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룹장이었던 임원이 중간관리자들과의 회의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 임원은 그룹원들과 정기적으로 일대일 면담을 했는데, 면담에서 당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회사 전체에 미치게 될 파급효과를 직원들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큰 비전을 보여주어 조직원들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몇 직원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의 의도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회사가 잘되는 것은 알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저한테 좋은 것은 뭔가요?"
이 당돌한 질문에 임원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는 회사와 자신을 일체화시키지 못하는 직원을 한심하게 생각했을 수도, 아니면 자신이 몰랐던 직원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라고 해도 해줄 수 있는 말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프로젝트가 성공해 사업화가 이뤄지면 네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며 결국 몸값이 크게 올라갈 것이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임원은 그들을 그저 애사심이 부족한 직원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팀원들의 동기부여에 대해 중간관리자들과 함께 고민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하지만, 부장급들이었던 우리 중간관리자들에게도 딱히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우리도 그저 팀원들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와 연차와 경력이 더 쌓였을 뿐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팀원이나 스스로에게 내적 동기를 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히 일해 성과를 내면 좋은 고과, 연봉 상승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좋은 고과가 쌓이면 진급이 빨라진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뿐이었다.
미국으로 이직한 후 한동안 바쁘게 보냈다. 초반에는 가족이 미국으로 합류하기 전이라 가사나 육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나는 퇴근 후 홀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노트북을 열어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했고 낮에 보던 문서들을 다시 읽곤 했다. 그 시기에는 빠르게 새로운 일터에 적응하고 업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합류한 이후에도, 미국 생활에 적응한 지금도 일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퇴근 후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도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다시 책상에 앉아 낮에 하던 코딩을 이어가곤 한다. 누가 그랬는가, 실리콘밸리엔 야근이 없다고. 야근의 정의가 '밤에 일을 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이곳에도 야근은 존재한다. 단지 장소가 회사가 아닐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만난 새로운 팀원들도 각자 자리에서 꽤나 열심히 일한다. 여기서 '열심히'란 ‘부지런하다’기보다 ‘스스로 일을 잘 찾아’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일을 선택하는 자유도가 높은 R&D 직군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이들에게는 자기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동료들과 공유한다. 몇 번의 내부 토의를 통해 아이디어는 다듬어지고 제안자의 프로젝트가 된다. 다소 미래지향적 주제라면 당분간 연구로만 진행하고, 수년 내 사업화가 가능하면 사업부 엔지니어들과 협업을 시작한다. 프로젝트 주체자는 직접 유관부서의 엔지니어들에게 연락해 회의를 잡는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실제 상용화 가능한지 사업부 인력들에게 스스로 검증받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기술적 결정은 실무자들이 직접 내린다. 매니저는 프로젝트들의 진행사항을 담당자들과 일대일 면담을 통해 파악하지만 기술적 디테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가끔씩 운영상 이슈가 발생하면 팀원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고 필요할 때 조언을 할 뿐이다.
이런 자기 주도적인 문화는 연구원들이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도 한다. 적게는 1-2개, 욕심이 있는 친구들은 4-5개까지도 동시에 해낸다. 가끔씩 밤 시간 온라인에 접속했을 때 사내 메신저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시킨 것도, 스케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성과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을 잠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 회사에 인터뷰를 볼 때 면접관으로 들어왔던, 현재 의 팀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우리 회사가 좋아. 경쟁사인 X사의 연구팀과 달리 내가 한 연구가 우리 회사의 다양한 제품에 직접 반영될 수 있거든. 그게 아니었다면 난 X사 갔을 거야.” 이 친구에게 동기부여는 자신의 기술적 영향력에 있었다. 자신이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제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이 친구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구 주제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점심을 같이하던 옆 팀의 또 다른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제로 이직에 뜻이 없더라도 2년마다 직무 시장(job market)에 나가보곤 해. 내 몸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거든.” 이 친구는 자신의 성장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능력을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환산하면서 경력 향상에 집중했다. 결국 그는 몇 년 뒤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중의 한 회사로 이직을 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강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면 그것이 언젠가 결과로 돌아온다는 일종의 믿음이다. 그 결과라는 것은 제품 기여를 통한 성취감, 늘어난 사내 영향력, 한층 향상된 자신의 경력과 연봉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 그들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하면 된다'라는 식의 자기 암시와는 결이 다른 감정이다. 이러한 확신은 직간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인이, 옆 자리의 팀원이, 나아가 자신이 소속한 팀과 조직이 회사를 변화시켰던 경험을 쌓을 때 자연스럽게 '나라면 할 수 있다'라는 의욕이 생겨나는 것이다. 직원들이 이러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을 가질 때 동기부여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실리콘밸리는 동기부여가 충만한 직원들에 의해 동작되고 있다.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들에게는 현재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곧 자신의 커리어가 되고, 그 노력만큼 결국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것이 일자체가 주는 성취감이든, 승진, 이직을 통한 연봉 상승이든 말이다. 이러한 이들이 함께 모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제품으로 출시되어 사용자들에게 전파된다. 개인은 경력을 한 단계 성장시키고 적정 수준에서 이직을 시도해 자신의 가치를 키울 수 있게 된다. 시간과 장소를 옮겨가며 발생하는 이러한 선순환이 실리콘밸리 전체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회사들도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자 주기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다양한 성과보상 시스템을 도입하며 보다 나은 조직문화를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통해 직원들의 목소리를 전달해도 회사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직원들은 회의적으로 변한다. 신상필벌을 강조하며 보상을 통해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한계는 명확하다. 만족감은 상위고과를 받은 몇 명에게만 돌아갈 것이고, 그 효과도 오래가지 않는다. "공부 열심히 하면 게임기 사줄게"라고 유혹해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궁극적으로 직원들의 내재된 욕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해 줘야 한다. 회사의 일이 개인의 경력 향상에 도움되도록 이끌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직원들의 의욕은 높아진다. '힘들게 가르쳐 봐야 회사 나가면 그만'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재직 시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회사를 위해서도 이득이다. 동기부여가 잘된 직원이 회사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모쪼록 그건 '실리콘밸리니까 가능한 이야기'라며 회의적이 되지 말기 바란다. 개인들도 회사가 '자기 효능감'을 주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회사는 개인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인지하고, 현재 내가 하는 일이 내 경력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본인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 5년 뒤, 10년 뒤 개인 커리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현재의 직무에서 채워나가면 된다. 무슨 일이든 배우는 것은 있다.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스킬 셋(skill set, 역량)은 남는다. 그렇게 착실히 준비하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승진이든, 이직이든, 창업이든 말이다. 커리어 목표지향적으로 사고를 전환하면 그렇게 궁금해하던 '회사에서 나한테 좋은 것'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자기 효능감'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본 글은 블라인드의 웹진 브리핑스에 칼럼으로 기고한 글의 초안입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ontheward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