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화 및 기술이전 그리고 과제 협력.
앞의 글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1'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시리즈의 두 번째 글로 오늘은 사업화 기술이전, 협력 과제 관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1.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1 - 연구 논문, 특허 작성
2.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2 - 사업화 및 기술 이전, 협력 과제 관리
3. 미국 대기업 연구원의 여섯 가지 업무 #3 - 학회 활동, 멘토링
미국 기업 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 대부분은 사업화를 염두에 둔다. 따라서, 이에 관련한 일들도 연구원의 주 업무가 될 수 있다. 사업화를 목표로 하는 연구 프로젝트는 시작 단계부터 사업부 엔지니어, 아키텍트들이 관여한다. 물론 엔지니어, 아키텍트들이 직접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연구원과 주기적으로 소통하며 연구 결과가 제품화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하게 된다. 연구 과정이 매우 실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연구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연구원은 특허와 논문을 작성하고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간다. 대신 해당 기술이 상용화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일들로 전환한다. 제품을 개발할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에게 구조와 알고리즘을 설명하고, 연구 시 개발한 프로토타입을 인도하며,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관련 기술 문서들을 작성하기도 한다. 연구 과정부터 논의에 참여한 엔지니어나 아키텍트들은 이미 연구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자연스러운 이전이 이뤄진다. 때로는 사업부가 연구 결과를 홍보하거나 표준화 활동에 반영할 테크 데모를 개발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새롭게 합류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주 1)에게 기술적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미국 회사에는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제품화 단계에 이르도록 성능을 최적화하고, 기능을 구체화하며, 필요시 추가적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을 전담하는 인력이 존재한다. 이들을 Applicatoin Engineer(AE) 또는 Developer Technology Engineer(DevTech)라 부른다.
물론 연구 프로젝트가 초기부터 사업부와 협업 모델을 갖는 것은 아니다. 연구 시작 단계에는 사업화 가능성이 낮아 보여 순수 리서치 목적으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다 성숙 단계에서 접어들면서 그 가능성도 보이고, 논문 발표 후 관련 업계의 반응이 좋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구 결과를 제품에 탑재하기 위해 사업부에 일종의 제안(Proposal)을 하게 된다. 연구원은 제안서를 작성하고 이는 일련의 리뷰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사업부는 시장성이나 투자 대비 이득 (Return of Investment)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려 제안된 기술의 사업화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듯, 미국 기업 연구원은 자신이 연구한 기술에 대해 사업화와 기술이전을 위한 일련의 업무도 수행한다. 연구 내용 전수, 프로토타입 인도, 관련 문서 작성, 엔지니어 교육 등의 일들이다.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자연스럽게 사업화 업무가 발생하는데, 상대적으로 업무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다음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하면서 함께 진행하곤 한다.
한국의 경우는 기술 이전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는 한국 기술 업계의 현실과, 특유의 조직 문화에서 그 차이가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연구소의 연구는 사업화, 기술 이전을 지향한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마다 연계될 사업부의 담당 부서가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의 제품화 모델은 자체 연구 개발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최고의 스펙을 가진 제품을 빠른 시간 내에 양산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제품에 들어갈 대부분의 부품이나 소프트웨어를 국내외 시장에서 구매한다. 그리고 제품에 맞도록 구조를 최적화하여 조립한 뒤 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부품들은 구매선들 중 가장 좋은 (가격, 성능, 품질 등의 측면에서) 것을 선택한다.
사업부는 연구소를 이런 부품사들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협력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소의 프로젝트는 착수 단계부터 사업부와 협력 관계를 맺지 않는다. 연구소의 프로젝트 진행에도 관여하지 않고, 단지 그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사업화 가능성만 따진다. 따라서, 연구소는 즉시 사업화 가능한 수준까지 결과를 끌어올려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미국 기업처럼 연구 결과를 구체화하는 사업부 전담 엔지니어도 없다. 따라서, 한국 기업 연구소의 연구원은 연구 결과를 기술 이전하기 위해, 상당히 구체적인 개발 업무 수준까지 해야 할 때가 많다.
