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사기업 연구소의 차이
오늘은 내가 몸담고 있는 미국 대기업 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연구를 업으로 계속하고 있다. 한국에서 11년, 미국에서 5년간 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보니 양국에서 같은 듯 다른 부분을 알게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경험과 비교해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단순 일대일 비교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양국의 산업계, 사회, 문화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큰 흐름에서 한국과 미국 기업 연구소가 하는 일을 소개해, 한국이든 미국이든 연구자(Research Scientist) 커리어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 또한, 내가 많은 회사를 경험해 본 것이 아니기에 이 글이 대표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미국의 반도체 대기업 연구소에 국한된 이야기 일수도 있으니 하나의 예로써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당연하게도 기업 연구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당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는 것이다. 개발 부서와 다른 점은 그 방식이 '연구'일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같은 '연구'라 할지라도 학교 대학원이나 국책 연구소와 성격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학교, 국책 연구소는 비교적 학문적인 성취에 의미를 더 두고 순수 연구를 지향한다. 그에 비해 사기업 연구소는 철저히 소속 기업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제품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 물론, '연구'라는 일의 성격상 연구소는 학계과 접점이 많다. 따라서 사기업 연구원들의 업무도 학계의 교수나 국책 연구소 연구원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다뤄 보겠다.
회사에서 제품을 개발할 때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다. 통상 몇 세대 이후의 제품들까지 함께 고려한다. 그리고 각 세대별로 개발 일정과 로드맵이 있다. 사업부의 전략부서는 세대별 제품에 탑재될 새로운 기능(feature)을 미리미리 계획한다. 세대별로 기능을 선별할 때 시장성, 투자 대비 수익 등 여러 가지 사항을 따져 신중히 고려하게 된다. 여기서 회사마다 프로세스와 그 기준이 다를 수 있다. 회사가 보수적일수록 그 기준이 엄격하고, 다소 개방적이라면 새로운 기능을 제품에 포함시키는 것에 적극적이다. 후발 주자의 위치에 있는 회사들이 주로 후자의 경우가 많다. 신기능을 포함한 제품을 시장에 먼저 출시해 선발 업체를 따라잡으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기능을 제품에 탑재'하는 것은 개발 착수 시점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능이 얼마나 새로운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개발 부서가 신기능에 대해 설계, 구현을 시작하려면 그에 대한 개념 증명(POC, Proof of Concept)이 이미 끝나 있어야 한다. 개념 증명은 새로운 기능이 제품에 얼마나 이득을 주는가를 사전에 미리 파악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별도로 구현된 소프트웨어, 수학적인 모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뤄진다. 중요한 것은 개발 부서는 기능 탑재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를 갖고 개발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A 기능을 넣으면 성능이 얼마큼 좋아진다. B 기능을 넣으면 전력 소모가 얼마큼 줄어든다와 같은 최소한의 이유 말이다.
그 근거를 만들어 주는 과정, 즉 개념 증명의 단계가 바로 기업 연구소에서 하는 '연구 활동'이 된다. 그래서 기업 연구소에서의 연구란 '자사의 미래 제품에 들어갈 기능들에 대한 타당성을 분석하고 그 이득을 사전에 도출해 개발 부서의 제품 개발을 돕는 행위'로 요약될 수 있다. 상용화를 염두하기 때문에 연구소와 개발 부서는 평소에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한다. 연구소가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는 그 기획 단계부터 로드맵 상의 특정 제품과 연결되고, 연구소의 연구원과 사업부의 엔지니어들은 수시로 소통하게 된다.
물론 사기업이라고 해도 연구소의 모든 연구 주제가 일대일로 제품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회사도 반드시 제품화가 가능한 연구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제품과 연계되는 근미래(1~5년)에 쓰일 기술뿐만 아니라, 장기간(~10년)을 내다보고 보다 큰 주제의 연구도 수행해야 한다. 회사는 현재 주력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돈을 잘 벌어 들이고 있지만, 미래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탐색도 게을리하지 않고 이를 준비하는 별도의 연구 팀이나 조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즉 기업이 연구소를 두는 목적이라는의 측면에서, 사업화 연계, 미래 준비라는 존립 이유는 한국과 미국은 큰 차이가 없다.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 운영, 실행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다소 차이가 있다. 위계 조직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한국 기업에서 대체로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할 때는 일정한 리뷰 프로세스를 거친다. 연구팀 책임자는 미래의 시장성, 제품과의 연계, 예상되는 이득 등 이 연구가 필요한 이유를 상위 조직장에게 발표를 통해 검수를 받아야 한다.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셈인데, 마치 스타트업 CEO가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자들 앞에서 피치를 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착수가 결정되면 해당 연구팀의 연구원들은 비로소 자신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각 연구원 개개인의 역할이 더 강조되는 미국 기업에서는 공식적 프로세스 없이도 프로젝트 착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개인이 직접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바로 실행할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동료들과 공유해서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매니저와 약식 토론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프로젝트 기획의 전부다. 만일 이 아이디어가 수년 내 제품에 탑재될 가능성이 있으면 사업부 엔지니어와 논의 과정을 거쳐 기존에 계획되어 있는 제품 로드맵에 포함시킨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순수 연구 프로젝트로 진행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업부의 다양한 엔지니어, 아키텍트와 연구팀의 연구원들로 운영되는 상시 워킹 그룹(Working Group)이 가동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조직문화나 직제의 차이에서 온다. 한국의 대기업 연구소의 조직 구조는 개발 부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그룹 CEO > 원장(사장급) > 소장(부사장/전무급) > 랩장(전무/상무급) > 그룹장(상무/부장급) > PL(부장/과장급)와 같이 일반 회사 직제처럼 비교적 수직적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의사결정에 걸리는 단계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리고, 실무 연구원과 상위 의사 결정권 자간 직접 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미국 대기업 연구소는 사업부서에 비해 비교적 계층이 단순하다. 예를 들어, 그룹 CEO > 디렉터(사장/전무급) > 소장(상무급) > 팀 매니저 처럼 비교적 수직적 계층은 짧다. 대신 조직의 수평적인 문화가 강조된다. 따라서 실무 연구원과 의사 결정권 자간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고 소통의 창구도 열려있는 편이다.
