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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Jul 14. 2024

한국과 미국 엔지니어가 느끼는 불안감의 차이


그들이 해고를 당했다. 2년 전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지사 오피스로 잠깐 출근을 했다. 그들은 그때 만났던 로컬 R&D 엔지니어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미국 매니저 Y의 지도 아래 충실히 실적도 잘 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국에 방문했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 본사로부터 갑자기 통보를 받고 하루아침에 짐을 쌌다는 것이다. 그 하루 전날 미국의 매니저 Y도 해고통보를 받았다 했다. 미국의 매니저 Y는 한국에 있을 때 같은 회사에 있던 지인이었기에 그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레이오프가 일상이 되어버린 실리콘밸리라 특별할 것은 없지만, 현재 회사는 대규모 정리해고는 좀처럼 하지 않는 회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직업 안정성이 좋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사에 날만큼 큰 규모만 아니었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지적으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회사는 역시나 미국 회사였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언제나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불안감'이다. '언제든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따라서 미국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한다면, 이 불안감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고 딱히 대안은 없다. 회사가 나를 내치기 전에, 내가 회사를 먼저 내치는 방법 외엔. 다른 회사에서도 통할 도메인 지식과 스킬 셋을 쌓아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린 뒤 주기적으로 이직을 하는 것 뿐이다. 만일 자신보다 먼저 회사가 나를 내칠 때를 대비하여, 언제든 경쟁사로 재취업 가능하도록 평소에 자신의 스킬 셋 호환성을 높여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안전하다. 적어도 회사가 나를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니 말이다. 최근엔 노조도 강화되고 있고,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정년까지 무탈하다. 학령인구 감소, 노령화 가속으로 과거처럼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권고사직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엔지니어들만이 느끼는 새로운 '불안감'이 있다. 슬슬 업계 짬이 찾을 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언제까지 있을까?', '관리자가 되지 않은 채 은퇴할 때까지 실무자로 버틸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이 찾아온다. '벌써 10년 차이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경력자가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위의 시선'이 불안하다. 하루가 다르게 최신 기술이 쏟아지는데, 현재 회사에서 legacy 업무만 하다 보니 '엔지니어로서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하다. 


그래서 이 불안함을 다스리기 위해 끊임없이 주경야독으로 선행학습을 한다. 뜨는 기술을 찾아 헤매는 것이 엔지니어로서 '자기 계발'이라고 믿는다. 혹시나 실리콘밸리의 멘토를 만나면 질문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지금 뭐가 뜨고 있나요? 지금 제가 뭘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까요?"


한국의 엔지니어가 느끼는 이러한 불안감의 근원은 바로 '미국과 한국의 IT 기술격차' 때문이다. IT 산업은 언제나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은 늘 이 영향권에 놓인다. 미국에서 원천기술이 발현되면 시차를 두고 한국으로 전파되고, 한국에서는 이를 응용한 서비스와 제품을 개발한다. 미국과는 기술 투자 예산이나 시장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진득하게 연구 개발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한 기술이 떠오르면 어떻게든 이를 응용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상품 개발에 주력한다. 다루는 기술의 깊이는 얕고, 주기는 짧아진다. 유행은 쉽사리 변한다. 언제 미국에서 새로운 기술이 넘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발자, 엔지니어가 자신의 일에서 '영속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엔지니어가 나이가 들면 좀처럼 그 쓸모를 보여주기 힘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그가 경험했던 기술이 '현재' 더 이상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말그대로 '목을 내놓고' 근무하고 있지만, 한국 엔지니어들이 갖는 불안함은 느끼지 않는다. 바로 그 세계 IT 기술의 진원지에서 근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회사가 IT업계를 선도하기 때문에, 본인의 업무시간에 다루고 익히는 기술이 바로 State-of-Art다. 부가적으로 스킬 셋을 공부할 수는 있지만, 자기 계발을 위한 '선행 학습'이 아닌 업무상 필요해서 일뿐이다. 한 업계, 한 도메인에서 회사 로드맵에 따라 새로운 제품 개발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면, 그렇게 보낸 시간들은 제품의 역사와 함께 고스란히 경력이 된다. 그렇게 한 업계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는 동안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도메인이 안정적이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기술이 뜬다고 부화뇌동할 필요가 없다. AI가 핫하다고 본업을 버리고 우르르 몰려가지 않는다. 자신의 업무에서 이를 어떻게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지 고민할 뿐이다. 그것이 AI를 대하는 실리콘밸리의 비-AI 엔지니어의 자세다.  

   


'불안감'은 엔지니어가 은퇴할 때까지 느껴야 할 숙명과도 같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의 엔지니어가가 느끼는 불안감은 태생적으로 그 이유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불안감을 본인이 잘 다스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진로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남은 커리어 기간 동안 한 직업인으로서의 행복이 달려있을 테니 말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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