이는 한국의 대기업이 빠른 양산을 이유로 자체 연구 개발보다 부품 또는 소프트웨어들을 사서 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구 개발조차도 미국 실리콘 밸리의 유망한 스타트업들을 M&A 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따라서, 기업 연구소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연구소 내에는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실들도 있다. 이 경우 사업부 측에서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연구 프로젝트에 관여한다. 흔치 않은 경우다.
미국의 테크 기업과 학교 연구실은 상호 보완 관계다. 학교는 기업 연구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회사가 할 수 없는 보다 미래 지향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대부분 연구를 전담할 박사 과정 학생에게 지불할 인건비다. 따라서, 학교는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구 주제를 잘 정리한 뒤 기업 또는 정부 기관에 제안서로 제출하곤 한다.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과하면 회사와 파트너십이 설정되고 법적인 계약을 거쳐 협력 과제를 착수한다. 회사는 새로운 관점의 연구 주제를 학교를 통해 내다 볼 수 있고, 학교는 연구 수행을 위한 필요한 자금을 회사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회사 측 연구원 한 명이 협력 과제를 담당하게 된다. 통상 연구소에는 협력 과제를 공모하는 시기와 절차가 있다. 공모를 위해 미국 내 유력 대학 연구실에 연구 제안 요청(Request for Proposal, RFP)을 하게 된다. RFP를 받은 연구실들은 자신의 연구 주제를 정리해 제안서를 회사에 제출하고, 회사는 내부 리뷰를 통해 과제를 선발하게 된다. 선발 이후 연구소와 학교 측 법무팀이 참여하여 기밀 유지 협약 (Non-disclosure agreement, NDA) 및 계약서를 작성, 서명한 뒤 법적으로 연구 파트너십을 맺게 된다. 통상 연구 기간은 1년-3년까지 진행하고, 학교 측 교수는 회사에 방문하여 해마다 중간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필요한 행정적인 업무, 계약관계 검토, 그리고 연구 진행 시 필요한 관리 업무 등도 회사 측 담당 연구원이 하게 된다.
미국과 한국 기업 연구소의 협력 과제 관리는 절차상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국 기업에서는 이러한 공식적인 협력 과제는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큰 주제를 다루는 대형 과제에 국한되곤 한다. 근 미래를 위한 협력은 대부분 인턴쉽으로 해결한다. 연구 과제의 인도물은 그다지 폐쇄적이지 않은 편이다. 연구 과정 중 구현한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이를 오픈 소스화 하기도 한다.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에 함께 논문을 쓰고 발표하기도 한다. 연구 인도물을 사내로 국한시키지 않기에 약간은 공익적 성격도 갖는다.
한국은 연구소에서 인턴쉽 제도를 거의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대형과제, 중소형 과제 모두 학교와 협력의 형식으로 진행한다. 따라서, 미국보다 더욱 다양한 과제의 형식이 존재한다. 협력 기관도 국내 및 해외 대학일 수도 있다. 미래지향적인 연구 주제를 다루는 대형과제부터 다분히 개발 외주 성격의 소형 과제도 존재한다. 미국과의 큰 차이는 인도물에 있다. 연구비는 연구를 지원하는 의미보다, 연구 결과를 취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적인 측면에 가깝다. 따라서, 인도물 검수에 철저한 편이며, 특히 학교와 회사가 공동 소유하는 지적 재산권은 반드시 포함시킨다. 오히려 논문 작성은 강제하지 않는다.
개발 외주 성격의 협력 과제를 하게 되는 학교는 그 결과로 연구 논문을 작성하기가 쉽지 않다. 신규성이 없어 학술적인 가치가 적기 때문이다. 참여 대학원생들은 회사와의 협력 과제를 통해 자신의 학술적 업적을 내기 쉽지 않다. 다만, 과제에 참여하면서 회사 연구원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졸업 후 해당 기업에 취업을 하기 용이한 장점이 있다.
이상으로 연구원의 주 업무인 사업화 및 기술 이전, 협력 과제 관리에 대해 살펴봤다. 다음 글은 시리즈 마지막으로 학회 활동, 멘토링 업무에 대해 이어 다뤄보도록 하겠다. 많은 기대를 바란다.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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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