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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24화/25화)

24. 환취

24. 환취     


 "심심풀이 땅콩" 같은 문 군의 이야기가 끝났군요. 문 군이 메시지를 잘 찾아내서 다행이에요. 찾아낼 줄 알았어요. "허구의 세계"라는 말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과거의 어떤 일들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저 쓸데없는 노인네의 쓸데없는 망상이었는지도 모르죠. 문 군이 등장하는 허구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문 노인이 등장하는 실제의 이야기를 할 차례인가 보네요. 


 곧 70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니까 노인이죠. 전 환취라는 증상을 긴 세월 동안 달고 살아가는 중이에요. 그 환취가 시작된 시점을 전 정확히 잘 알고 있죠. 이야기와 현실은 달라요. 그럼 수십 년 전, 허구가 아닌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환취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요. 


 처음부터 풀어나가면 이야기가 더 지루해질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빈대떡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실제로는 땅콩이가 빈대떡처럼 되어있진 않았어요. 기다랗게 갈려 있었죠. 이미 많은 차들이 밟고 지나간 상태였거든요. 그날 출근하면서 도로변에 거의 분해되다시피 한 고양이 사체가 보이더군요. 한참을 서서 보고 있었죠. 땅콩이와 비슷한 무늬의 털들이 군데군데 섞여있는 파편들이 보였어요. 그곳은 차량이 엄청나게 많이 다니는 곳이었어요. 특히 버스, 화물차, 중장비 차량 등 대형차량과 특수차량이 많이 지나던 곳이었죠.


 사료공장에서 넘어오는 고양이들 중엔 땅콩이와 비슷한 무늬를 가진 고양이들이 있긴 했어요. 아마 형제나 친척쯤 되었겠죠. 전 그래서 땅콩이는 아닐 거라고 의도적인 착각을 했어요. 현실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속으로는 땅콩이 같다고 느끼고 있었거든요. 밤이 되면 나타나려니 하고 기다렸어요. 그날 사과의 의미로 통조림을 준비해 간 것도 맞아요. 외면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젊은 직원과의 대화가 실제로 있었으니까요.


 한참을 경비실에 앉아 기다려도 안 나타나더군요. 계속 기다렸죠. 안 오더군요. 밤에 물류 회사에서 화물차들이 나와 회사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몸에 전기가 오르면 순간 움찔하잖아요. 커다란 화물차 바퀴가 땅콩이의 잔해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땅콩이를 외면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사진을 꺼내보듯 하나씩 툭툭 떠오르더라고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도로에 큰 얼룩같이 남아 있던 잔해들이 흩어지기도 하고, 큰 차량의 바퀴에 묻어나가 사라지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어요. 화물차들의 행렬이 끝나고 나선,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경비실 안에서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참 아름답게 걸려 있더군요. 그리고 세상은 참 고요했고요. 그날 밤은 아름다운 고요함 속에 참혹한 얼룩이 진 세상이었다고나 할까요.


 시간이 흐르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새까맣던 밤하늘이 조금 푸르스름해질 때가 돼서야 벽시계를 봤어요.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할 때가 거의 다 되어가더군요. 아침에는 조기 출근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당일 점검할 차량을 일찍 와서 맡기고 가는 고객들도 있었어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어요. 입으로 '휴' 하는 소리를 길게 내면서요. 이미 지나간 일, 잊어야 했죠. 그냥 흔한 길고양이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그때 제가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나더군요. 멀리서부터 어떤 굉음이 귓가를 지나 속속 꽂혀 들어왔어요. 도로 청소차가 다가오고 있었죠. 처음엔 소리의 정체가 무언지 깨닫고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몸도 정신도 얼어버렸어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깥을 보니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도로 청소차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시야에 들어오는 그 모습이 커져갈수록 가슴에서 뭔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후회였는지, 분노였는지, 슬픔이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저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보려 했을 뿐이죠. 그런데 도로 청소차 옆에 달린 빙글빙글 돌아가는 크고 굵은 솔이 눈에 들어왔을 때, 무언가가 떠올랐어요. "신데렐라 타임"이요.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땅콩이는 춤추는 것도, 사라져야 하는 것도 싫어했을지 모르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헤어질 시간이 된 걸 알고 어딘가로 숨으러 간 게 아니라, 또 두 앞발을 잡아 강제로 춤출까 봐 도망갔던 것 같아요. 참 저도 저만 알던 모자란 사람이었죠.


