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뭔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둘의 균형을 잘 지키는 삶이 더 건강한 삶은 아닐지. 그렇다고 해서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심지어는 매일 만 보를 걷기 시작한 것도 나의 영역에서는 생산적인 일일지 모른다. 나의 두 발로 동네 곳곳을 누비면서 나도 모를 에너지가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그 덕분일까? 요즘은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가 더욱 솟아오른다. 그래서 시작한 것 중 하나가 그림 그리기다. 몇 년 전에도 시도했다가 실패한 스몰 스텝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구를 준비하는 것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아이패드와 펜슬을 장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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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요즘은 그림 그리기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유튜브 채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이패드용 앱인 '프로크리에이트'다. 약간의 동영상 시청만으로도 사용법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여타의 프로그램과 비슷한 기능을 지닌 듯 하지만 훨씬 더 직관적이다.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브러쉬의 크기와 농도를 동시에 조절할 수 있다. 겨우 몇십 분의 유튜브 구독만으로도 몇 개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럴 때면 도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한다. 막막하기만 했던 그리기가 한결 더 쉬워졌다. 그래서 요즘은 틈 날 때마다 영상으로 툴 사용법을 익히고 간단한 그림을 수시로 그려본다. 그 시간의 몰입이 머리를 맑게 만든다. 그 시간만큼은 희한하게 다른 잡다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로지 손 끝의 감각에만 온마음을 쏟을 수 있다. 뭔가를 소비하지 않고 생산하면서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니.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와이프에게 결과물을 보여주지 대뜸 이렇게 말한다.


"그거 그려서 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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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답한다. '그냥'이라고. 그 대답 밖엔 할 말이 없다. 뭘 하려고 그린 건 아니니까 말이다. 얼마 전 카페에서 어느 노신사를 만났다. 커피와 베이글을 시키고 넋 나간듯 앉아 계셨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노인이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면 한결 나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놓고 있던 영어 원서를 다시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나이가 들면 이태원으로 가서 외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 그들의 모습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주요한 주제는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어떨 때 가장 큰 에너지를 얻을까? 어떻게 살 때 가장 자기답다고 느낄까? 사람 살이가 다 비슷하니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자란 그들에게서는 남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공원에서 소일하거나 노인정을 방문하는 것 보다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림을 그리는 노년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신이 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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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면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 어떤 사진이든, 어떤 물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오래도록 쳐다보면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특징들에 주목하게 되고, 그 대상에 애정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림을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빛을 조절하는 일이다. 모든 물건은 빛을 반사하는 하이라이트와 그늘을 동시에 가진다. 대상을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이 빛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렸다. 유튜브를 통한 그림 그리기 수업을 받다 보면 가장 많이 배우는 가르침이다. 그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사람을 바라보는 일도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보는 것은 아닐지. 그 사람의 장단점을 균형있게 바라볼 때 온전히 그 대상을 이해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하루 중 얼마 만큼은 무엇을 만드는 일에 시간을 쏟아보자.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 적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삶의 지루함과 무력함에서만큼은 확실히 벗어날 수 있다. 생산적인 삶을 살자. 더 건강하게 소비하기 위해서라도. 혹시 또 누가 아는가. 그 과정을 통해 나도 몰랐던 또 하나의 파이프 라인을 만들 수 있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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