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라비, 이것이 인생] 파티는 아무래도 다같이 해야

by 오달

프랑스 어딘가의 고성.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이곳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다. 웨딩플래너 대표인 맥스를 필두로,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 팀, 서빙을 담당하는 웨이터 팀, 분위기를 돋우는 무대 팀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점검한다.


이들의 목표는 신랑 신부와 하객들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사하는 것. 인 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십 년 살아온 인생들은 왜 이리 복잡한지, 작은 균열들이 떠들썩한 행사 사이로 조금씩 스며든다. 연이은 사고에 정신없는 백스테이지. 맥스는 속을 긁는 개인사를 뒤로 한 채, 행사를 망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한다. 지친 모습으로 연회장 저 멀리 공터를 찾는 맥스. 힘없는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정말 이것이 인생인가.



# 환상은 거부한다

어느 새벽, 시리얼을 먹던 어린 딸은 문득 아빠에게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되는지 묻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안된다는 대답은 아이의 호기심을 건드렸고, 아빠의 부연 설명은 끝없는 “왜?”를 낳기 시작한다.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루이 C. K.가 제작한 시트콤 <럭키 루이>의 한 장면이다. 그저 놀이터에 가고 싶던 아이의 바람은, 지구의 자전 원리와 아빠의 학창 시절 사연을 지나 미국의 경제위기를 짚고 나서야 멈춘다. 순수한 눈망울에 쩔쩔매는 모습이 웃음 포인트였지만, “그것이 인생”이라는 마지막 대답은 묵직함을 남긴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걷고 있는 우리. 그래서 그런지, 눈을 돌리고 귀를 여는 곳마다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 모든 궁금증을 파고들면 핵심은 하나로 수렴한다. 산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걸까. 질문만큼이나 인생의 철학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진지한 사유를 거친 문장들이기에 분명 도움은 될 터다. 하지만 내 현실과 조금만 어긋나면 어느새 무책임한 잉크 자국으로 전락한다. 당신이 뭘 안다고 내 인생을 단정 짓냐며, 괜히 어깃장을 부리게 된다. 가르치려는 말엔 시비를 더 걸고 싶으니까.



그런데 제목부터 “이것이 인생”이라고 대놓고 선언하는 이 영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 걸까. 이야기 설정만으로 영화가 정의하는 인생을 유추해 보자. 공동의 목표를 이루려는 우당탕 소동극이면 뻔하지. 삶이란 결국 복작대며 흘러간다는 위로 아니겠어. 남 일처럼 다독이는 명언 정도 하겠다 싶었는데, 영화는 그런 냉소적인 반응을 오프닝을 통해 보란 듯이 뒤집는다.


예비부부와 상담 중인 주인공 맥스. 부부는 알차면서도 저렴한 결혼식을 원한다며 옵션을 하나씩 깎으려 한다.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핀잔에 이르자 그는 눈빛을 새로 고치며 아이디어를 쏟아낸다. 그렇다면 음식은 하객들에게 맡기고, 막내 조카의 종이공예로 꾸미겠다는 파격적인 제안. 실전엔 섣부른 환상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 시작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다정하게 보듬어줄 생각도 없다. 폭풍 같은 맥스의 참교육은 그렇게 시작부터 영화의 갈 길을 잡아준다. 꿈도 좋지만, 인생은 현실이라고. 고객을 잃은 맥스 자신에게조차.


# 엉망인 듯 보여도 그 속엔

억지 교훈을 내려놓으니 등장인물을 향한 시선이 한결 가볍다. 장벽이 거두어진 덕분에 과장된 캐릭터라 해도 자연스레 내 모습이 이입된다. 오래전 썸녀가 신부로 나타나는 바람에 웨이터의 신분을 잊어버리는 줄리앙. 주방과 연주팀의 자존심 때문에, 만나면 늘 으르렁대는 아델과 제임스. 현장이 걱정되면서도 비밀 연인 조시안의 변심이 신경 쓰이는 맥스까지. 그저 일상의 작은 물결이지 싶은데, 어느새 파도가 되어 맡은 임무를 덮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짠하다. 빛깔만 다를 뿐 우리의 오늘과 너무나 닮아있단 말이지. 명언에 뒤범벅된 세상을 이죽대던 마음이 슬쩍 열린다. 그래 너희들이 인생을 논하면 왠지 와닿을 것 같아.


