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s 다이어리 #11.
야구를 사랑한 한 남자가 있다.
키 크고 잘 생긴 이 남자의 이름은 빌리 빈, 스탠포드대 전액 장학생과 명문 구단 뉴욕 메츠의 러브콜 앞에서 그는 '돈'을 선택했고, 이후 그의 삶은 추락을 거듭한다. 초라한 선수생활을 마감한 그는 결국 가난한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이 되었고, '돈'이 아닌 통계와 과학의 힘을 믿고 대담한 도박을 한다. 영화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실제 인물을 통해 이 시대, 그리고 미국에서 '야구'가 가지는 개인적인 그리고 때로는 국가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한 장면이 있다.
빌리 빈이 정규리그에서 20연승의 대기록을 세운 후, 돈 많은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에게서 최고의 연봉을 제안받은 직후다. 고민에 빠진 그에게 이 모든 실험의 설계를 맡았던 오른팔 격의 피터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그를 비디오실로 데려간다. 비디오에선 큰 덩치 탓에 발이 느린 어느 선수가 홈런을 치고도 안타인 줄 알고 1루를 더듬는 장면이 나온다. 홈런을 치고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그가 바로 '빌리 빈'이라는 의미였다. 이 장면을 보던 브래드 피트(빌리 빈)가 앉아 있던 의자에 온몸을 실어 기지개를 켜며 이렇게 말한다.
"이러니 내가 야구를 좋아할 수 밖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기존의 틀에 박힌 스포츠 영화와는 차별화된 스토리 전개에 끌렸다. 하지만 아무리 프로선수라 해도 그 쓰임새에 따라 가차없이 짐을 싸서 내보내는 그들의 '프로다운' 모습엔 기가 질렸다. 심지어 야구를 숫자 놀음으로 이해하는데 반대하는 빌리 빈의 반대쪽 인물들에 더 마음이 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앞서 말한 그 장면 때문에 빌리 빈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구단의 승리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 힘은 바로 '야구'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나왔음을 말이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도박에 가까운 그의 실험과 도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200만 불에 달하는 사상 최고의 연봉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학이란, 그리고 가치란 뜬금없는 그 무엇이 아니다. 미국 프로야구의 도도한 관례를 뒤흔들 수 있을만큼 강력한,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다. 좋은 브랜드 역시 이런 가치와 철학을 가진 창업자에게서 나온다. 누가 뭐라 해도 반드시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원칙, 남이 하는 평범한 방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만들어내는 인내... 모든 것이 브랜드가 될 수 있지만, 좋은 브랜드가 많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원칙과 방식을 인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 이종욱과 손시헌에 이어 최준석 마저 두산을 떠났다. 무늬만 팬인 내게도 슬프고 충격적인 소식이다. 두산의 내년은 과연 어떠할까? 과연 빌리 빈이 아닌 그 누군가가 '두산만의' 야구를 보여줄 수 있을까? 야구를 돈벌이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사랑'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건 그저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