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선

by 깊고푸른밤

대기선에 서 있으면

몸은 멈춰 있지만 생각은 그렇지 않다.

발은 바닥에 붙어 있고,

시선은 신호등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건너가 본다.


먼저

지금 건너도 될 것 같다는 마음이 튀어나오고,

,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뒤따른다.

그 사이에서

신호는 아직 바뀌지 않는다.


대기선은 늘 그런 곳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아무 생각도 안 하지는 못하는 자리.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시간을

종종 '낭비'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선 앞에서는

결정이 잠시 보류된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상태로.


횡단보도 앞 대기선이

왠지

인생에서의 '머뭇거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잠시나마

누군가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을 걸어주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춘다.


움직이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잠깐

머뭇거린다.


신호가 바뀌면

모두가 움직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속도로 선을 넘는다.

그 순간,

대기선에 서 있던 시간은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선 앞에서 우리는 잠깐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람으로 서 있었다는 걸.


초록 불이 켜진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나는 밀려나듯

결정된 세계로 발을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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