그런데 영화 내내 누구도 무게 잡고 멋진 한마디를 내뱉지 않는다. 사건이 수습될수록 관객의 마음에 대사 하나 정돈 남길 법도 한데, 영화는 그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모양새다. 맥스의 친분으로 현장 사진을 담당하는 사진사만 봐도 그렇다. 데려온 조수에게 촬영 노하우를 전해주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허술함을 눈치챘는지 조수는 가르침을 거절한다. 오히려 영화는 아날로그에 멈춰있는 선배의 위기를 부각하며, 세상을 통달한 듯한 태도를 한껏 조롱한다.


어떤 이는 사람들의 행복과 맞닿아 있다며 웨딩플래너를 멋진 직업이라 칭찬한다. 잊고 있던 자신의 축복을 돌아보라며 영화가 교훈을 드디어 내놓나 싶다. 하지만 맥스의 표정에는, 수면 아래의 오리발을 당신이 아느냐는 한숨이 스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기에, 반대로 나 역시 당신의 인생을 다 모르기에, 영화는 몸소 해답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철저히 차단한다. 캐릭터의 입을 꾹 다물게 한 채, 도대체 무슨 수로 관객에게 영감을 전달하려는 걸까.



“당신이 어떻게 축하하는지를 말해보세요. 그러면 제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의 사회학적인 창(窓)과도 같습니다.”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을 연출한 에릭 톨레다노 감독은, 데뷔 전 결혼식장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장은 인간 군상과 사회의 축소판이며, 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엿볼 수 있단다. 한 개인의 깨달음을 담은 대사에도 울림은 있다. 그러나 감독은 관객의 시선을,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넓히려 한다. 직접적인 표현을 전달받기보다, 뒤죽박죽 소란 속에서도 귀를 즐겁게 하는 하모니를 직접 찾는 것. 그곳에 인생을 이해할 힌트가 숨어있다고 전한다. 이해할 만한 해답은 결국 범위 조정이 관건인가 보다. 나를 포함하지 않은 세상에서 무슨 말을 해주겠어.

감독의 조언대로 시야를 넓혀보자. 맥스의 주인공 서사를 자유롭게 놓아주니, 그의 곁을 스쳐 지나던 얼굴들이 보인다. 영화 중반, 메인 음식에 문제가 생겨 비상 회의에 들어간 웨딩 크루. 맥스는 전설로만 내려오던 아이디어를 꺼낸다. 베테랑 웨이터마저 처음 겪는 묘수지만,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세상 모든 엉망진창이 오늘따라 한곳에 모여 어떡하나 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의 경험치는 현재를 지탱하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자기주장 강한 무대팀 리더 제임스도 위기상황에선 그 연륜이 빛을 발한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와 코드가 맞지 않지만, 신랑의 무례함이 조금씩 선을 넘지만, 적절히 흐름을 타며 하객이 온전히 예식에 집중하도록 판을 깔아준다. 정신없는 상황에도 한 번씩 가볍게 던지는 아델의 농담은 어떤가. 동공을 잃어버린 맥스의 표정을 고쳐주며 리더의 여유를 붙잡아주는 최고의 서포터가 된다.



같은 직장이란 이유 말고는 그림체 하나 닮지 않은 멤버들인데, 공동의 선을 지키는 행동교정 없이도 톱니는 아귀를 맞춰 돌아간다. 그저 살아온 역사의 연장선으로 오늘을 걸었을 뿐인데, 각자의 달란트는 필요충분조건을 어떻게든 채운다. 어찌저찌 사고를 덮어냈으니 상관없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다. 모두가 조금씩 알아서 틈을 메운 덕에, 계획했던 목표에 가까워질 가능성의 발견이다. 영화는 그렇게 적당한 대사 없이 인생의 설계도를 그려낸다. 인생은 현실이지만, 매일 스치는 수많은 인생 포트폴리오와 함께라면 그리 무작정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 그래도 시간은 간다

