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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마주하는 삶과 누룽지 백숙

초등학교 시절, 나의 가장 간절한 바램 중 하나는 메이커 가방을 사는 일이었다. 정부미가 아닌 일반미로 지은 도시락을 싸가는 일이었다. 키가 조금만 더 커서 줄의 중간 쯤에 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노트북을 대여섯 대씩이나 샀는지도 모르겠다. 10대 이상의 키보드도 모자라 툭하면 쇼핑몰을 들락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살이 너무 쪄서 맛있는 임금님표 쌀을 두고도 굳이 현미를 먹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170을 넘기지 못한 내 키를 의식조차 하지도 못하게 됐다. 이렇게 나의 수많은 결핍들이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언가에 목 마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제야 깨닫게 된 셈이다. 내가 무엇을 그토록 목말라 했는지, 그 결핍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질투가 나의 힘인 시절이 있었다. 비교와 경쟁이 삶의 원동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는 주말에 나와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회사 대표가 어느 매장으로 데려가 옷을 사주었다. 마감을 하느라 눈의 실핏줄이 터진 모습을 보고는 흐뭇해 하며 속옷?을 사주기도 했다. 물론 이런 '부스터'를 사용하는 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것이 인정이든 성과이든, 그조차도 아니면 내면의 뿌듯한 성취감이건 무언가를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오래 가기 힘들다는 거였다. 미래의 모든 내 에너지까지 끌어와서 쓰다보니 더 큰 결핍을 초래하곤 했다. 마치 황금알을 더 얻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과 비슷했다. 바닷물을 먹은 듯 갈증은 더 커져갔다. 그리고 그 끝이 없는 욕망을 몸과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나의 우울과 공황은 아마도 그 때의 결핍이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일의 완급을 조율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무엇보다 나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할 때 최고의 성과를 내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이 동하는 날이면 불과 수 시간 만에도 좋은 네이밍과 카피와 마케팅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다. 항상 기분 좋은 결핍의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다. 하나의 일에 90과 100의 에너지를 쏟아 버리는 일은 때때로 위험한 선택이 된다. 금방 지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80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애쓰곤 한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며 몸과 마음에 여백을 만들고 한다. 더 멀리, 더 오래 달리기 위해 숨 고르는 법을 배운 셈이다.


물론 때로는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성과의 달콤함 만큼이나 매력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인생은, 비즈니스는 마라톤에 가까울 때가 많다. 과한 욕심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살아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자연스럽게 삶의 속도를 조율하게 된다. 모든 힘을 쏟을 때와 잠시 쉬어갈 때를 구분하게 된다. 이건 물리적으로 시간을 구분하는 워라밸과는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결핍을 지닌 사람인지, 그 결핍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충만한 삶은 존재하지 않음도 깨달아야 한다. 동양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여백 때문이다. 완벽해 보이는 인간의 허당미가 사랑스러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얼마 전 시계를 선물한 친구가 고장이 났다며 투덜거리는 톡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물놀이를 갔다가 제대로 방수가 되지 않아 서비스 센터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AS 직원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경찰까지 찾아온 실랑이를 벌인 끝에 시계를 완전히 부셔버렸노라는 톡을 보내온 것이다(좀 다혈질인 친구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방수가 되는 시계를 친구의 집으로 주문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항상 함께 해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가 가진 문제와 고민에 비하면 친구의 결핍은 아주 쉬운 것이다. 그냥 10만 원 정도 하는 시계 하나를 사주면 끝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존재가 내게 주는 힘과 위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평소의 그 고마움에 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웃으며 방수가 잘 되기로 유명한 지샥 시계를 사줄 수 있었다.


살다 보니 알게 된다. 인생은 수많은 문제와 결핍으로 이뤄진 기나긴 여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걔 중 많은 부분은 돈과 명예로도 채워지는 것들이다. 문제는 해결하고 결핍은 채우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조금 복잡한 존재이다. 부와 명예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더 큰 갈증을 불러온다. 그런 결핍으로 인생을 망가뜨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정말로 내 인생의 결핍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보자. 돈과 명예로 채울 수 있는 삶의 결핍들을 정면으로 맞딱뜨려 보자. 나는 그 중 하나가 '관계'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온전한 단 하나의 관계가 없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다 말고 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그리고 집 가까운 식당에서 누룽지 백숙을 먹기로 했다. 할 일 많은 주말이지만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기분 좋게 배가 고픈 토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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