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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던 그 날의 시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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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그 날 따라  비가 왔던 것 같다. 그 때문일까, 선생님은 느닷없이 우리에게 시를 써보라 했다. 그때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공부가 아니라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시'란 걸 썼다. 우울하고 힘든 시기였다. 대한민국에서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평범함의 모든 조건을 갖춘 내가 자존감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덤덤하게 시란 걸 썼다.


그런데 학교가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내가 쓴 졸작을 읽은 선생님이, 전혀 그럴 분이 아닌 사람이 흥분해서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등학생이 쓸 수 있는 시가 아니야!"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깜짝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이 워낙 요란을 떤 덕분에 주변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까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물론 대학 진학과 전혀 무관한 '잔재주'였으나 나는 그 작은 소동으로 인해 아주 조그만 희망을 품게 되었다. 아 나도 잘하는게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주는 위안이 적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 그 해 가을에 학교 문학제가 있었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전시하는, 해마다 펼쳐지는 평범한 행사였다. 사실 이 문학제가 의미하는 바는 문학 그 자체보다는 공인된 작은 일탈이 주는 해방감일지 모른다. 주변 여학교에서 찾아오는 여고생들이야말로 이 작은 축제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이었다. 그녀들은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초콜릿이나 사탕을 액자에 붙여두곤 했다. 아무튼 이런 행사에 출품할 시를 모집하는데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다들 나는 당연히 뽑힐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내부 선발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불과 몇 달 새에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른 국어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고 불러 세웠다.  '그때 시를 쓴 그 친구'임을 확인한 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걸으며 내게 이렇게 말하셨다. "먼저 사람이 되라. 시는 그 다음이야." 나는 그 말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글쓰는 것과 무관한, 사람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글 좀 쓴다고 으스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몸소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문학이 아닌 마케팅과 브랜딩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바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얄팍한 글쓰기 재주는 타고난 데가 있었다. 어린 시절 문학 관련 상이란 상은 내가 도맡아 타곤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재주란 글쓰기의, 책쓰기의 아주 일부분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30년을 돌아 돌아 삶의 원칙, 지혜들을 배웠다. 그런 수련을 거치고 나서야 '살아내는 것'의 어려움을 담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식과 정보가 아닌 경험의 힘을 담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새삼 그 때 그 선생님의 조언이 빛나게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가 가장 나다울 때는 글을 쓸 때라는 점이다. 남들보다 조금만 노력해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빛을 발하려면 세상의 필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글쓰기의 잔재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지혜 없이 자신의 재주에만 기댄 성과는 매우 위태롭다. 초년의 출세가 중년의 상처, 노년의 빈곤 만큼이나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쓰기보다 사람 되기에 마음을 쏟는다. 경험을 담은 진실된 글을 쓰고자 애를 쓴다. 그것이 비오던 그 날, 내가 쓴 한 편의 시를 통해 배운 가장 소중한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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