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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22화/25화)

22. 우리

22. 우리     


 좁은 공간에 신부님이 안 계셔서 유감이라는 생각이 조금 들더군요. 그럼 고해실과 조금 비슷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신께 전달할 필요 없는, 좁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우리만의 대면이었고, 우리 안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여서 상관은 없었어요.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함을 가지고 말을 시작했어요.


"땅콩이의 기억마저 외면하려고 그랬구나. 외면하려고 계속 머리를 짜내고 화를 내고 그랬던 거였어. 그게 냄새였었고, 네 생각의 냄새…."

     

 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물론 제 머릿속에서만 들려오는 소리였겠죠. 저만이 맡을 수 있던 그 냄새처럼요.

    

'너야말로 마지막에 실수를 하네…. 이미 다 알고 있었잖아. 너도 계속 자기가 한 생각을 생매장하면서 모른다고 속이고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참 답답하네. 그동안 살면서 그렇게 당해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는 거지? 외면의 완벽한 끝은 제거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 너도 많은 사람들 기억에서 이미 지워진 존재일걸.’  

   

"그래, 그거였구나. 땅콩이를 잊게 만들면 우리 둘 다 땅콩이 생각을 안 할 테고 그러면 내가 냄새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속인의 말을 떠올리고 굿 대신 위령제를 선택한 거였어. 그런데 그 생각의 시작을 감춰둬야 했었구나. 안 그러면 냄새가 났을 테니까. 그럼 난 또 '땅콩이의 저주'네 뭐네 하면서 기억에 남겨둘 게 뻔했으니까. 머리를 썼구나. 그런데 결국 감추지 못하고 냄새가 나버린 거였네."    


'이젠 나도 감출 방법이 없지. 네가 그놈의 고양이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하면서 망쳐버렸으니. 나로선 너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안한 거였어. 굿은 비싼데 돈은 없고 넌 아쉬워했고. 그게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잖아. 그 효험도 없는 부적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서 말이야. 그리고 굿해야 원귀를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고 했나? 그래야 편안해지고. 하지만 그것도 웃긴 소리지. 원귀는 무슨…. 결국 기억의 문제일 뿐이야. 떠나면서 그 고양이 기억을 털어내는 게 최선이었어. 지금껏 중요한 순간에는 내 결정에 아무 불만 없었잖아. 오히려 내 생각에 의지했지, 지금 문제는 네가 그 고양이의 기억을 붙잡고 있으면서, 냄새난다고 난리 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점이야. 그냥 기억을 놓아버리면 되는 문제였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게 편할지도 모르겠지, 위령제를 해주고 다 끝났다고 착각하면, 일단은 마음 한편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둘 수 있으니까. 내가 죽인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죽인 게 아닌 건 분명하지 그리고 얼어 죽을 뻔한 고양이를 구해줬던 그날을 생각해 봐. 분명 선한 일을 한 거였어.'


"아니, 얼어 죽을까 봐 꺼내야겠다는 것 말고 한 가지 생각을 더 했지. 평소에 고양이 좋아하지도 않고 내쫓기 바빴던 녀석이 왜 갑자기 구원의 천사가 되었는지. 너한테도 다른 생각이 하나 있었잖아."

     

'경비원의 본분으로는 고양이를 내쫓았어야지.'


"아니, 알고 있던 것 말고 생각한 걸 말하는 거야."

     

'아! 그거, 심심한데 잘 됐다고 한 걸 말하는 거로군. 그런데 그 고양이와 계속 만나고 싶어 한 건 내가 아니었어. 너였지. 그리고 너도 그러면서 같은 생각을 했을 텐데. 심심풀이 땅콩? 너도 그걸 떠올리면서 이름을 지어 준 거였잖아.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콩!'나타났다는 둥 그러면서 지었다는 건, 네가 나중에 만들어낸 이야기고. 유치하게 참 내…. 너도 널 속이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래 잘 알고 있네. 넌 하룻밤 정도 같이 놀기에 괜찮겠다 싶었을 뿐이었지. 그런데 내가 같이 있는 걸 좋아했지. 혼자인 것에 지친 상태였으니까. 그러다 땅콩이를 통해서 자식이 있는 부모들이나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느껴 보고 싶어 했지. 내 삶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도 그런 걸 땅콩이를 통해 느꼈다고 착각했고, 그래서 땅콩이란 이름을 지어준 이유라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어. 맞아. 거짓말이었어."  

   

'뭐, 가족도 친구도 이젠 없으니 그 마음이 이해는 되네. 하지만 넌 말이야, 네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어. 그걸 안 보려고 했을 뿐이지. 그래도 충분히 잘해줬어. 길바닥에서 사는 짐승에게 그 이상의 것을 베풀기엔 역부족이었잖아. 네 능력으론 말이지.'

