북쪽의 ‘노란 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공간에서 고흐는 아트 딜러였던 자신의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아 화가들의 예술 공동체를 구성해보겠다는 부푼 꿈을 가진 상태였다.

▲고흐가 입원했던 아를 병원은 현재 병원이 아닌 고흐와 관련된 종합 문화센터(L'espace Van Gogh)로 전시관, 영상 자료관,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고흐의 협동 작업 제안에 응했던 인상파 화가는 폴 고갱이 유일했다. 그는 고흐와 약 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함께하였지만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로 끝내 파국을 맞게 된다. 어느 날 고갱이 그린 그림 속의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 일이 일어난 후 고흐는 아를 병원(현재의 L'espace Van Gogh)에 입원하게 된다. 이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지내다 홀로 생을 마감한다.

▲ 그가 입원했을 당시 남긴 그림 <아를 요양원의 정원>을 토대로 병원의 정원과 건물 외관이 예전의 모습처럼 복구되어있다.

아를에 머물었던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밤의 카페테라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등 200여 점의 그림들을 완성했다. 고흐는 아를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는 명작으로 남았다. 도시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과 그 배경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고흐의 걸작 <밤의 카페테라스>가 탄생한 장소 카페 반 고흐(Cafe Van Gogh)를 찾았다. 맞은편 가게에 앉아서 고흐가 그림 그렸던 구도를 가늠해보았다. 밤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당일 여행이 아쉬워진 순간이었다.

▲ 샛노란 테라스 차양은 스포이드로 프로방스의 태양 색상을 그대로 뽑아둔 것처럼 강렬한 색이었다.



왠지 자꾸 틀어지는 날


 아를의 론 강변을 돌아 다시 아비뇽 역으로 떠나려는데 불안한 기운이 밀려왔다. 아를 역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난처해하는 역무원. 직감 상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취소된 것이다. 직원은 열차 고장으로 임시 버스를 확보해주었지만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탈 수 있었다. 당일 아비뇽에서 몽펠리에로 가는 기차를 예매해둔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에 맡긴 내 짐과 오늘 떠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기차표, 30분 내로 아비뇽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내일까지의 여행 계획이 모두 틀어지게 될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많은 돈을 지불하고 택시를 탔다. 다행히 무사히 짐을 찾고 몽펠리에로 가는 기차를 탔지만 잔뜩 진이 빠졌다. 정신이 붕 뜬 상태가 되어 몽펠리에 역에 도착했고 대놓고 소매치기를 하려는 10대들을 만났는데 화를 낼 힘조차 없었다. 무서웠고 우울해진 상태로 호스트 엘리자베스(Elisabeth)의 집에 도착했다. 이래서 다들 소도시를 다닐 때 특히 조심하라고 했나. 처음으로 혼자 하는 여행에 불안함을 많이 느꼈던 날이었다.

▲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도착한 숙소, 머물렀던 도시 중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차분하게 나를 반기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날 선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녀는 오래 알고 지낸 친척과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자신은 자택 근무를 하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의 집은 조용했고 그 고요함은 나에게 적막이 아닌 평안을 선물했다. 



구글 맵 없이도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나에게 몽펠리에의 지도 한 장을 주었다. 몽펠리에는 작은 도시여서 하루만 둘러봐도 충분하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옷 세탁이 필요하다고 하자 런드리 샵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주었고 매일 미술관을 방문한다고 말하자 정말 좋은 미술관과 정원이 있다며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그녀가 건네준 종이 지도와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이 너무 다정하고 귀여워서 오늘만큼은 구글 맵을 끄고 지도로 이곳저곳을 누벼보자고 생각했다. 유럽의 소도시는 위험하고 어제의 나는 소매치기까지 당할 뻔했지만, 값진 보물지도를 손에 쥔 소년처럼 씩씩하게 몽펠리에 시내로 향했다. 방문했던 남부지방 거의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피카소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몽펠리에의 미술관에서는 피카소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난 피카소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쉽게 만나기 어려운 초기 스케치들과 다작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성이 참 좋았다.

▲ 엘리자베스가 추천해준 파브르 미술관(Musée Fabre)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추천지 페이로 산책로(Promenade du Peyrou)에서 현지인들이 낮잠을 자거나 독서를 하는 등 여유롭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원 뒤쪽으로 오래된 수로와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였고 정 가운데 루이 14세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작고 귀여운 침입자들


혼자 하는 장기 여행은 처음, 에어비앤비 만으로 연박을 해보는 것도 처음이라 예약 전 나름의 기준을 마련했다. 호스트가 여자여야 했고 역과 10분 이상 떨어지지 않은 되도록 중심부에 위치해야 했다. 그 밖에도 다른 게스트들이 남긴 코멘트를 꼼꼼히 체크해보았다. 리옹에서 묵을 숙소의 호스트는 여자 게스트만 받는다고 했다. 숙소 사진에 인형과 장난감 목마 등이 놓여있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겼다.


숙소에 도착한 나를 아이 두 명과 일본인 호스트가 맞이해주었다. 그녀는 깔끔하게 정돈된 방을 내어주었고 난 천천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뼘 가량 열린 방문 사이로 작은 얼굴들이 쏙쏙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마치 숨바꼭질 도중 술래를 발견한 것처럼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무단침입이었다. 두 꼬마 아이를 보며 웃고만 있었는데 호스트 치호(Chiho)가 다급하게 달려와 나에게 사과를 건넨 후 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내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귀염둥이들은 몇 번이고 내 방에 몰래 들어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나에게 선물했고 침대에 앉기도 했고 내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며 조잘조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난 졸지에 아끼던 곰돌이 도장까지 그들에게 선물해버리고 말았다.

