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보고 잇다, 애프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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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극장에서 본 영화를 차례로 넘버링해서 메모해 두고 있다. 적지 않은 목록들을 훑어보니 영화 제목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기록이 되었다. 작년엔 유독 좋은 영화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마음이 많이 머물렀던 영화가 있다. 누가 그랬던가. 좋은 영화란 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는 영화라고. 이 영화가 내겐 그랬다. 바로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_things to come>.
여기 나탈리라는 한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의 자녀들은 장성해 엄마의 품을 떠났고, 25년을 산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떠나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탈리는 삶이 끝난 것도 아닌데 별일 아니라며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평생을 애증의 관계에 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은 철학교수로서의 일에서도 점점 설자리를 잃어간다. 게다가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한다고 여겼던 애제자로부터는 생각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말뿐인 지식인이라는 지적을 받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이 중년의 나탈리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일들이다.
영화는 이 무참히 ‘다가온 것들’에 대한 나탈리의 반응을 응시한다.
그리고, 얼마 후 난 이 영화와 꼭 반대편에 있는 듯한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우리에겐 비포 시리즈로 각인된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이 영화는 전작과는 다른 유쾌한 코미디 영화다. 제이크라는 야구부 새내기 대학생을 중심으로 개강하기 전까지 3박 4일 동안 나누는 여자와 술, 파티, 마약 이야기다. 청춘은 청춘이되 유치찬란하고 자유분방하며 시끄럽기만 한 나흘 동안의 에피소드들. 슬라보예 지젝, 귄터 그라스, 파스칼의 팡세가 언급되며 슈베르트의 가곡이 흐르는 <다가오는 것들>과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영화다. 난 왜 이 B급 청춘물을 보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떠올렸을까.
그건 영화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달라서는 아니었다. 두 영화가 묘하게 연결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청춘들이 마냥 흥청망청 놀다가 끝나는 영화는 아니다.
링클레이터는 청춘들의 입을 통해 하고픈 말을 비교적 직설적으로 전해준다.
“신이 시지프스에게 고통을 줬다고? 난 시지프스에게 집중할 것을 줬다는 걸 축복이라고 생각해. 그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과제를 준 것이지. 남들 눈엔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노력할 일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모든 일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의미가 생겨.
다가올 일들을 받아 들이겠다는 거지. 좋은거든 나쁜거든 상관없이.
세상이 뭐라하든 무시하고 내가 할 일을 하는 것,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갖는 것.
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열정을 갖게 된다는 것, 너무 아름답지 않아?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야.”
‘다가올 일들을 기꺼이 받아 들이겠다.‘는 열정 넘치는 스물 남짓의 제이크와 성취하고 가진것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는 중년의 나탈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연장선에 서 있다.
이제 ‘다가오는 것들’에 서 있는 나탈리를 보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나탈리는 두 번 우는데, 한번은 엄마의 장례식 후 버스 안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전적으로 자신을 존경한다고 여겼던 제자 파비앵의 가시 돋친 말을 들은 후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파비앵은 나탈리에게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상은 뒤로 둔 채 적당히 참여지식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부르조아라고 말해 버린다. 나탈리는 티내지 않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흐느끼며 아파한다.
하지만, 정말 나탈리는 그런 사람인가?
그녀 역시 젊은 시절 파비앵처럼 열정을 지니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자였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가치에 따라 공산당 전단을 뿌리기도 했고 소련에까지 다녀올 정도로 말이다. 나탈리는 파비앵의 여자 친구에게 말한다. "예전에 다 해봤던 거야. 난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었어."
난 나탈리의 말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탈리 역시 자신만의 모양으로 제이크처럼 파비앵처럼 그런 청춘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녀는 단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치대로 살았고 그러다 현실을 직면했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목도했을 거다. 그건 타협이 아니라 실용적인 순응이고 인정이다.
나탈리는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눈물 흘리지만,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갑자기 닥친 사라지고 잃어가는 것들 앞에 의연하고 담담하다.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받아들인다. 사실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영화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던 이유다.
일상에서 예상치 못하고 툭 튀어나오는 한 가지 이슈에도 이내 휘청대고 마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본다면 나탈리의 담담함이 얼마나 고매한 일인지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나탈리를 그렇게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을까?
그것은 철학교수로 살아오면서 채웠던 그녀의 지적 충만함이었다. 원래 철학이라는 것이 ‘나’의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하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서나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나의 내면을 가꾸고 살아가는 자기 객관화의 과정 말이다.
파비앵과 제이크로 대표되는 열정의 청년기. 그들은 자신의 가치대로 행동한다.
현실에 대한 불안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만 그보다는 기대함이 더 크다.
한창 뜨거운 청춘이다. 하지만, 청춘이 뜨거운 만큼 버텨내야 할 권태로움도 존재한다.
그들은 아직은 시지프스의 권태와 허무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갖는 이상과 핑크빛 미래에 대한 기대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의 자세가 나이브하다고 폄하 할 수 있을까.
세상이 뭐라 하든 무시하고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갖고 열정적으로 내가 할 일을 하는 나이.
그들은 그 세계에서 옳다. 그리고 굳건히 서서 상실을 통해 온전한 자유를 얻은 나탈리 역시 그렇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각자의 세계에서 가장 적절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닐까.
무지개가 7개의 고유의 빛을 가지지만 결국 하나의 무지개 색이듯이.
그게 삶이다. 나탈리와 제이크와 파비앵은 자신들이 서 있는 세계에서 각자의 색을 내고 있고, 영화는 그들을 통해 그 고유의 색이 어떻게 더 아름답게 빛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무지개는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다.
by 안티노미, '애프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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