 도로 청소차가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이 왔을 때, 의식적으로 꽉 잡고 있던 얼굴의 근육들이 순식간에 풀어지면서 울먹이는 표정으로 바뀌더군요. 그리고 "으으"라고 소리를 내면서 짜증과 고통이 섞인 인간만의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어요. 도로 청소차는 딱, 땅콩이를 쓸어 담아 갈 수 있는 코스로 다가오고 있었고요. 원형의 크고 굵은 솔이 회전하면서 천천히 남은 잔해를 쓸기 시작하더군요. 빙글빙글 돌아가며 땅콩이를 쓸어 담아 가는 걸, 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죠.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왜 그랬어…. 왜… 왜."라고 혼잣말을 했어요.

     

 정말 깨끗하게 치워졌더라고요. 경비실 유리창 너머로 땅콩이의 잔해가 있던 자리를 보다가 유리창에 비친 저를 보았어요. 어색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앉은 채로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몸을 숙였어요. 그 상태로 경비실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뚝뚝'하고 한 방울씩 눈물이 떨어지더군요. 경비실에서 눈물을 흘려 본 것도 처음이지만, 그렇게 커다란 눈물을 흘려본 것도 오랜만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울어본 건, 오래전 가족을 잃었을 때였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생각해도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외면할 때는 무감각하게 잘도 하다가,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지고 나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참 이중적인 모습이었죠. 어떤 게 진짜 제 모습인지 모르겠더군요.         


 나이 든 아저씨가 참 궁상맞게 혼자 눈물 콧물 다 짜고 있는데 동이 트고 있더군요. 벽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어요. 곧 직원이든 고객이든 들이닥칠 시간이 코앞이었죠. 그런데 경비실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상태였어요. 그래서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다가 제 뺨을 여러 차례 때렸어요. 정신을 차려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유리창 속 제 모습을 보며 말했어요.


"그래… 그래.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맞아. 그러니까 지금은…."


 햇빛에 사라져 가던 유리창 속의 저를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어요. 어차피 안 좋은 관계의 연장선에서 끝났던 땅콩이를 빨리 털어내야 했어요. 전 시간을 확인하고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됐으니까요. 그래도 그날 일어난 모든 일과 봤던 것들은 머릿속에 깊게 남더군요. 벽시계, 맞아요. 고개를 들면 보이는 벽시계가 진짜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액자, 맞아요. 액자는 아니지만 비슷한 건 있었어요. 아주 간단한 표어가 적혀있었죠. 언제, 누가 걸어놓은 건지는 몰라요. 내용은 간단했어요. "언제나 감사하며, 언제나 친절하게, 언제나 스마일"이라고 적혀있었어요. 빨리 힘을 내서 입을 찢어 웃는 데는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었죠. 경비실 서랍엔 작은 손거울이 있었어요. 얼른 꺼내 얼굴을 확인했죠. 시뻘겋게 충혈된 데다 코까지 빨개져서 누가 봐도 방금 상이라도 당한 사람의 얼굴이었어요.


 어디 회사든, 공장이든, 빌딩이든 그런 곳에 방문했을 때, 울고 있는 경비원을 보신 적이 없으실 거예요. 아니면 울고 난 흔적이 역력한 경비원을요. 그런 경비원은 없을 거예요. 저도 못 봤어요. 저 역시 그런 모습은 보이면 안 되었죠. 왜냐면 안 잘리고 돈 벌어야 하니까요. 냉온수기에서 찬물을 손에 받아 세수하듯이 얼굴에 뿌리려고 했어요. 화장실까지 갈 시간이 없었어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시간이 이미 되었거든요. 그런데 마음이 급해진 데다 믹스커피 타 먹던 습관 때문에, 저도 모르게 뜨거운 물을 손에 받아서 화들짝 놀랐었죠. 다시 찬물을 손에 받아 얼굴에 마구 뿌렸어요. 휴지를 한 움큼 집어 있는 힘껏 코를 풀어낸 다음, 다시 손거울을 보니 많이 나아지더군요. 자세히 안 보면 모를 정도였고, 얼핏 보면 하품하다 눈물 흘린 정도로 보일 것 같았어요. 손에 물을 조금 받아 흐트러진 머리도 단정하게 가르마를 탔어요. 그리고 유리창 속에 거의 흐려져 없어지는 제 모습을 보며 말했어요. 목소리도 가다듬어야 했거든요. 물론 낭만적인 말은 아니었어요. 그저 돈 벌어먹기 위한 말이었죠. 먹이…. 전 먹이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그다음 중요한 스마일….     


 그날 퇴근길에 '이제 다시 혼자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정체불명의 악취가 맡아지기 시작했고요. 확실한 건, 땅콩이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그날부터 냄새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저에겐 환취만이 남았던 거였어요.


