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테르 더 호흐 <델프트의 집 안뜰>
시간은 정말 빨리 흐른다.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은데, 가끔씩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해있다. 깜짝 놀란다. 일에 집중하다가 예정된 회의 시간을 놓쳤을 때, 달력을 보다 미국에 온 지 벌써 5년 차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동차 등록이나 아파트 렌트 갱신을 알리는 통지서가 날라 올 때, 그리고 어느 날 아내의 흰머리가 부쩍 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역시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벌써 한 시간이, 한 달이, 일 년이 가버렸어"
허둥지둥 회의에 들어가고, 얼마 남지 않은 은행 잔고에서 돈을 꺼내 자동차 등록비를 내고, 1년 만에 렌트비가 또 오른 것에 한숨을 쉬며, 세월의 풍파를 혼자 맞은 것 같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으면서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탓한다. 야속하지만 부질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흐르니 말이다.
하지만, 매일 보던 아이의 얼굴이 변해있고 키가 부쩍 컸음을 깨달을 때만큼 시간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다. 작년에 산 신발에 아이의 발이 안 들어가고, 옷이 작아져서 입히지 못할 때 "어이구, 우리 새끼 많이 컸네!" 라며 대견한 듯 딸과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역시 서운함이 몰려온다. 녀석들이 이렇게 쑥쑥 자라 내일이라도 훌쩍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 남은 것은 10여 년뿐이다. 아이가 아직 어린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의 1/3을 벌써 보낸 셈이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을 붙잡아 둘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여지없이 아이들과의 순간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첫째 딸아이가 '드디어'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교육 기관에 아이를 처음 보내보는 우리 부부는 입학 몇 달 전부터 긴장되고 하는 일 없이 분주했다. 거주 중인 학군의 초등학교에 서류를 보내 아이를 등록한 뒤, 온라인으로 열리는 학부모 사전 미팅이 있으면 꼬박꼬박 참석했다. 필요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지만 늘 뭔가 불안했다. "신청한 초등학교에 인원 초과되면 다른 학교로 배정된다는데 어쩌지? 애가 학교에 적응은 잘하겠지? 아직 영어를 잘 못하는데 친구 잘 사귈 수 있을까?" 아내는 밤마다 남편을 붙잡고 조바심을 털어놓았고, 낮이면 미국에 온 뒤로 알게 된 지인들에게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초조한 마음을 다스렸다.
드디어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를 가게 되던 날, 아내는 평소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들이 갈 때나 싸던 도시락을 싸고, 보온 물병에 물을 담아 아이의 가방에 담았다. 몇 주전부터 '아마존'에서 디자인을 따져가며 고르고 골라 산 가방이었다. 그리고 행여나 빠진 준비물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오늘이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날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꿀잠을 자고 있는 아이를 서둘러 깨웠다. "예나야, 일어나. 학교 가야지". 잠에서 덜 깨 칭얼대는 아이에게 옷을 힘겹게 입힌 뒤, 가방을 들쳐 멘 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대문을 나서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우리 부부가 비로소 학부모가 된 것을 실감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어느 날이었다.
빨간, 갈색의 벽돌로 쌓은 집 건물 외벽, 안뜰 바닥을 채운 타일 블록, 그리고 창문과 건물에 사용된 목재의 낡음에서 이 집이 지어진지 족히 수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다지 넉넉해 보이지 않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법한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다. 외출을 준비 중인 것 같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작은 여자 아이가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온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다정하게 느껴진다. "엄마, 어디 가는 거야?" "응, 이모할머니랑 장 보러 갈 거야. 같이 갈 거지?" 계절은 푸른 하늘에 구름을 띄우고 이들의 머리 위에 꽃을 피워내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피테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활동하던 화가였다. 왕과, 귀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던 프랑스, 이탈리아의 화가들과 달리, 네덜란드인들은 시민들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왕권, 힘으로 국민을 찍어 누르던 여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왕은 국민 위에서 군림하지 않았고 국민들이 더욱 자유롭게 세계 무역과 생산에 힘쓰도록 지원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행정부와 같은 의회, 시민사회를 가장 먼저 열었다.
오늘날까지 이 나라를 견인해 온 세력은 재력과 실력 있는 '부르주아'라 불리는 이 시민세력이었다. 따라서, 문화의 주요 소비층은 왕과 교회가 아닌 바로 시민이었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이었던 이 나라의 시민의식이 예술을 소유하고 향유하는 안목까지 길러준 셈이다. 네덜란드, 벨기에를 아우르는 플랑드르 지방의 회화양식은, 서양 미술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주인공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대중이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로 꽃 피웠다.
더 호흐는 이러한 소시민의 삶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 고향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에서 활동하던 시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일상의 단면을 화폭에 즐겨 옮겼고, 그래서 너무 나도 평범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그림을 보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물감은 값비싸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튤립이 가득한 정물이나 화려한 파티보다 누군가의 작은 행복의 순간에 아낌없이 색을 입혔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그래서 난 잠시 자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흐의 해바라기,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뿜어내던 강렬한 색채와 명암에 정신을 못 차렸던 내 눈이 이 그림을 통해 잠시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연말 휴가를 쪼개 머나먼 영국까지 날아갔던 나는 전혀 뜻하지 않던 그림 한 장에서 작은 안식처를 발견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한 소시민의 일상, 진솔함이 물씬 묻어나는 이 장면에서 마음이 따듯해졌고, 여행의 동선에서 이미 네덜란드 델프트를 거쳐왔던 나는 이 그림에서 왠지 모를 향수마저 느꼈다.
내 미술관 여행과 함께했던 안내 책자에서는 그림 속 여인이 엄마가 아니라, 이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을 것이라 했다. 엄마는 집 앞에서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뒷모습을 보이는 또 다른 여인이라고 했고, 앞 뜰을 쓸고 있던 남루한 옷차림의 하녀가 주인집 딸의 외출을 돕는 장면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소녀와 소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이 여인의 시선에는 영락없이 엄마와 딸의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Welcome Back!"
입학과 개학에 맞춰 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몰려들었다. 학교는 코로나로 오랜 기간 집에서 갇혀 지냈던 아이들을 위해 입구부터 다양한 풍선과 장식으로 이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모두들 자녀들의 첫 등교의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는지 아이를 캠퍼스 여기저기에 세워두고 연신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우리 부부도 질세라, 어젯밤 정성을 다해 장식했던 "First Day of School" 칠판을 어색해하는 아이에게 들려주고, 사진 앱을 열어 학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품안에 간직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딸아이는, 처음 만나는 담임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교실로 향했다. 엄마의 손을 떠나 자신의 등보다 배는 커 보이는 가방을 멘 채 교실로 뛰어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아내와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담벼락에 서서, 교실 앞에서 줄을 서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아이를 집에서 돌보며 지켜만 주던 '부모'에서, 이렇게 아이를 학교로 보내야 하는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감정의 요동을 불러일으켰다. 아빠로 살아가는 한 겪어야 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하나지만 내게는 너무도 평범하지 않던 순간이었다. 더 호흐의 그림에 담겼던 누군가의 일상이 평범한 모든이들에게 특별하게 다가간 것처럼 말이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