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사실 되고 싶다고 되는 직업도 아니지만). 하지만 출근하자마자 콜라캔을 쥔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자유로운 토론을 이어가는 ‘업클로즈 앤 퍼스널'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기자는 정말로 멋있어 보였다. 아마도 새벽녘 수산시장에서나 만날 수 있을 듯한 날 것 같은 생동감에 본능적으로 끌린 탓이리라. 실제로 지금의 미국을 만든, 그리고 오늘의 우리나라를 만든 에너지의 근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인상적인 몇 개의 기사를 훑어보다보니 그 ‘믿음'에 약간의 변화와 균열이 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녁이 있는 삶'이 사치스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도, 이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과 학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링크에 열거한 몇 개의 기사들은 모두 그러한 시점에서 다양하게 접근한 기사나 인터뷰나 글들이다.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더 이상 현재를 희생하려 들지 않는다. 대기업이 아닌 자신에 맞는 ‘일’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도 보이고, 아예 치열한 경쟁을 피해 안분자족하는 이른바 ‘사토리 세대'의 등장도 예사롭지 않다. 무조건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라는 주문이 더 이상 통하는 않는 시대가 이미 도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치열한 경쟁, 그 결과로 오는 지위와 혜택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대열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루저'로 바라보지 않는 시각도 건강하다고 본다. 다만 그 중간에서 방황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가혹한 미래가 다가올 것 역시 명백한 현실이다. 다만 이러한 노력이 한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교육이나 취업, 기업 경영과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예견처럼 잘 사는 사람은 더욱 잘 살고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삶은 빈곤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 내가 정말 좋아했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뉴욕타임즈'에 기고를 했다. 그가 쓴 책과 글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하고 용기있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이와 같은 ‘지혜’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나는, 느끼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 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