 병원을 다녀봐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종교활동을 해봐도 나아지지 않았죠. 그냥 그렇게 저에게서만 나는 냄새를, 저만 맡으면서 살아가야 했죠. 분명 땅콩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어요. '짐승이니까 내 사정 몰라주고 죽어서 저주를 내렸나 보다.'라고 생각하면서요.


 냄새가 날 때마다 땅콩이가 떠올랐어요.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제가 내놓은 답은 언제나 같았어요. '그때의 난 어쩔 수가 없었다. 난 가진 것 없는 약자였고, 나도 살기 힘들었다.'였죠.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때의 상황에 대한 저의 답이었어요. 언젠간 땅콩이의 영혼도 절 이해하게 될 거라 생각하면서요.    

 

 그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도 계속 경비원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세월 참 빠르더군요.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다 새어버렸죠. 이젠 아파트 경비실에서 일하느라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그 시절과는 근무환경이 많이 달라졌어요. 경비실은 그래도 넉넉히 커서 다행이지만 24시간 맞교대 근무인 데다,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 흡연 문제 등으로 민원이 들어오면 중간에서 이야기라도 해야 하고 하는 일들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나이 들고 몸까지 약해진 제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일자리라 다행으로 알고 하고 있죠. 근무시간이 길지만 그래도 요즘은 "스마트폰"이란 게 생겨서 근무 중에 아무 일이 없을 때면 노래도 듣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온라인 카페 활동도 하면서 보내고 있어요. 문 군의 이야기도 어찌 보면 그 덕에 쓰게 되었죠.


 이젠 시대가 좋아져서 노인들도 '시니어 세대'라고 칭하면서 세상에 참여할 만한 행사 같은 것도 많아졌더라고요. 건강 정보나 가끔 얻으려고 온라인 노인 건강 카페에 가입한 적이 있었죠. 그런데 그 카페에 어느 날 공모전 관련 게시물이 하나 올라와 있더군요. 상단에 '시니어 소설 공모전'이라고 적혀있었어요. 나이도 65세 이상이면 되고, 특별한 주제나 소재의 제약은 없었어요. 상금과 부상도 주어지고요. 어차피 퇴근해서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는데 잘 됐다 싶었죠.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소설을 써보기로 했어요. 땅콩이를 소재로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어 잘 되면 돈도 생기고, 땅콩이의 마음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죠.


 처음 쓸 땐  모든 걸 꾸몄어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절 핍박하는 존재로 만들었고요. 그리고 땅콩이도 얌전한 고양이가 아닌 골칫거리 고양이로 묘사했어요. 절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길고양이를 돌보던 착한 경비원으로 만들었고요. 땅콩이가 차에 깔려 죽은 것도 저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에 도로에 나와 있다 죽은 걸로 했어요. 그래서 땅콩이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제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게 내용이었죠. "영원히 널 기억할게…."라고 하면서요. 그리고 땅콩이의 영혼이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걸 보며, 전 빙그레 미소를 짓고요. 전 그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해피엔딩을 만들었다고요. 사실 위령제를 실제로 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이것도 땅콩이에게 전하는 '추모의 글'과 같은 성격이라, 실제로는 하지 않았던 위령제를 대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하면 최소한 땅콩이도 마음을 풀고, 저에게서 환취 증상을 사라지게 해줄 것 같았어요. 왠지 될 거 같았어요.


 공모전 입상은 실패였어요. 그런데 글을 처음 써볼 때 애를 먹긴 했어요. 제가 따로 글재주나 문학에 대한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 나이대에 문학 계통으로 공부를 했거나, 관련된 일을 하다 은퇴한 사람도 많았을 거잖아요. 전 동화책 보면서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던 수준이라, 그건 크게 실망할 것도 없이 현실을 금방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게 하나 있더라고요.     


 환취 증상이 그 뒤로 심해진 거였어요. 물론 나이도 더 들었고, 몸도 그만큼 더 약해져서 그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전 땅콩이가 심사가 뒤틀려서, 저에게 더 난리를 친다고 생각했어요. 화가 나더군요. 물론  공모전에 응모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저를 꾸미긴 했지만 억울했어요. 제 생각엔, 중요한 건 땅콩이의 넋을 위로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썼다는 거였으니까요. 마음을 풀지 않는 심술쟁이 고양이에게 다시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어요.      


 이번엔 이야기 속에 꾸며서 만든 내가 아닌, 진짜 중년 시절의 저를 다시 보내서요. 아름답게 끝낼 수 있었던 마음이 그 당시 저에게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어요. 자신 있었어요. 전 '어쩔 수 없었다.'라는 큰 명분이 있었으니까요.     


