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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탑건: 매버릭 37번 본 이야기

우리가 잊고 산 가치에 대하여

by 페로 제도 연구소

나는 탑건: 매버릭을 엄청 좋아한다. 배경음악처럼 깔아 둔 OTT까지 합치면 훨씬 더 되겠지만 3년 간 영화관에서만 37번을 봤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특별관 위주라 할인이 안 돼서 티켓값만 74만 원이 들었다. 뭐, 밥 먹으며 슈카월드를 보는 게 취미 생활인 내게 좋아하는 콘텐츠가 생겼다면 3년 간 이 정도는 수용할만한 지출이지.


내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워딩은 좀 과장해서 적었지만 '주작 ㄴㄴ 영화관 가면 돈 쓰지, 왔다 갔다 해야 하지, 불편한 자세로 봐야 되지. 근데 집에서 넷플만 딸깍 하면 돈도 시간도 아낄 수 있는데?'같은 반응이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커뮤니티의 썰이 공중파 뉴스가 되는 시대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단 아묻따 인증부터 하고 얘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무엇에 꽂혀서 한 영화를 이토록 영화관에서 반복해 봤을까. 영화에 깊은 조예는 없어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인류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혹은 했던) 사람 1로서 솔직한 감정에 집중해 써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탑건: 매버릭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여러 이유로 잃어버린 가치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상기시켜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러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것 같다.


하도 탑건 짤을 저장해놓다 보니 애플 사진 앱의 '사람들' 메뉴에 매버릭 얼굴이 뜬 건 덤. (형은 왜 여기서 나와...?)




MBTI로 나를 소개하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신뢰도를 떠나 오늘날 이만큼 나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나는 ENFJ다. 주요 키워드로는 인간 중심 · 이타주의 · 감수성 · 상호 존중 · 조화 · 협력 · 다양성 · 포용성 뭐 이런 것이 있다.


꺼무위키를 빌려보자면 ENFJ 특징 중 내가 크게 공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류애, 연민, 동정, 이해심이 대단히 많다.
-선악의 구분이 다소 확실한 편이다.
-대의명분, 사회 제도에 충실하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정도 되겠다.


내 삶의 큰 변화를 줬던 몇 가지 일을 생각해 보면 어떤 지식이나 커리어의 향상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에서 시작된 일이 대다수였다. 대학생 때는 보수적인 집단의 부조리함을 바꿔보려 노력했고, 일부에게 주어진 특권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과 기회를 가지는 방향으로 집단을 변화시켰다. 물론 저학년 때는 그런 부조리나 특권이 집단의 질서 유지에 반드시 필요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했던 부끄러운 적도 있지만... 작더라도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면 서로에게 감사하는 사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때는 그게 조금 먹혔던 것 같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그 행동의 결과는 (적어도 내 관점에선) 이기주의로 돌아오더라. ENFJ의 성향이 강한 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고 하던가. 가치관도 그렇다.
믿음 → 배신→ 타락 → 후회 → 더 강한 믿음 더 → 강한 배신 → 더 강한 타락...의 무한반복 굴레에 빠졌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 그로 인한 상처와 '그래도 나는 이래선 안 돼.'라는 치유가 반복됐다. 더 깊은 상처와 더 깊은 믿음이 서로 경쟁한 끝에 내 마음은 공허와 같은 상태가 돼버렸다.


한참을 무기력하게 살던 중 친구와 얘기하다가 탑건 얘기를 들었는데 볼만하다는 말에 극장으로 향했다. 원래 영화 취향이 굉장히 확고한 편이고 전투기(특히 2차 대전), 배(특히 조선 수군) 싸움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왠지 모르겠지만 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비행기 디자이너의 꿈을 품고 3개월이나 복무 기간이 긴 공군에 입대했던 그때가 잠시 생각이 났던 것 같다. 별 기대도 없어서 CGV의 일반관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4관에서 봤다. (특수 포맷으로 상영하는 기대작은 최대한 일반관에서 보지 않는 성격이다.)



140분의 러닝타임이 지난 후, 상영관을 나오기도 전 자리에 앉아 2회 차를 바로 예매해야만 했다.

*아래 이야기부터는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 부탁드려요. 알고 봐도 크게 지장은 없어요.