     

"아니, 비상금으로 작은방 한 칸 정도 얻을 수 있었지. 하지만 네 생각에 따랐던 거였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방 구해서 보증금에 관리비에 따로 돈 들이며 살긴 아까웠잖아. 그리고 동물 병원을 나오면서 한 생각도 마찬가지였고…."

     

'비싸네, 이번만 해주자.'


"만약에 데려다 돌보기라도 한다면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었겠지. 그것까지 머릿속으로 다 계산했었지. 하지만 나도 알고 있으면서 그 계산에 동의했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못해준 게 많은데 그 고양이한테 못해 준 것까지 괜스레 죄로 엮을 필요는 없어. 그걸로 괜한 짐을 지고 살아봤자 손해인 거야. 일자리도 쫓겨나는 마당에 지난 건 잊고 앞으로 살 궁리나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 고양이도 이젠 세상에 없고 말이야. 사고였다고 사고! 그 멍청한 고양이가 도로에 나와 있다 차에 깔린 사고!'

    

"그래 앞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하는 것도 맞고, 땅콩이가 사고를 당했던 것도 맞지. 하지만 네 결정과 내 묵인이 만든 끔찍한 사고는 그전에 이미 시작됐어. 서서히 죽이고 있었지. 길고양이 들인 걸 직원에게 걸렸다고 생각하고 외면하기로 한 그때부터였어. 관계를 죽이면서 마음도 같이 죽이기로 했던 거지. 세상 살면서 사람들에게 당해 본 기억을 되살려 똑같이 했던 거야. 결국 나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던 거지. 머릿속에 악취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사람들하고."     


'또 시작이군. 그래, 그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 것도 이해해. 죄책감이 들었겠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일 잘 털어내고 잊은 채로 그렇게 잘 살아. 그런데 네가 내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나도 네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볼까? 그럼 끔찍한 결정으로 사고를 만든 건 너도 마찬가지였어. 나도 만약 네 냄새를 맡게 된다면 고통스러웠을 거야. 너의 역겨운 냄새는, 네 만족만을 먼저 생각한 욕심이거든. 끝까지 책임질 것 아니면 계속 손을 내밀진 말았어야지. 넌 손을 뻗으면서 계속할 생각을 갖고 있었어. 잠깐의 적선이 아니었다고. 적정선을 넘어 욕심을 부린 건 내가 아니었어, 네가 외로움을 채우고 싶어서였지! 세상에 좋든 나쁘든, 모든 건 적정선이란 게 있어. 그걸 넘어서면 언젠간 감당 못할 일이 생기기 마련인 거야.'

     

"그래, 나도 끔찍한 결정을 했던 게 맞다. 땅콩이 입장에서는 자신한테 계속 손을 뻗어 줄 걸로 생각했을 거야. 끝까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계속 손을 내민 나도, 결국 끔찍한 선택을 계속 한 셈이었지. 뒤에 땅콩이와 관련해서 어떤 일이 생기든 감당 못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땅콩이를 붙잡아 두려고 먹이를 계속 주었고…. 짐승을 곁에 잡아두는 데는 먹이가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만든 사고나 마찬가지다. 넌 그걸 수습하려고 그랬던 것이었고. 왜냐하면 우리도 결국 먹이가 필요했으니까. 돈 벌어서 밥 먹고살아가려면…. 그래서 너도 그렇게 움직였던 거였고, 그런 너에게 내가 의지했던 것도 사실이고."

      

'먹이? 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할 것 같네. 사람도 살아야 하니까 그런 게 필요하지. 맞아, 밥 먹고살려면 돈 벌어야 해. 그래서 넌 내가 필요했던 거였고. 하지만 단순히 먹이 때문에 내가 우리의 생각 대부분을 채울 수 있었던 건 아니야. 그건 네가 빈자리를 항상 마련해 둔 거였어. 생존만을 중요시하고, 공존에는 관심도 없던 네가 만들어준 거야.'

     

"그게 약자가 살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세상 사람들에 대해 오해한 게 네. 모두가 악취를 풍기고 다니는 인간이라고 여겼지. 그래서 같이 살아가기가 싫었어. 그런데 모두 악취를 풍기는 건 아니지만 내면에는 모두 악취를 가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똑같기 때문에 사람들도 자신의 악취가 나는 생각이 만들어낸 감당 못할 결과들을 완벽히 털어내긴 힘들 거야. 나처럼….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도 해보고, 정당화도 해보고, 외면도 해보고…. 아마 별 짓 다해 보겠지. 하지만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생각나고, 비슷한 대상이나 상황을 마주하면 저절로 떠오르게 되지 않을까. 그럴 때 완전히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이미 스스로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억지로 털어내면서 만들어낸 괴로움 숨기고 살아갈 뿐이겠지. 혼자서 외롭게…. 어쩌면 그중 일부는 나처럼 냄새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고 보면 세상 사람들 전부 다 약자인가 봐. 그저 배부른 약자와 배고픈 약자만 있을 뿐이고….