 오래된 사진을 찾아보면서 그때의 저를 떠올리며 혼자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너무 세월이 지난 탓에 땅콩이가 죽은 그날의 일을 제외하곤, 나머지 기억들은 흐려졌거든요. 사진이 조금이나마 있어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어요. 제목은 공모전에 냈던 그대로였어요. "별똥별이 된 나의 땅콩이"라고 첫 줄에 제목을 쓰고 그때 남겨진 사실들과 상황들 속에 저의 행동과 심리를 적어나갔죠.      


 그런데 문제가 생기더군요. 큰 문제였죠. 분명 잘못된 게 없는데,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노인이 된 제가 이야기 속 중년의 저에게서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행동을 했던 생각의 바탕들이요. 마치 저의 다른 내면과 마주한 것 같았어요. 처음엔 당연히 부인했어요. 하지만 이야기 속 중년의 저를 보며 결국 저에게서 답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문 군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졌던 자신과의 대화를 전 글을 적어나가면서 했던 셈이었어요. 제가 본, 그때의 제 자신이 믿기지 않았어요. 


 결국 다시 한번 쓰기로 했어요. 썼던 이야기를 모두 지우고 새로운 제목을 정했어요. "환취"라고요. 시험의 답을 제출할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조바심이 나더군요. 분명 글을 다시 쓰면서 이야기 속으로 중년의 저를 또 보내 봤자, 자신을 볼 기회가 생기지 않고서는 답을 못 찾을 게 뻔했어요. 아주 간단한 답을요. 그래서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어요. 메시지를 남겨서요. 그래서 저도 이야기 속에 넣기로 했죠. 할아버지 경비원이 되어서요.      


 제가 환취를 맡게 된 건, 아무래도 저에게 땅콩이가 코를 빌려준 것 같아요. 신데렐라 유리구두처럼요. 언젠가 기억 속의 회사로 다시 가서, 답을 찾으라고요. 그리고 답을 찾으면 빌려준 코를 가져가고, 그 냄새도 없어질 거라고요. 


 이야기를 끝냈으니 이제 기다려 봐야죠. 그저 제가 죽기 전에 돌아와 주길 바라면서요. 세상 사람들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대부분의 사람들도 저와 비슷한 기다림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기다림을 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아마 저처럼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고요. 해피엔딩을 위해서요. 저의 경우엔 땅콩이를 다시 만날 때까지 두 가지를 간직하고 있어야 해요. 한 가지는 땅콩이가 저에게 남겨두고 간, 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줘야 할 말이에요.


 왜 땅콩이를 기다리냐면…. 이젠 저도 같이 밤하늘에 별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낭만적이었어요. 제 삶에 없었던 거라 정말 좋았어요. 그때만큼은 혼자가 아니었고요. 그리고 땅콩이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존재가 하나 더 있어요.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올, 이야기 속으로 보낸 중년 시절의 저 자신이요. 바로 문 군이죠. 문 군에게도 할 말이 있거든요.


  어느 날 저의 냄새가 사라지는 순간이 오면, 그건 저에게 커다란 기쁨의 자극이 될 거예요. 그러면 그 자극이 저에게 그 둘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환각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것이고요. 그래서 제 모습을 비출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전속력을 다해 갈 거예요. 뛸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럼 아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며 뛰어갈 테니까요. 신이 나서요. 커다란 거울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요. 길거리에 쇼윈도도 좋고, 지하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도 좋아요. 제 전신을 비출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겠어요. 땅콩이는 키가 작잖아요. 그리고 그 앞에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뜰 거예요. 그러면 이젠 백발의 노인이 돼버린 지금의 제 앞에,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인 문 군과 땅콩이가 나란히 있는 게 비쳐 보일 거예요.


 그리고 그 둘을 마주한 상태로 그때 짊어졌어야 할 짐이자, 앞으로도 계속 간직할 말을 해줄 거예요. 저에게 있어선 긴 세월 살면서 어렵게 찾아낸, 가장 멋과 감동이 담긴 말이거든요. 그러면 다시 같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여전히 겁이 많은 저는 어쩌면 이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릴지도 몰라요. 막상 짐이 무거울까 두려움이 생길지도 몰라요. 하지만 힘을 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제 몫의 짐을 지게 되는 순간이 될 거예요. 그러면 다시 밤하늘에 별들을 같이 볼 수 있을 테고요.     


 해피엔딩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전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문 군과 땅콩이를 만나면 이 말을 꼭 할 거예요. 



"내가 정말… 미안했다."


[소설 환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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