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과 특허는 제1의 주 업무
앞의 글 '미국 대기업 연구소는 어떤 곳일까?'를 통해 미국의 사기업 연구소를 간략히 소개했다.
오늘은 미국 기업 연구소에서 실제로 연구원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앞글에서 연구소는 대학원 연구실 + 회사가 적절히 섞여 있는 조직이라고 했다. 따라서, 대학원 연구실과 같은 듯 다른 면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야기와 한국, 미국 양국 연구원의 삶에 대해서도 비교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100% 내 경험에 의거한 것이고, 내가 속했던 한국, 미국 반도체 대기업 연구소에 국한된 이야기 일수도 있으니 하나의 예로써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연구원은 당연히 연구를 하는 것이 주 업무다. 따라서, 석사, 박사 과정 시절 대학원 연구실에서 하던 연구 활동과 비슷한 일들을 한다. 논문 읽기, 연구 주제나 아이디어 발굴, 이론 정립, 시뮬레이션, 구현, 결과 도출, 논문 작성 등등. 그래서, 기본적으로 '연구'라는 큰 틀에서 하는 일은 대학원 연구실과 유사하다. 1) 연구 결과를 정리해 논문을 쓰고 학회에서 발표하는 일, 2) 학회 논문 리뷰어나 커미티 위원과 같은 서비스와 같은 활동이 학교와 유사하다.
다만, 기업 연구소의 연구는 목적 지향적이라는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소속 회사의 제품에 쓰일 기술을 연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띄고, 주제를 설정하는 시점부터 제품화를 염두에 두곤 한다. 따라서, 사업화를 위해 3) 연구 결과를 사업부에 기술 이전하는 일도 또 하나의 주 업무가 된다. 또한 제품화와 관련되기 때문에 4) 특허를 출원하는 일도 연구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기타로 주기적으로 유입되는 5) 연구 인턴을 멘토링 하는 일도 하곤 한다.
물론 학교도 순수하게 학문적 성취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교수들, 학생들도 자신의 연구가 업계에 적용되면 그만큼 파급력을 갖기 때문에 실용적인 연구를 지향하는 편이다. 다만, 상용화가 당면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지향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그것이 학교가 기업 연구소와 차별화를 꾀하는 방법이다. 회사는 이러한 학교들과 파트너십을 통해 상호 보완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6) 학교와 협력 과제를 착수하면 이를 관리하는 일도 연구원의 업무가 될 수 있다.
여섯 가지 주 업무적인 측면에서 기업 연구소 연구원들의 일은 한국과 미국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국가, 업계의 상황, 조직 문화에서 발생하는 세부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이 차이점이 연구원 업무의 성격과 비중을 가르게 된다. 앞에서 연구소는 대학원 + 회사가 적절히 섞여 있는 조직이라 했다. 경험상 그 비율이 한국은 회사(70%) + 대학원(30%) 정도, 미국은 회사(30%) + 대학원(70%) 정도 되는 것 같다. 앞으로 6가지 세부 업무를 설명하며 그 이유를 자세히 다뤄보겠다. 세 파트로 나눠 다뤄 볼 것 예정이다.
1.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1 - 연구 논문, 특허 작성
2.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2 - 사업화 및 기술 이전, 협력 과제 관리,
3.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3 - 학회 활동, 멘토링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 학계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말이다. 학교나 회사에서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자신이 정립한 이론과 연구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 '논문'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논문은 회사 내부에서 작성하는 '기술 문서'나 '보고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공식적인 동료 평가(Peer Review)를 거친다는 점이다 (주 1). 논문이 공신력 있는 학회나 저널에 제출 또는 투고되면 해당 분야 학계, 업계의 저명 연구원, 교수들로부터 검증을 받는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학회지나 저널에 실릴 수 있게 된다 (주 2).
1) 동료(Peer)라고 하니 직장이나 학교의 동료를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는 같은 학계나 업계의 인사를 의미한다. 당연히 논문 제출자나 평가자들 간 인적 사항은 상호 공유되지 않는다.
2) 영미권에서는 동료 평가를 통과하기 전까지, 제출된 초고를 논문(Paper)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평가를 통과해 논문지나 학회지에 실리는 순간 비로소 논문이라 불리며, 평가를 위해 제출된 초고를 원고(Manuscript)라고 부른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 편의상 논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까다로운 검증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에 발표나 출판된 논문은 권위를 부여받는다. 또한 해당 학회, 저널이 얼마큼 권위 있느냐에 따라 그 논문의 공신력은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연구원, 대학원생, 그리고 교수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그리고 많은) 논문을 썼느냐가 자신의 커리어를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미국 기업 연구소 입장에서는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발표시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태생적으로 논문은 독창성(Originality) 싸움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고유의 이론, 기술을 제시하고 그 이득을 입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논문으로 인정받는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기술이라도 남들보다 늦으면 절대 논문이 될 수가 없다. 연구가 성숙하면 하루빨리 논문으로 발표해야 한다. 같은 주제나 아이디어로 연구하는 기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사는 자사의 기술을 '논문'의 형태로 발표하여 업계에서 기술을 선점하는 효과를 노린다. '이 기술은 우리가 제일 먼저 개발했고 그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라고 주장하며 동종 업계라는 들판에 깃발을 먼저 꼽는 것이다 (주 3).
