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처스 라운지]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말랬는데

by 오달

연이어 발생하는 도난사건에 어수선한 초등학교. 젊은 교사 노바크는 학교가 사건을 대하는 방식에 위화감을 느낀다. 학급 임원들에겐 의심 가는 아이들을 짚으라 압박하고, 심지어 수업 시간에 들어와 지갑 검사까지 하는 교장단. 노바크는 편견 가득한 해결책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 하지만, ‘무관용 원칙’이란 이름 아래 상처받는 인격을 보듬기가 벅차다.


그 와중에 교무실에서 노바크의 지갑도 털리고 만다. 하지만 괜찮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노트북 카메라를 켜놨었던 그녀. 그러나 웬걸, 화면에 잡힌 옷자락의 주인에게 찾아가지만, 용의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오히려 화살을 노바크에게 돌린다. 게다가 불편한 공기는 교무실을 넘어 학교 전체로 퍼지고, 수많은 눈이 바라보는 칠판 앞으로 내몰린 상황. 그녀는 그토록 지적했던 질문을 돌려받는다. 당신의 증명엔 정말 편견이 없는지.



# 유죄추정의 원칙

이웃 나라 일본에는 ‘원죄(冤罪)’ 라는 시사용어가 있다.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 혹은 무고한 죄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말로는 누명과 뜻이 통하는 단어다. 범인의 계략이거나 정말 우연히 벌어진 오해라면 수사를 통해 바로 잡으면 될 텐데, (특히 일본은) 사회 용어로 쓰일 정도로 원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 공포는 바로 엘리트 관료주의에서 시작된다. 사법부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기관이기 때문에 기소된 사건은 절대 틀릴 리 없다는 자부심. 이들의 타겟이 된 이상 죄인 프레임에서 벗어날 길은 제로에 가깝다. 찍혀버린 낙인은 판사봉을 들기도 전에 다른 모든 근거를 지워버린다. 그렇게 한 사회는 ‘99.9% 형 집행률’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만들어 버린 것. 우리는 우수한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숫자에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은 변호사가 아닙니다. 검찰은 기소한 이상 유죄를 만들어야 합니다. 실체도 없는 압력을 검찰은 의무처럼 느낀 거죠.”

- 드라마 <안티 히어로>


드라마 <안티 히어로>의 아키즈미 변호사는 유죄 확정에 목을 매는 검사를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누명이었다면 수사 중에 분명 걸림돌이 있었을 터, 입증의 방향을 수정했어야 한다. 하지만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검사에겐 이 불편한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불문율을 성스럽게 유지해야 하는 수호자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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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처스 라운지>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이와 비슷하다. 교내 도난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업중인 교실에 들이닥친 교장단. 강요가 아니라 의견을 묻는 거라지만, 이미 범인을 학생으로 간주한다. “숨길 게 없다면 싫을 이유가 없다”는 태도엔 어떤 정의로움도 스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지갑검사에 답답해진다. 그래 당신들이 법이구나.


범인을 특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었을까. 그림 좋은 해결이 더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남자아이들, 그중에서도 이민자 아이들에 집중하는 수사를 보니 더욱 아찔하다. 심지어 억측에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절차였을 뿐 아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전하는 교장. 관료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내 가설은 이미 옳은데 증명에 뭐하러 힘쓰냐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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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설은 늘 나를 비켜 가


"이건 증명일까, 추측일까?"

- 영화 <티쳐스 라운지>


주인공 노바크는 이와 같은 색안경을 경계한다. 교장단의 일방적 결론에 소극적이지만 끊임없이 저항하는 그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가설에 방점을 찍지 않길 권한다. 성적표의 등수를 알려달라는 아이들에겐, 성적이 꼬리표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지식만큼 윤리를 강조하는 그녀. 그녀는 기본적인 인간애가 조금 더 많은 교육자인 걸까. 단순히 그것뿐일까.


영화 초반 교무실의 한 장면에서, 올곧은 철학의 이유를 엿들을 수 있다. 폴란드어로 말을 거는 동료교사에게, 독일어로 얘기해달라고 요청하는 그녀. 애써 보이는 미소에 복잡했을 그녀의 인생이 그려진다. 폴란드인으로서 독일에서 버텨야 했던 지난날의 기억. 어른들의 편견은 아이들의 유산이 되고, 그로인해 온몸으로 시절을 견뎌야 했다는 눈빛이 스친다. 그러니 도난사건이 왜곡되는 걸 절실히 막고 싶었을 터다. 차별과 판단에 불쾌함을 비추며 그 시선을 아이들로부터 분리하려 애를 쓴다. 제2의 어린 노바크가 탄생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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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태도를 문제삼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편견 근절엔 다들 동의할테니까. 허나 명확한 옳고 그름에도 정의로운 신념은 가끔 내 손을 놓는다. 아무리 무죄추정을 하고파도, 내가 피해를 본 순간 선악의 한 축은 이미 정해졌거든. 내가 본 증거는 누가 뭐래도 꺾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렸거든. 추측인지 증명인지 아이들에게 그렇게 당부했음에도.


