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창업 멘토링을 위해 어느 대표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달려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을 불과 1시간 정도를 앞둔 때였다. 갑자기 또르륵 하고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창업 관련 서류 준비 때문에 오늘 미팅은 힘들겠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불같이 화가 났다. 1시간 전에 약속 취소도 그렇지만, 그 이유가 서류 작성 때문이라니... 다소 당혹스럽다는 내용의 문자를 남겼다. 그랬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가 왔다. 그렇게 7통의 전화가 오니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8번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전화를 걸었다. 까칠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인간관계 그렇게 쉽게 끊는 것 아니에욧!!!"
비즈니스 약속과 무례함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그런 분의 멘토는 되어드리기 힘들 것 같다는 얘기를 하자 쏟아져 나온 반응이었다.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인 항의로 끝이 났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단 나를 멘토로 선택해준 기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저런 분이라면 분명코 전화를 해서 항의할텐데... 그러면 지난 3,4년 간 다져온 믿음과 신뢰가 산산히 부서질지도 모르는데... 같은 자문을 받는 멘토들도 저 분 때문에 나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텐데... 그러자 급기야 내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낸 것은 아닌지, 전화를 해서 상황을 무마해야 하는건 아닌지 하는 마음이 슬금 슬금 일기 시작했다. 소심하고 마음 약한 내 모습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때 기관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표님, 잘하셨어요."
으잉? 내가 잘했다고요? 의아심을 품고 전화를 받은 내게 담당자가 조목조목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이유 불문하고 한 시간 전에 약속을 취소한 건 그분 잘못이다. 울며 불며 전화를 해왔지만 잘라 말했다고 했다. 다른 멘토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 대표가 사과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만 말렸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멍한 기분으로 있었다. 그 대표는 어머니의 항암 치료 때문에 하루 전에 약속을 옮긴 나를 원망했었다. 자신도 사정을 봐주었으니 이 정도는 봐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게 과연 한 시간 전에 약속을 취소할 명분이 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그렇지' 하고 덜컹했었다. 그런데 제3자인 기관 매니저의 얘기를 듣고 나니 내가 얼마나 소심한 사람인지가 분명해진 것이다.
평생 매 맞고 사는 아내들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부부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지, 왜 이혼을 하지 못하는지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아내들의 이야기를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매일같이 맞다 보면 '어쩌면 내가 잘못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의 나는 바로 이런 아내들의 심리를 꼭 닮아 있었다. 미안함에, 소심함에 내가 먼저 사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회사 생활이 어려웠던 것도 바로 그런 심성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의 주관이 없기 때문이지 착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이제서야 종종 깨닫곤 한다. 게다가 가스라이팅에 능한 일부 소시오패시들은 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든다.
자기 잘못이 분명한데도 무턱대고 우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세상이다. 오죽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담이 다 있을까.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심성이 착해서, 남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삶의 방식을 택하다 보니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올바른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아니다. 우겨서 되는 일이란 걸 알면 그들은 또 다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대할 것이다. 그건 착한 게 아니다. 삶의 지혜도 아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손절도 해야 한다. 그래서 받는 불이익이라면 눈 딱 감고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 말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틀렸을 때 흔쾌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지혜가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채, 상대방이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할 수 있는 평정심이다. 그 날 나의 실수가 하나 있다면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로 상대방의 도발?에 응했다는 거였다. 전화는 받아야 했다. 그리고 조곤조곤 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했었다. 그 날 내가 한 실수가 있다면, 그건 바로 평정심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못했다는 그 한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