연구소 운영을 위한 예산의 측면에서 한국과 미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소는 1차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운용 비용은 대부분 사업부의 주머니에서 나오게 된다. '돈은 우리가 댈 테니 너희는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라'와 같은 느낌이다. 다만, 미국 회사에 따라서 100% 사업부의 예산으로 운영되지 않고, 일정분은 연구소가 국가 과제를 수주해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학교나 국책 연구소와 유사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업 연구소도 많은 대학 연구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 간의 필요가 맞기 때문이다. 기업 연구소는 학교의 학술적 업적 및 우수한 인적 자원을, 학교는 기업의 풍부한 자원(즉,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협력 프로젝트 착수는 회사마다 일정한 프로세스가 있는데, 발주 > 제안서 > 리뷰 > 계약 등의 과정은 양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대학과 협력을 하는 형식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은 규모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협력 과제가 '회사는 연구비 지급, 학교는 연구 결과 제공'의 형식을 띤다. 회사는 최초에 목표 설정과 마지막 결과 인수 단계에 주로 관여하고, 실제 연구는 계약 기간 내에 학교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편이다. 프로젝트마다 다르겠지만, 협력 연구도 일종의 외주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에 비해 미국은 성격이 약간은 다르다. 물론 한국과 마찬가지로 '연구비 지급, 결과 제공'의 형식을 갖는 협력 과제도 있다 (주로 미래 지향적이고 대형 과제). 다만, 미국은 인턴쉽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연구 인턴을 통해 대학 연구실과 협력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연구비를 학교 연구실에 직접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된 인턴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형식이다. 또한 인턴쉽이기 때문에 연구는 실제로 회사와 학교가 함께 진행하는 형태가 된다.
인턴쉽은 비교적 정식 협력 과제에 비해 착수까지 들어가는 수고(제안서, 계약서 등등)가 불필요하지만, 그 기간이 짧아(통상 3개월) 연구 지속성 측면에서 불리한 면이 있다. 따라서, 기간이 끝나 인턴이 학교로 돌아가더라도, 온라인 미팅 등 비공식적으로 협력을 계속 지속하곤 한다. 필요시 인턴쉽 기간을 연장하기도 한다. 연구비를 공식적으로 지불하는 정식 과제가 아니기에, 인턴쉽을 이용한 학교와 회사의 협력관계는 비교적 동등한 파트너십의 형태를 띤다.
연구소 분위기를 보자면, 대학원 연구실과 회사 개발부서가 적당히 섞여 있는 것은 미국과 한국이 유사하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국은 태생적으로 수직적 조직문화가 강한 것은 연구소라 해도 마찬가지다. 의사 결정 단계가 많고 엄격하기 때문에, 개인이 연구 주제를 선정하기 어렵고, 연구 외 페이퍼 워크도 많다. 프로젝트 일정도 대체로 꼼꼼하게 관리된다. 사업부에 기술 이전을 하는 것이 가장 큰 당면 과제다. 따라서,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업부는 제1의 고객이 되기 때문에 갑-을 관계가 되기 쉽다. 대체로 연구원이 논문을 쓰는 것은 크게 장려하지는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는 않다만,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커리어를 향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미국 기업의 연구소에서는 연구원이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을 장려한다. 회사에서도 '논문'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사내에게 연구 개발한 기술을 학회나 포럼에 발표해 업계 선점효과를 노리고, 고객사들에 기술을 홍보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고객사들로부터 수집한 피드백을 모아서, 사업부 기술 이전을 시도할 시 활용하기도 한다. 연구원의 결정권이 높기 때문에 연구 주제 선정, 일정 관리, 사업화, 기술 이전 등 모든 연구 활동을 개개인이 주도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조직문화가 수평적이라 동료, 매니저뿐 아니라 디렉터급 연구 임원과도 슬랙(slack)등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히 수행하곤 한다.
한국과 미국 기업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알게 된 같은 듯, 다른 연구소의 면면을 소개해 보았다. 작성하고 보니, 한국 기업의 단점만 부각된 것 같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오랜 기간 쌓여온 양국의 기업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도 분명한 장점이 존재한다. 프로젝트 관리에 필요한 시스템은 한국이 월등히 잘 갖춰져 있다. 연구 프로젝트가 팀과 조직 단위로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경우 한국 기업 연구소의 시스템이 비교적 잘 동작한다. 그에 비해, 실무 연구자 개개인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연구 결과를 지향하는 경우 미국 기업 연구소 시스템이 잘 맞을 것이다.
모쪼록 한국이나 미국에서 연구원의 커리어를 고민 중인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다음 글에서는 실제 미국 기업 연구원이 하는 일에 대해 나눠보도록 하겠다.
- 예나빠.
예나빠 브런치 매거진 소개
미국 연구원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정보 전달 잡지
미국 오기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에서 일하니 여전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직장 에세이
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어쩌다 실리콘 밸리 - 팩션 형식으로 작성될 실리콘 밸리 입성기 (예정).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그래픽스로 읽는 서양 미술사 - 그래픽스 전공자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 교양서.
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