도난사건이 오리무중인 와중에 노바크의 지갑에서 돈이 사라진다. 혹시나 해서 켜놨던 노트북 카메라에 특정 블라우스가 찍혀있는데, 당사자는 억울하다고 역정을 내는 상황. 좋게 해결하려 했던 내 마음이 상처받았다.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는 사실, 똑같은 옷이 학교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는다. 확신이 거부당하는 순간 이성의 끈은 사라진다. 범인은 현재 바로 내 눈 앞의 당신이기 때문에.


용의자를 특정했지만 도리어 역정을 내며 사건은 곤경에 빠진다. 이때 영화는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권선징악을 향할 터다. 하지만 이상하다. 노바크는 사건 해결의 사명을 불태우지 않는다. 억측으로 역풍을 맞아 억울할텐데, 그조차도 해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동자에서 그토록 혐오하던 세간의 시선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오히려 그 화살을 자신에게 향한다. 언행일치하지 않았던 그 찰나를 반성하는 듯이.


의심했던 동료의 아들(이자 자신의 학생)인 오스카에게 시선을 보내는 노바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녀의 추측이 한 아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에 괴롭다. 큐브를 선물하며 화해의 제스쳐를 보내지만, 기대와는 달리 오스카는 오히려 그녀를 심각하게 밀어낸다. 도난 사건의 피해자가 오히려 미안해하는데도 세상은 그녀에게 명쾌한 안정감을 건네지 않는다. 늘 마음을 지키다 한번 삐끗한 것 뿐인데 후폭풍에 정신이 없다. 답답하다. 그녀를 이토록 몰아세우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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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독일인들에게 증명하려고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 일커 카탁 감독 인터뷰


터키 이민자 출신의 독일인인 감독. 여기에서 영화 기획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 내내 이겨내야 했던 편견. 노바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슬픔과 닿아있다. 특히 유년기의 차별은 너무나 거대해서 평생의 흔적이기 마련이다. 존재에 대한 증명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면, 그 혼란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공포였을 터다. 그런 내가 똑같은 상처를 타인에게 줄 리 만무하지. 그 고통을 뻔히 아는데.


그런데 어쩌지. 인생을 살다 보니, 소속이 있고 위치가 생기다 보니, 틀린 가설을 거두지 못하는 일이 생겨버린다. 추측은 진실이 아니라는 기본 공식이 있는데, 자꾸 괜한 단서들이 붙어 명제가 더러워졌다. 분명 큐브를 맞추는 건 마법이 아니라 수학이라 했으면서. 문제해결에 필요한 알고리즘은 수많은 손들이 뒤엉켜 무너졌다. 노바크처럼 혹은 교장단처럼, 나아가 관료주의의 사법부처럼.


그래서 영화는 노바크에게 가혹한 자기반성을 요청한 것이리라. 내가 증명하고자 그렇게도 애썼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의 색안경이 또다른 몸부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참회다. 그래도 자신에겐 관대하면 어떨까 싶어도 단호하다. 오히려 그래야 더 설득력이 있을거란 다짐이다. 편견이란 위험한 칼날이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실수일지라도 쉽게 변호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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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운지의 문을 열고

영화 <티처스 라운지>는 학교를 무대 삼아 작은 사회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사건의 발생부터 치안, 법, 언론, 공동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의 맥락들을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이 모든 장치가 하나의 우화라면, 감독이 그리는 세상의 청사진이 슬쩍 담겨 있을 터. 영화 내내 처절하기만 한 노바크의 행보에 주목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와 오늘의 편견, 그로인한 반성과 좌절. 자기혐오에 빠져버릴 것만 같은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학부모 간담회의 소란, 아이들의 수업 보이콧, 게다가 학교신문의 추측성 기사들까지. 올바른 선로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인가 싶던 그때, 노바크는 무슨 생각인지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소리나 한번 크게 지르자고 한다.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학교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과 그녀. 비명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놀이인지 모를 외침을 한껏 보내고 나서야 그녀의 입이 나지막이 열린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제야 노바크는 머릿속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을까.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있지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각자의 사정을 들어보려 애썼지만, 사건 해결을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교무실에 머물러 있었던 것. 진심으로 서로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같은 공간에서 숨통이 터뜨리는 경험이 필요했다. 유려한 말솜씨도, 날카로운 카리스마도 답이 아니다. 내 영역의 그늘을 벗어나 계급장 떼고 날것의 소리를 함께 터뜨릴 용기. 편견으로 뒤섞여버린 큐브의 알고리즘은 여기에 있었다.


나는 죽어도 받고 싶지 않지만 때론 너에게 던지고 모른척하는, 지독한 편견의 매커니즘. 내 마음 속 99.9% 사법부를 걷어내는 게 어렵다면, 교무실을 나와 수돗가에 가서 시원하게 세수 한 번 하고 교실로 찾아가자. 아무 말 없이 옆자리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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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와 함께 살아가는 나라는 원래 다 저런가.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라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차별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난 기득권이구나 싶었다. 노인, 아동, 시골, 여성, 장애 등등으로부터 나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 마음 편한소리를 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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