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리뷰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르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싹둑싹둑 끊어진 지식들은 끊어진 면발처럼 힘이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호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6.29 선언... 각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그 사건들을 연결짓진 못했다. 어떤 흐름과 맥락에서 나온 단어들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끊어진 기억들은 힘이 없었다. 그래서 감동도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 끊어진 매듭들을 이어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했다. 그냥 불의한 시대가 낳은 희생양, 안타까운 대학생 한 명의 죽음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내 안의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만일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이라면, 작가라면 이 ‘다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2시간 정도의 디지털 필름안에서 조합하고 편집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1987년에 일어난 그 사건의 의미와 진실을 전달할 것인가. 나는 그 해답을 눈물을 참지 못했던 마지막 장면에서 찾았다. 그야말로 전 국민이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바로 그 장면,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반쯤 일어서 있던 그 장면이다. 영화 속 카메라는 이한열 사진을 조심스럽게 훑고 내려가다 신발에서 멈춘다. 바로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 내가 자주 신었던 ‘타이거’ 운동화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극의 중반 청춘 남녀가 데모 현장에서 만나던 이야기를 기억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청춘의 가슴 설레는 ‘유쾌한’ 이야기가 마지막의 ‘비극’적인 장면에서 비로소 조우할 때 내 안에서 나즈막한 ‘오열’이 터져나왔다. 영화적 편집의 힘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울었다. 사실이 아닌줄 알았지만 나는 안다. 그보다 더한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그 ‘한 장면’에서 시작해 조금씩 시침을 거꾸로 돌린다. 우울한 시대의 작고도 행복한 이야기를 조밀하게 배치한다. 마치 뇌관으로 이어진 긴 도화선을 거꾸로 따라올라가듯이. 그 시절의 이야기가 역대급 조연들을 무대 삼아 촘촘히 연결된다. 마지막 장면이 그토록 극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의 그 비극적인 일이 없었더라면, 영화 속 작은 행복들이 유지될 수 있었을 거란 기대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현실과 기대를 넘나들며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이 영화의 진실을 잘 알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의 모든 고민은 아마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어떻게 관객들을 불러들이고 끌어올 것인가. 그 해답은 결국 ‘공감’에서 찾아야 한다. ‘맞아, 저랬었지, 나도 저 시대를 살았어’라는 내적인 독백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공감’이 안타까움과 죄책감으로 연결되도록 도와야 한다. 이 영화는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복고의 재현, 그 자체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그 비극적인 시대에, 누군가가 목숨을 잃고, 목숨을 걸고 ‘민주화’라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하고 있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책망하지는 않되 그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단 그 시대 속으로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썬데이 서울, TV 가이드, 마이마이 카세트, 그리고 타이거 운동화는 그래서 이 영화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고증을 거쳐 현실감 있게 재현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은 서슬퍼런 시대의 현실을 묘하게 중화시킨다. 그래서 영화는 무거우면서도 가볍게,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두 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을 늘어지지 않은채 이어간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의 스토리가 고마웠고 반가웠고 신선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리뷰를 쓰기로 했다.
영화의 마지막 그 장면 까지도 나는 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영화를 벗어나 실제의 장면, 사진들과 교차되면서 감정의 보호막이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내가 보았던 TV 가이드를 그들도 보았다. 내가 들었던 마이마이를 그들도 들었다. 내가 신었던 신발을 그들도 신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희생 위에 행복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지금껏 큰 절망 없이 살아왔다. 지금의 행복 어느 하나도 거저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여느 다른 영화가 주는 감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값싼 동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과 깨달음은 바로 이한열 열사의 힘없이 늘어진 ‘타이거 운동화’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도 겪었을 캠퍼스의 낭만과 가슴 설레는 행복들이 저 어딘가에서 날아온 불의한 한 발의 최류탄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그 비극이 더 많은 사람들의 의로운 항거를 불러왔다. 그렇게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이 영화에 과연 무어라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스토리의 ‘비극’을 어떻게 조그만한 ‘희망’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빚진 자로서의 미안함, 빚진 자로서의 책임감, 빚진 자로서의 안타까움을 넘어 어떤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아마도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나라를 허물고자 하는 불의한 의도를 감시하는 것이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항거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작년의 그 추위를 뚫고도 ‘당연하게’ 광화문 촛불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시대를 지키고자 하는 온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고 한껏 고무된채 그 거리를 걸었던 것이겠지. 그런 우리의 모습이 박종철, 이한열 두 대학생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겠지. 다시금 ‘타이거 운동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노라고. 지금도 우리는 이 나라를 지키고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