'넌 여전히 죄책감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놀고 있어. 너처럼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너도 분명 살면서 본, 한 가지 부류를 제외해놓고 이야기하는구나. 아직 늦지 않았어. 그 부류들이 살아가는 법을 지금부터라도 따라 해 봐. 간단해. 잔인해져! 잔인해지면 편안해질 수 있어. 그럼 해결돼. 기껏 길고양이였다고. 그걸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우습지 않아?"


"그 잔인해진 모습이 너야…. 넌… 네가 잔인해진 것도 지금 모르고 있는 거야. 네가 말한 적정선을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게, 바로 네가 잔인해진 거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같이 살아가지 않아. 최 과장님과의 대화 기억하지? 난 그때 당연히 해고될 거라고 생각했지. 최 과장님 내면의 한쪽은 퇴근길에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경비원을 교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을 거야. 그런데 나의 변명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무난한 사정을 만들어주면서 넘어가려고 했지. 그건 나를 위한 짐을 지기로 선택한 거였어. '어쨌든 난 당신을 이해하겠다.'란 거였지. 동행을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그게 무겁고 불편한 것이라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것. 악취를 풍길지 모르는 다른 모습은 어딘가에 멀리 두거나 적정선을 스스로 지키면서 그렇게 사는 거였어. 그게 세상 사람들이 공존하는 방식이었고. 그래서 아직 늦지 않았다면, 나도 살아가는 법을 바꿔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무래도 땅콩이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가는 게, 내가 다시 찾은 최선의 답인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미안함을 짊어지고 사는 것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 아닌가?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어. 넌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 고양이 기억도 잊고, 이곳도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였어. 도대체 뻔히 고생할 걸 알면서 미안함을 짊어지고 가려는 이유가 뭔데?'


"그러면 땅콩이와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 난 미안함을 짊어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존재와 동행하며 살아가려면 어떤 형태로든 짐이 생기고 그걸 짊어질 줄 알아야 하나보다. 네가 말한 '공존'이란 걸 하려면. 즐겁고, 아름답고, 가벼운 짐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불편하고, 무거운 미안함인가 보네…. 그래서 난 땅콩이와 같이 가고, 널 마음 한편에 두고 떠날 생각이야."


'날 한편에 두고 간다고? 그런데 어쩌지. 우리는 같이 존재할 수밖에 없어.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둔다고 해도 영원히 막는 건 불가능할 텐데. 언젠간 넌 살기 위해 또 다른 이유로 날 찾고,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어. 그럼 어쩌려고? 그때 또 다른 미안함을 짊어지려고?'

     

"그래, 언젠간 내가 다시 널 필요로 하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너에게서 떨어져 있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냄새는… 너한테서 나는 거였잖아."


'그래? 그러네…. 그런데 날 떼어놓는다면 너처럼 약한 녀석의 세상살이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네 병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것도 문제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있잖아. 사기당하고 길길이 날뛰며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하다가, 그럴 수 없어서 혼자인 걸 선택하면서부터였어. 넌 그때 그런 선택하면서 이미 사회적인 자살을 한 거야. 그때 내가 없었다면, 넌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다고…. 앞으로 나 없이 받게 될, 세상이 주는 자극들을 견딜 수 있겠어? 신경 정신과 진료도 그렇게 피하듯이 받는 주제에 말이야. 그래도 지금까진 그저 외로워서 인형이랑 한마디 주고받는 정도였을 뿐이었다고, 지금 나하고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었어. 앞으로 또 다른 게 보이고, 또 다른 게 들릴지 몰라.'

      

"그래, 그 말도 맞네. 하지만 심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땅콩이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땅콩이를 보게 되면 그땐 나도 혼자가 아니니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거야. 혹시 더 심해져서 땅콩이를 다시 보게 되면 널 찾아갈 게. 내 생각엔 그때쯤 너도 땅콩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너도 짊어져야 할 짐이 무엇인지 찾는다면…. 그전엔 네가 가까이 오더라도 난 외면할 거야. 네가 가까이 오면 난 알 수 있어. 아주 좋은 코를 빌려서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거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젊은 직원에게 걸렸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땅콩이에게 먹이 주는  막지 않아 줘서 고맙다. 왜 네가 막지 않았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날이 밝아오고 있어. 난 마지막 퇴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언젠간 다시 보자. 꼭!"    


 제가 말을 마쳤을 때, 전 그 사람이 슬픈 표정이나 화난 표정 또는 섭섭한 표정을 지을 거라 예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절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군요. 그러다 갑자기 신기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이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기억에는 남더라고요. 


 동이 트면서 유리창에 비쳐있던 그 사람은 희미해지며 사라졌어요. 벽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곗바늘은 마지막 퇴근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요. 짐이 가득 찬 가방을 메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챙겼어요. 액자는 할아버지 경비분을 직접 찾아뵙고 드리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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