1. 과거에 대한 존중

옛것은 비효율적이고, 옛사람은 꼰대로 포장되는 게 요즘 시대의 인식이다. 제사는 부조리며 핼러윈은 즐겨야 할 서양의 새로운 문화다. 이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36년 전의 작품인 1편에 대한 존중으로 시작한다


오프닝 씬에서의 동일한 연출, 동일한 폰트, 동일한 색감. 관객을 36년 전의 그날로 돌려보내면서도 전작의 장점을 그대로 답습한다. 심지어 더 세련 돼졌다. 덕분에 아버지와 함께 간 아들은 희열의 웃음을, 아버지는 36년 전 자신을 생각하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매버릭이 최신식 기체 '다크스타'를 타며 영화의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다음엔 F-18 슈퍼호넷, 그다음엔 은퇴한 F-14 '톰캣'으로 점점 낡은 기체로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마지막으론 창고에 주기된 경비행기 P-51D '머스탱'을 타며 행복을 되찾은 매버릭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또, 이 영화의 존재 자체가 OTT 시대에 '극장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엔진이 점화되는 순간 진동이 느껴지는 영화관 의자, 대형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비행,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장면에 함께 웃고, 영화가 끝난 뒤 벅찬 감동에 힘껏 박수를 치고 싶지만, 한국 영화관과 한국인 정서상 그러지 못해 아쉬움을 느끼는 동질감까지. 영화관에서 많은 영화를 봤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앉아있는 편인데, 박수가 나온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했다. (10년 간 우리와 함께 한 어벤저스: 엔드게임도 8번 봤는데 그때도 박수는 안 나왔다.)


최신의 것만이 최선으로 포장되는 오늘날 이러한 감동을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이처럼 탑건: 매버릭은 내가 멀리하고 잊으려 했던 '과거'에 대한 존중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2. 인정과 화해

솔직하면 독이 되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더 크게 두드려 맞는다는 게 오늘의 우리 모습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 그것을 받아주어 화해로 나아가는 가치가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 일깨워준다.

작품 초반 악역의 포스를 풍기며 등장하는 '행맨'(좌)이라는 인물이 있다. 행맨은 극 내내 매버릭의 사고로 죽은 파트너 '구스'의 아들 '루스터'(우)와 마찰을 빚는다. 행맨은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인데, 작중 내내 루스터를 갈구다가(이것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최종 선발에서 루스터에 밀려 미션에 참여하지 못하고, 갑판에서 예비기로 대기하게 된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행맨이 앙심을 품고 비행기를 고장 내 루스터가 위기에 빠지거는 것과 같이 긴장을 유발하고 인물의 악함을 강조하는 도구로써 캐릭터가 소비된다. 특히 갑판에서 둘이 마주하는 씬에서는 행맨이 루스터를 굉장히 꼬롬하게 바라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루스터에게 부정적인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그 선입견을 녹여주는 한 마디가 등장한다.


본때를 보여줘!(You give 'em hell)

라이벌이었던 행맨이 루스터를 응원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행맨이 루스터를 인정하고, 건투를 빌어준다. 이후 모든 위기상황이 해소되고, 둘은 갑판에서 만난다.


물끄러미 루스터를 바라보던 행맨은 루스터에게 먼저 악수를 청한다. 흐뭇하게 웃던 루스터는 행맨의 악수를 받아들이고 둘은 진정한 동료가 되며 장면이 마무리된다. 이 장면에서는 인정과 화해, 화합의 가치가 마음 깊숙이 다가왔다.



3.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도전

요즘 들어 '어차피 집도 못 사는데 뭐 하러 열심히 일함?',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뭐 하러 노력함?'과 같은 비관적 메시지가 많이 들려온다. 특히 맡은 자리에서 하루하루 우직하게 노력하는 게 쓸모없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무인기가 군을 지배할 것으로 믿는 '체스터 케인' 소장은 '곧 미래는 다가올 거고, 그 미래에 파일럿은 없다.(the future is coming and you're not in it.)'라고 얘기한다. 마치 코로나와 AI, 비대면, 언택트 시대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모든 것이 기계화될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문을 나서던 매버릭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짧지만 매버릭의 삶을 관통하는 한마디를 외친다.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Maybe so, Sir, but not today.)

이후 매버릭은 '탑건'이 위치한 기지에 배치받고, 바이크를 타며 뿌듯한 표정으로 활주로를 질주한다. 미래는 변화하겠지만 마치 매버릭이 '우리는 인간이고 미래에도 그 가치는 유효할 것'이며 결국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선언처럼 들려 특히 감명 깊게 느껴진 것 같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이처럼 탑건: 매버릭은 내가 지금껏 추구해 왔지만 희미해지고 사라진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가 실현됐을 때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가치가 내게는 벅찬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영화관에 37번이나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전투기 영화 뒤에 숨은 다양한 가치를 느꼈기에 36년 만에 등장한 속편임에도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코로나와 영화값 상승이라는 악재가 겹침에도 10번 넘게 재개봉하고 8백만 관객을 달성할 수 있었겠지.


영화관에서 38번째 탑건: 매버릭 티켓을 구매할 날을 기다리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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