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공주,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마법과 유령의 판타지. 한 초등학교 교실에선 동화 창작 수업이 진행 중이다. 곧장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학생들. 각자의 이야기가 무르익는 순간, 환상을 가르는 총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아이들은 재빨리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긴다. 반사적인 움직임이 왠지 서글프다. 금세 놀란 기색을 감추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더 슬프다. 오늘도 널브러진 시체를 보며 말없이 하교해야 하기에. 이곳은 바로, 마약과의 전쟁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켜 버린 멕시코시티다.
에스텔라의 엄마도 어느 날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엄마마저 잃어버린 열한 살 소녀. 선생님이 준 분필을 붙잡고 소원을 빌어보지만, 환청과 유령만이 나타날 뿐이다. 에스텔라의 집을 털다 마주친 샤이네 역시 마찬가지의 인생. 세상의 폭력에 가족을 잃었지만, 복수의 칼날은 현실 앞에 무뎌진다. 뱀 같은 핏자국을, 상실의 흔적을 막는 건 도무지 무리일까. 어른이 필요했던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의 보호가 돼 보려 한다. 이미 처음부터 이들 손에 들려있던 호랑이의 마음으로.
# 무슨 일이 우리를 덮칠 때
수년 전 미국을 한 바퀴 도는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지역이 가장 좋았는지 막상 하나만 고르라고 물으면 고민에 빠진다. 베스트 10을 뽑아도 모자란단 말이지. 돈을 그렇게 썼는데 원픽으로 끝내기엔 가성비가 너무 나쁘잖아. 그러나 그중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뉴욕 거리를 헤매다 어느 순간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던 기억. 뭔가 싶어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니, 그제야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었지. 아, 할렘에 들어와 버렸구나.
미디어로 인한 고정관념일 거라며 적막한 거리에 발을 내디뎠다. 허나 그 용기도 잠시, 거리에 앉아 있는 어떤 이의 표정이 발목을 콱 잡았다. 어떤 빛깔도 시선도 남아 있지 않던 두 개의 동그라미. 물론 단 몇 분, 그것도 일부만 보고 전부를 이해했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당시 강력하게 다가온 그 공간의 분위기는 확실했다. 이 세계의 모든 전쟁으로부터 어떠한 의견도 갖지 않는다는 신체적 선언. 바로, 무기력의 눈이었다.
“호랑이를 꿈꾸는 왕자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송곳니는 뼈를 부러뜨린다. 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른다. 하지만 왕자는 호랑이가 될 수 없다. 왕자가 되는 법조차 잊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우리를 덮쳐 올 때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조차 잊는다.”
영화 <호랑이는 겁이 없지>가 표현하는 빛깔 역시 할렘의 눈동자와 닮아있다. 오늘은 무사히 총알을 피했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올 일이라는 현실. 아무리 애써도 무법과 폭력이 일상인 이곳엔 울거나 기댈 어깨는 없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에스텔라의 동화처럼, 무슨 일이 덮치고 나면 존재를 붙잡는 것마저 녹록지 않으니까.
총격에 떨고 있는 에스텔라에게 선생님은 소원을 빌라며 분필 조각을 쥐여 준다. 어른이 줄 수 있는 보호가 이것뿐인 현실이라 그럴까. 부러진 분필엔 신령함보단 초라함이 배어있다. 벽에 호랑이를 그리며 용기를 충전하는 샤이네도, 끝내 복수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절망을 마주했기 때문이리라. 대응할 수 없는 무기력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시대의 노예가 되고 만다.
# 너의 눈이 가려졌다면 내가
오프닝의 동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호랑이가 되고자 했던 왕자. 꿈을 이루기 위한 나름의 단계가 있었을 터다. 용맹함을 기르고, 정신을 강화하는 과정을 앞두고 있었겠지. 얼마나 신났을까. 분명 에스텔라의 엄마가 들려줬던 동일한 이야기엔 왕자의 좌절은 없었다. 열린 마무리는 주인공의 인생을 이끌 동력이 될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엄마가 전해준 위로의 메시지는, 에스텔라의 현실을 통과하며 경로를 바꾼다. 꿈도 본체가 있어야, 실현이 가능하다고. 세 가지 소원에 눈이 반짝여야 할 열 한 살짜리 소녀는, 동화 속 주인공을 좌절로 몰아붙인다.
흔히들 무슨 일이 덮치면 본성이 나온다고 한다. 생존 욕구를 건드릴 때 비로소 가식을 벗어낸 진짜 민낯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나의 삶이 뒤흔들릴 때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전한다.
