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9화/24화)

9. 외면

9. 외면      


 제가 새로운 장난이라도 치려는 건 줄 알았는지, 땅콩이는 달아나는 쥐를 잡으려는 것처럼 다시 제 구두를 잡아 얼굴을 비비려 하더군요. 순간 땅콩이의 얼굴에 구두약이 묻었을 때, 물티슈로 닦아주곤 했던 게 떠올랐어요. 그때 아기 얼굴 닦아주는 아빠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죠. 그럴 때면 땅콩이도 아기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고요. 하지만 이제 그런 기억들도 끝내야 했죠. 짜증이 났을 뿐이었거든요. 제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가까이 오려는 땅콩이를 향해 발을 크게 구르면서 소리를 질렀더니, 깜짝 놀라며 그대로 자리에 앉더군요. 경비실로 들어갈 때 슬그머니 일어나 따라 들어오려는 땅콩이를 다시 구둣발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젊은 직원의 말을 머릿속으로 한참 곱씹어 보았어요. 과연 앞으로 회사에 길고양이를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말한 건지 판단해 보려고요.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다음에 그 젊은 직원을 봤을 때, 다른 속뜻이 있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다짜고짜 찾아가서 자수하듯이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오히려 더 머리만 복잡해지고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 커져갔어요.


 한번 시작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도화된 신분제 사회는 아니지만 엄연히 '갑'과 '을'이 존재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한, 한쪽은 다른 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으니까요. 또 스스로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눈치를 줘서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고요. 젊은 직원이 차라리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했으면 다른 속뜻이 있었는지 알기 쉬웠을 텐데, 밝게 웃으면서 말한 내용이 저에게는 약점이 되는 부분이라 더 골치가 아팠어요. 그래서인지 땅콩이가 더욱 미워졌고요. 한번 미워하기 시작한 마음에 가속도까지 붙으니 방향을 바꿀 수도, 멈출 수도 어려워지게 되었죠.

      

 경비실에 앉아 바깥을 보니 땅콩이는 가만히 앉아서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땅콩이랑 긴 시간을 지내면서 고양이도 눈빛으로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감정에 따른 표정 변화가 확연히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땅콩이는 저의 낯선 모습에 분명 당황하는 눈빛이었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눈빛이든, 표정이든 상관없이 그동안의 관계를 끝내야 했어요. 전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죠. 땅콩이가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전 이렇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나 돈 없어… 그리고 난 약자야…."라고요.


 맞아요. 전 자신을 부양하기에도 급급한 사람이었고, 고양이 한 마리 돌볼 여유는 더욱 없는 사람이었어요. 주제 파악을 못하고 그동안 큰 사치를 부렸다고 생각했어요. 시키는 대로 일하고 돈 받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고요. 사람에게 그런 식의 외면을 했다면, 전 그 사람이 받을 감정적 상처에 대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땅콩이에게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주인 없는 길고양이였고, 짐승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땅콩이의 신분이었고요. 땅콩이에게도 이런 인간에 대한 경험이 앞으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인간은 자신의 계산에 안 맞거나,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땅콩이는 저에게 끝없이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왜냐하면 전 고양이와는 급이 다른 인간이란 존재인 데다,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않고, 제 손해를 감수하면서 돌봐주었으니까요.     


 땅콩이를 위해 가져온 통조림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 그리고 어떻게든 저에게서 땅콩이를 떼어놓을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어요.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죠. 이전에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했지만, 저의 생존을 위해선 고양이가 싫어하는 걸 생각해야만 했어요. 물을 싫어한다는 게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물벼락으로 혼쭐을 내주기로 했죠.


 냉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받기 시작했어요. 말 그대로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물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경비실 문을 화난 듯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열었어요. 그리고 물을 뿌리려는 순간,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바깥에 가만히 앉아있던 땅콩이와 눈이 마주쳤어요.



작가의 이전글 소설 환취 (8화/25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