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버리는 저녁들에 대하여
(이미지출처 : 네이버)
퇴근길에 괜히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다가도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마음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배는 고픈데 숟가락을 드는 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밤.
그럴 때면 늘 생각한다.
오늘 하루 동안 나를 지탱하느라
어디까지가 마음이고 어디까지가 몸이었는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마음의 포만감
먹지 않은 감정이 배를 채우는 날이 있다.
출근길에 삼킨 말,
괜히 예민해 보일까 봐 넘긴 표정,
누군가의 말 한 줄에 괜히 마음 한 조각이 눌렸던 순간들.
감정의 잔여물들은 어느새 저녁의 배 속을 먼저 차지해 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는 걸 앞에 두어도
입맛이 없는 건 음식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포만감’에 다다른 상태라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정서중심치료(Emotion-Focused Therapy)에서는
이런 감정을 '미해결 된 감정(unfinished business)'이라고 부른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오래 머물며
신체 감각, 특히 식욕으로 드러나는 현상.
우리는 그걸 일상 언어로 그냥
"오늘은 입맛이 없네"라고 말할 뿐이다.
저녁의 무게
나이가 들었다는 건
입맛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을 흔드는 감정의 무게가 늘어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서른 즈음에는
일보다 감정이 더 힘들 때가 많아지고,
마흔 즈음에는
감정보다 ‘버틴 하루’의 잔여물이 먼저 찾아온다.
그렇다고 이 감각이 어느 한 연령대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지치는 시절이면 누구나 비슷한 저녁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날은
설렁탕도 밍밍하고
떡볶이도 예전의 그 맛이 아니다.
음식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닳아버린 날이기 때문이다.
슬로우 테이블
입맛이 없던 어느 날,
나는 잠시 식탁 앞에 앉지 않고
찬물을 한 잔 마셨다.
휴대폰 알림을 꺼두고
오늘 가장 속상했던 순간을
조용히 하나 떠올렸다.
그걸 인정하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짧은 인정 하나가
나를 식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데려왔다.
음식이 나를 위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는 순간에야
맛이 비로소 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여운
입맛이 사라지는 날은
맛이 잘못된 날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던 날이다.
'오늘은 좀 힘들었다.'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자기의 저녁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날은
그 말 한 줄이면 충분하다.
식탁 앞에 앉는 것이
살아 있다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 되는 날도 있으니까.
Epilogue
이 글은 정답이나 위로를 주려는 글이 아니다.
그저 지나친 하루의 마음이
입안보다 먼저 지쳐버렸던 어느 저녁의 기록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스쳐가도 좋고,
누군가에게는 한 끼 앞에서
조금 덜 미안해지는 마음이 일어나면 더 좋다.
부담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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