며칠 전부터 엄마는 집에 오지 않고, 오늘 또 하나의 시체를 보았지만, 여전히 엄마가 돌아올 것을 소망하는 에스텔라. 의연하게 기다리고 싶어도 누구 하나 설명해 주지 않는다. 에스텔라가 찾아간 빈민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위로는커녕 오히려 폭력의 사각에 노출되며 상실을 온전히 마주할 기회조차 받은 적이 없다. 영화 <호랑이는 겁이 없다>는 이같은 속수무책의 파도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무력감의 씨앗이 시작된다고.
“인간은 죽는다는 걸 처음 인식한 순간부터 계속해 온 의식들이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죠. 근데 저는 그런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그 경험은 결국 평생 따라다니는 감정이 돼요. 작별 인사를 못해서, 마치 유령이 계속 날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도 그런 거예요.”
여덟 살 되던 해에 엄마를 잃었던 이사 로페즈 감독. 멕시코의 아이들이 겪는 현실에 비하면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지만, 고독한 상실감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정서가 영화 곳곳에 스며있다.
샤이네 무리에 합류해 정을 쌓고 슬픔을 공유하더라도, 여전히 에스텔라의 귓가에 들리는 유령의 목소리. 친구들 앞에선 강한 척하지만,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고 자책하며 혼자서 눈물을 보이는 샤이네. 감독은 시대의 최약자인 아이들을 비추며 현실을 폭로함과 동시에, 세상이 도려낸 관객 각자의 빈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당신은 필요한 만큼의 해답이 메워졌는지.
물론 세상은 끊임없는 갈등의 역사라, 가끔은 상실의 해소가 무기력을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에스텔라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핏자국처럼 위기가 늘 곁에 머무는 것도 알고 있다. 돌아본다 한들 여전한 박탈감에 속상하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절망을 헤쳐나갈 방법이 분명 있다고 전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영화 후반, 에스텔라는 마지막 하나 남은 분필을 샤이네를 위해 빌어준다. 그동안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리고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소원을 사용했던 에스텔라. 작은 분필 조각에 영험한 기운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아닌 너의 상처를 보듬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장한다.
샤이네 역시 에스텔라가 엄마 사진을 들고나오지 못했던 것을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소녀의 집을 찾아 사진을 구해온다. 어쩌지 못하는 에스텔라의 망설임 속에 복수 앞에서 주저하던 자신의 눈동자를 읽은 걸까. 나와 달리 너의 자책이 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듭난다.
시대에 눌려서 그대로 사라져도 모를 아이들이었지만, 서로의 길을 비춰주며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이사 로페즈 감독이 그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생존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자신을 덮쳐서 내 삶의 눈이 가려지더라도, 똑바로 바라봐준 너의 눈이 곁에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나 역시 너에게.
# 꺾이지 않는 아름다움
이처럼 영화는 도움의 손길을 구할 데 없는 절망의 도시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염원은 아이들의 성장을 넘어 하나의 뚜렷한 매개체로 수렴한다. <호랑이는 겁이 없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상징하듯, 이사 로페즈 감독이 설계한 동화 속 요정은 바로 호랑이다. 무리의 막내 모토가 들고 다니는 호랑이 인형, 샤이네의 스케이트보드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 에스텔라 역시, ‘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른다’며 수 없이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데 어째서 호랑이인 걸까.
시나리오를 완성하며 버려진 공간에 아름다운 생명력을 지닌 동물을 등장시키고자 했던 이사 로페즈 감독. 욕심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함을 상징하며, 그 자체로 강인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처음엔 사슴과 코끼리 등 여러 동물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결국 그녀는 호랑이를 선택한다. 어느 거리를 걷더라도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을 영속성. 호랑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자연스레 느껴지는 이 보편적 감동이야말로, 우리에게 내재한 아름다움과 닮아있단 해석이다. 아무리 총성이 난무해도 서로의 망가진 눈을 대신해 주며 내일의 생존을 기대하게 하는 아이들처럼. 호랑이는 어떠한 세뇌에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따스한 인간 정신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영화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호랑이가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버려진 공에 그림을 그리며 깔깔대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얼굴을 구겨가며 웃음을 만들던 아이들을 떠올려보자. 새로운 아지트에서 불안함을 한 꺼풀 벗겨내니, 우리 동네 꼬마들의 모습과 다름없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순수함이 사라진 듯해도, 누가 뭐래도 언제나 명랑한 아이들임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 가끔 나만의 전쟁을 치르느라 눈동자에 빛을 살짝 잃었을 뿐, 생명력은 우리 안에 처음부터 함께 해왔다. 그러니 겁내지 말자. 우리는 이미 호랑이니까.
그런데 수십 년째 벌어지는 습관적 내전이 끝날 줄을 모르네. 이번 주말에도 정신 나간 친구들 용병으로 불러서 한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