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소득 X% 이내
"돈을 제일 잘 버는 직업이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라며?"
'직업'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던 원어민 영어선생 J. 그가 수업시간에 수강생들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발작버튼을 눌렀다. "거기 엔지니어가 왜 들어가!"라고 발끈해 버린 것이다. 직업에 귀천도 없고 나는 내 업을 사랑해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사, 변호사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엔지니어가 의사 변호사랑 동급이면 내가 미쳤다고 새벽같이 일어나 매일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겠냐고.
하지만 J는 미국에서의 인식은 그렇다고 부연했다. 반신반의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미국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점이. 미국병이 향수병으로 진화한 지금, 미국 생활 6년 차인 나는 과연 J가 했던 말에 긍정할 수 있을까? 자, 그렇다면 미국에서 '엔지니어'는 위상은 어느 정도 일지 알아보자.
미국 노동통계청(Bureau of Labor Statistics)이 발표한 2023년 엔지니어 직군 평균 연봉은 아래 표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 있는 세부 직군만 따로 보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중윗값은 $132,930 ~ $140,830 한화로 1억 7~8천만 원 정도다.
여기서 혹자는 '에게- 너무 적은데?' 하실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실리콘 밸리 엔지니어는 수십만 불 우습게 땡기던데?'라며 딴지 걸지 마시라. 주의해야 하는 건 실리콘 밸리의 연봉은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거품이 가득 찬 캘리포니아 시세라는 것이다. 또한 그 거품에는 상당 부분 회사가 부여하는 자사주식(RSU)이 차지한다.
반면에 이 통계는 미국 전체주에 걸쳐 집계한 평균값으로 현금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만을 계상한 결과다. 따라서 대표성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통계를 하나 더 보자.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가 2019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 미국 상위 1%, 5%, 10%의 평균 연봉은 다음과 같다. 몇 년 전 자료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최근까지 상위 25% 소득생활자의 연봉 상승은 평균 2% 정도에 그쳤다 하니 최근 통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상위 10%가 되려면 캐시로만 연 최소 $167,639 (한화 약 2억 2천만 원)를 벌어야 한다. 위에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중위 평균 연봉은 $132,930 ~ $140,830라 했다. 결론적으로 엔지니어는 미국에서 상위 10%에 들지 못하는 직군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에서 고소득 직군은 무엇일까? US News & World Report가 발표한 2023년 미국 고소득 상위 랭킹 25 [3]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위부터 10위가 모두 의사다. 그렇다. 미국에서도 의사는 무소불위의 연봉킹 직업이다. 어른말 틀린 것 하나 없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공부 잘하면 무조건 의사가 진리다. 골치 아픈 이공계 공부하느니 같은 노력으로 메디컬 스쿨에 가서 의사 면허증 따는 게 가성비 갑인셈이다. 미국 백인들이 공대보다 의대, 경상대, 법대를 더 많이 가는 이유가 다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외노자에게 미국 엔지니어 일자리가 오는 거지.
엔지니어 직군 쪽을 보면 11위에 IT 관리자가 포진해 있고, 일반 엔지니어로 보면 22위, 23위까지 내려가야 한다. 엔지니어는 결국 관리자 트랙을 타야 연봉을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실무 엔지니어는 마케팅/세일즈 매니저, 약사, 변호사, 검안사, 정치 과학자보다 후순위다 (그런데, 변호사가 생각보다 못 버는 게 의아하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느 직군이나 아웃라이어는 존재하고 개인 능력에 따라 해당 직군의 평균 연봉은 우습게 넘는다. 회사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일잘러 엔지니어는 고속 진급해서 의사 연봉정도 쉽게 돌파한다. 또 누구는 스타트업이 대박 나서 한순간에 백만장자가 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경우다.
그러니 연봉으로만 따지자면 미국에서 엔지니어가 절대 상류층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밥 벌어먹고 사는데 큰 지장 없는 중산층 수준인 셈.
그렇다면 정성적으로 봤을 때, 미국 엔지니어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상일까? 사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사회적 지위란 통상 연봉, 교육 수준, 살고 있는 지역 등으로 대략 짐작하는 데, 이는 결국 돈이다. 그래서 중산층인 엔지니어는 사회적으로도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딱 그 정도 수준의 지위다.
다만 의사, 변호사처럼 '자격'을 통해 전문직임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공학 학위, 전문 지식, 테크 업계의 경력등을 통해 엔지니어가 한 분야의 전문가(Profession)라는 인식은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의사와 같은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거나, 변호사 같은 대중의 존경은 받지 않지만 말이다.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한다. 둘째 아들 녀석이 고교를 졸업할 때 즈음, 아빠처럼 '엔지니어'가 되겠다 공대를 가겠다 했을 때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아빠를 따른다니 기특한 녀석'이라며 흐뭇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들내미의 선택을 힘껏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여전히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아니,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니?'라며 만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런 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 직업의 가치가 자본주의적 기준에 따라 순위 매겨질 수는 없다. 의사는 생명은 살리고, 변호사는 약자를 보호하고, 엔지니어는 인류에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공한다. 사회적인 위상과 별개로 각 직업들은 '사람을 위한다'는 저마다 그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업'을 은퇴할 때까지 가능한 즐겁게 영위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일도 이미 자본주의에 잠식된 내 가치관을 벗어던지려 발버둥친다. 과연.
- 예나빠
예나빠 브런치 북/매거진 소개
자기계발/정보전달
글로벌 오덕 엔지니어 성장 로드맵 - 한국의 공학도/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연재중)
미국 오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 엔지니어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원/엔지니어에 대한 정보 전달
에세이
내일은 실리콘 밸리 - 어느 중년 엔지니어의 곤궁한 실리콘 밸리 이직담 (완).
미국에서 일하니 여전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직장 에세이
미국에서 일하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직장 에세이 (완)
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작은 메세지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미술관으로 간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완)
교양
그래픽스로 읽는 서양 미술사 - 그래픽스 전공자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 교양서.
표지 이미지 출처: unplash
[1] https://www.investopedia.com/personal-finance/how-much-income-puts-you-top-1-5-10/
[2] https://www.fool.com/the-ascent/personal-finance/articles/whats-the-income-of-the-top-10-5-and-1/
[3] https://money.usnews.com/careers/best-jobs/rankings/best-paying-jobs?sort=median-sal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