▲ 귀염둥이들의 무단침입을 환영한다!



다시 돌아올 이유


다음날, 호스트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그녀의 가족이 전부 프랑스 리옹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남편은 의대생이라고 했다. 리옹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대부분의 의대생들은 싱글이지만, 자신은 의대생의 아내인 데다 베이비시터라고 말하며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미소 뒤에 숨겨진 그간의 고충들이 느껴졌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같은 아시아인이자 여성으로 타지에서 살아(여행해) 가야 하는 어려움의 공통분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여느 주부들이 그렇듯 간혹 지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꽤나 단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매일 딸들의 홈스쿨링을 책임졌고 부지런히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등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타지 생활에 활기를 더해가고 있었으니까.

▲ 푀이에 다리(Pont de la Feuillée)에서 찍은 강변의 모습, 리옹엔 유독 러너들이 많았다.

내가 리옹을 떠나는 날, 서로를 꼭 닮은 여자 세 명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나를 배웅해주었다. 호스트의 딸들은 내가 언제 다시 리옹에 방문할지 궁금해했고 호스트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 말을 전해주었다. 덕분에 리옹을 떠나기도 전에 이곳에 다시 돌아올 날을 고민했다. 에어비앤비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또 이런 환대를 받아볼 수 있을까. 



감수할 만한 불편함, 기꺼운 관심


호텔과 에어비앤비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호텔은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이다.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기보다는 서비스와 공간과 창문 너머의 풍경을 ‘소유’한다. 또한 정해진 시간엔 언제든지 체크인이 가능하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쾌적한 공기와 분위기. 그리고 카운터의 그들이 미소로 던지는 질문은 딱 두 가지이다. 예약자의 이름과 더 필요한 것이 없냐는 물음. 그 두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배정받은 룸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되는 것이다.


반면 에어비앤비 체크인 과정은 복잡하다. 사전에 호스트와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도착 시간을 공유한다. 역에 내려 복잡하고 시끄러운 큰길, 중심부와 떨어진 한적한 숲 길, 때론 엘리베이터 없는 옥탑방을 하염없이 오르기도 한다. 돌덩이 같은 캐리어(혹은 배낭)를 끌고(매고)서!


그뿐인가,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체크인을 끝낸 후. 호스트의 질문 세례를 받게 된다. 호스트는 내 이름 말고도 궁금한 것이 많다. 혼자 하는 여행이네, 용감하구나, 어디서 왔니, 집으로 언제 돌아가니, 저녁은 어디서 먹니, 오늘은 어딜 다녀왔니, 혹시 학생이니, 백팩이 무겁진 않니, 그런 슈퍼 파워는 어디서 나오니 (몸무게가 40kg 중반대인 내가 40L 백팩을 메고 다니니까). 

▲ 남프랑스 여행을 마친 후, 산티아고 순례길 또한 함께한 내 백팩.

그 무수한 질문 가운데서도, 많은 호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했던 주된 궁금증은 바로 내 ‘다음 여행지’였다. 난 같은 대답을 매번 반복해야 했다. “이곳저곳을 거쳐 여기에 왔어. 기차를 타고 왔지. 지금 이 도시를 떠나 여기, 저기를 들렸다가 종국엔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갈 거야.” 몽펠리에를 떠나는 나에게 호스트 엘리자베스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에겐 아마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니스, 엑상프로방스, 아비뇽을 여행하고 몽펠리에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왔어. 그리고 내 다음 목적지는 리옹이야.”


지난 행선지들을 되새기다 보니 나는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자 같이 느껴졌다. 긴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Von Voyage”라고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불어 문장 중 하나였다. 내가 사람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그녀 또한 하나의 방을 매개로 여러 사람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떠난 방에 내일은 누가 찾아오게 될까. 이웃나라 스위스나 독일에서 온 노신사일 수도 멀리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 될 수도, 지구 반대편에서 온 세계 여행자 청년이 될 수도 있겠다. 


그녀가 나의 여행을 응원하듯, 나도 마음속으로 그녀의 여행을 응원했다. 여행은 내가 속한 세상의 바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일상답고 온전한 내 자리에서도 낯선 먼 나라에서 온 움직임을 느끼고 일면식 없는 사람을 환영할 수 있다. 내일은 어떤 새로움이 그녀를 방문하게 될까. 



그들의 방


짧으면 하루, 길면 사흘 가량 그들의 방에서 잠들며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작은 방을 떠올렸다. 그들이 내준 방과 침대가 너무 편안해서, 혹은 어색하고 불편해서 가만히 떠올렸던 내 작은 침대. 잠이 오지 않는 밤엔 내가 늘 눕던 그 침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 사실 만으로도 위안이 된 것이다.


역으로 지금 내 방, 나의 자리에 누워서 내가 잠시 머물던 그 방들을 추억해본다. 창밖의 풍경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던 자잘한 소음들과 잘 정돈된 침구가 뿜어내던 섬유 유연제의 향, 문을 열고 나를 반기던 호스트들의 표정까지도. 아마 앞으로도 그런 잔잔한 감각들이 불현듯 일상을 치고 올라오며 다시금 나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 호스트는 출근하고 텅 빈 숙소에 혼자 남아 외출 준비를 하며.



에어비앤비 작가, 유민주


읽고 쓰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국문학과 스토리텔링을 전공했지만 온라인 마케터로 먹고삽니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 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여권을 둡니다. 

인스타그램 : @miss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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