3) 물론 논문이 법적인 소유권, 재산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기술을 관련 학계나 업계에 가장 먼저 노출시켜 시기적인 원천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법적인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특허(Patent)를 출원하고 등록시켜야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업계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회사는 연구 결과를 제품에 적용하기 전 우선 논문으로 발표해 기술을 선점한 뒤,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 업계에 홍보한다. 발표회나 오픈 소스 형식으로 기술을 배포하여 동종 업계 관련 개발자들에게 피드백을 수집하기도 한다. 이러한 피드백들을 모아 사내 기술 이전이나 표준화 활동 시 '이 기술이 제품에, 또는 표준에 들어가야 할 주요한 근거'들로 사용하는 것이다. 연구원 입장에서는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 논문을 쓰지만, 회사 입장에서도 기술 선점, 홍보, 업계 피드백 수집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논문 발표'는 개인과 조직이 상생하는 방식이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 기업은 연구소라 해도 논문에 그다지 주안점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원천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미국의 기업들과 달리, 제품을 빨리 생산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하기 때문에 라이선스나 구매의 방식으로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소유한 기술의 원천성이 없어 업계의 피드백 수집이나 표준화 여지도 없다. 따라서, 회사가 논문을 통해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별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 선점은 특허를 통해, 홍보는 제품 마케팅을 통하면 된다.
따라서,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의 모토를 실천하려는 연구원들은 회사보다 자신의 경력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직원으로 비치기 좋다. 주 업무로 인정되지도 않기 때문에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별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기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갖는 애로 사항이다.
연구원의 주 업무 중 하나는 특허를 작성하는 일이다. 특허는 법적으로 기술 소유권을 주장, 행사하는 방법이다. 업계는 늘 치열한 경쟁관계에 놓여있다. 자사가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개발한 기술을 경쟁사가 무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특허는 기술 소유권에 대한 법적 장치로서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막고 필요시 원 소유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기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대기업 간 특허권 침해 소송전은 심심치 않게 뉴스를 통해 볼 수 있다. 따라서, 회사는 이런 지적 재산권 확보에 상당한 주안점을 둔다. 직원들에게 특허 출원을 장려하며 출원 시마다 적정한 보상을 지불하기까지 한다 (주 4).
4) 특허를 썼기 때문에 주는 보상이라기보다 특허를 작성한 직원이 가지게 될 권리를 회사로 양도함에 따른 보상이다. 일종의 위로금과 같다.
특허 작성은 논문처럼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발굴되고, 그 신규성과 원천성을 담보할 수 있으면 곧 특허 출원을 시도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원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개발자들도 특허 작성에 참여하곤 한다. 특허 출원 시도 시 특허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사내에서 별도의 검증 절차를 거친다. 논문 제출 시 학계 저명인사들의 리뷰를 받듯, 특허를 출원할 때도 사내 직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동료 평가과정을 거친다. 연구원은 특허 작성도 하지만, 동료의 특허 초안을 평가하는 위원으로서 활동도 하게 된다.
특허가 논문과 또 하나 다른 점은 연구원이 특허 출원 전문을 작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상 아이디어를 기술(도면 포함)하는 간략한 문서 정도만 작성하고, 회사와 계약관계에 있는 특허 법인의 변리사가 출원서 전문을 작성하게 된다. 따라서, 특허를 출원하게 될 때 연구원은 변리사와 긴밀한 소통을 하게 된다.
연구원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특허 출원이다. 특히, 논문으로 공개하려는 내용에 신규성과 원천성이 있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주 5). 논문 발표를 통해 표면적으로 기술을 선점한다고 하지만,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 기술이 특허로 우선 출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문으로 발표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개된 기술, 오픈 소스와 마찬가지로 취급될 수 있다. 따라서, 기술이 논문이 외부로 공개되기 전 반드시 특허로 출원해야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5) 논문이라고 반드시 신규성, 원천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 존재하는 기술들을 조합한 경우, 다른 분야에 적용한 경우 등은 신규성은 없지만 논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논문 제출 시 특허 출원을 할 필요는 없다. 또한, 통상 특허는 '방법 및 장치'를 다루기 때문에, 장치화가 어려운 순수 알고리즘의 경우 특허로 제출하기 어렵다.
특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미국 회사 연구소 공히 같다. 그러나, 한국 대기업이 미국보다 특허 관리를 더 철저히 했고 시스템도 잘 정착되어 있다. 특허 작성, 변리사 미팅, 등록까지의 진행 과정 추적 등 일련의 과정이 보다 체계적이고, 온라인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연구원 입장에서도 수고를 확실히 줄일 수 있다.
또한 논문 제출 시 관련 특허가 제대로 출원되었는지 엄격히 관리하곤 하는데, 사내 특허팀의 변리사들이 특허상의 도면과 논문의 그림을 일대일로 대조해가며 검수하곤 한다. 특허로 확보할 권리가 하나라도 누락되지 않게 하기 위한 체계적인 프로세스다.
또한, 한국에서는 특허 작성이 고과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연초에 당해연도 업무 목표를 세울 때, 특허를 몇 편 쓸지 정하고 연말에 이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평가 시 반영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 회사는 오히려 특허관리가 좀 느슨한 편이다. 변리사와 대면 미팅도 없고, 발명자가 써야 할 초안도 한국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논문 발표 시 출원만 선결되면 되고, 한국과 같은 검수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특허를 쓰는 데 있어 연구원에게 일임하는 경향이 있다. 변리사가 해주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특허는 직원을 평가하는 데에도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개인의 경력에만 도움을 주는 정도다.
이번 글에서 연구원의 주 업무인 논문과 특허 작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다음 글들에서, 사업화 및 기술 이전, 협력 과제 관리, 학회 활동, 멘토링 업무에 대해 이어 다뤄보도록 하겠다. 많은 기대를 바란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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