야속하게도 서로를 믿고 수습에 힘쓴다 해도, 안되는 건 또 안된다. 마침표 하나 남겨놓고 삐끗하는 일도 허다하다. 안심할 수 없다. 공동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발목을 잡는다. 2시간여의 한정된 분량 속에서, 카메라가 기어코 잡아낸, 감독이 굳이 시킨 대사는 분명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들은 무자비하게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총을 소개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총을 쏴야 하며, 만약 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홉이 제시한 ‘총 이론’처럼, 떡밥 회수는 필수다. 재미와 긴장을 위해 뿌렸으면서, 수확하지 않으면 일종의 배신이다.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 역시 종반을 향하며 남은 사연들을 서서히 뭉친다. 신부에게 마음이 남아있는 줄리앙의 찌질함, 극을 달리던 아델과 제임스의 관계, 지칠 줄 모르는 신랑의 관종력은 상상치 못할 사건으로 번지고 만다.



감독은 이 같은 스토리텔링의 메커니즘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힌트를 주요하게 사용하진 않기로 한다. 무대 팀의 집단 식중독은, 실력 없는 사진사의 기행은, 17세기 의상을 입기 싫은 웨이터들의 불만은 굉장한 위기로 보였다. 분명 행사를 망치리라 생각했단 말이지. 한데 생각 외로 적당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활용하다니 의뭉스럽다. 혹시 시각을 넓혀 세상을 이해하려던 감독의 태도가 여기에도 반영된 걸까. 복선의 속성을 인생에 빗대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화선이 될 것 같았던 일은 금방 소화되고, 잊고 있던 과거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우리의 삶. 아무도 전지적 시점으로 짚어주지 않으니 알 도리가 있나. 결말을 알 수 없는 인생의 모든 복선은, 영화와 달리 지난 이후에나 이름 붙일 일이구나.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차릴 일이니까.



하지만 영화는 인생의 흔적을 구분할 눈이 없더라도, 그래서 사건을 막지 못했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넨다. 영화의 구성을 살펴보면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소란이 마무리될 때마다 검은 화면에 등장하는 현재 시각이다. 이는 연극의 막과 같은 역할로, 시간 이동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장치이면서, 관객에게 숨 고를 시간을 주는 용도이기도 하다. 다분히 기술적인 의도겠지만, 불규칙한 숫자에 집중해 보면 새로운 의미가 느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것.


이대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고, 차라리 없던 일이고 싶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휩쓸려가는 우리를 재촉하지도, 잡아끌지도, 혹은 보폭을 줄이며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시간은 갈 뿐이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예상만큼 완벽하진 않더라도 나름대로 오해가 풀리고, 빈틈이 생기며, 내일의 꼬리와 연결된다. 시간이란 녀석이 해결해 준 건 아무것도 없지만, 결국 모든 걸 정돈해준다. 어떤 명언이 줄 수 없는 토닥임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렇게 인생 포트폴리오엔 새로운 한 줄이 추가되나 보다. 인생은 현실이지만, 수많은 삶과 함께해도 가끔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너와 함께 가고 있다고.


모든 왁자지껄이 마무리되고 하나둘 차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즐거운 기억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다. 복선 하나 못 찾는 인생 문맹이지만 감히 예상을 하나 해 볼까. 조만간 이 마당은 다시 북적북적 가득 차게 될 것만 같다. “왜?”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은 누군가와 함께.











#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Le sens de la fête(축제의 의미)> 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미루어봤을때,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와 맞닿아있음을 뜻하는 듯싶다. 원제 자체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만,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을 <세라비C'est la vie, 이것이 인생!>으로 대체한 건 신선하다. 대개 한국어로 번역을 할텐데, 다른 프랑스어로 교체를 했단 말이지. 아마도 조금은 직관적인 배려와 동시에 프랑스적 인생관을 존중하려는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게다가 동어반복 오류를 집착적으로 수정하는 줄리앙의 캐릭터도 반영이 된 것 같고 말야. '세라비'가 '이것이 인생'이란 뜻이니까.


# 영화 속 신랑의 엄마, 그리고 신랑측에서 온것만 같은 하객들은 제임스에게 오래된 샹송을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레오 페네, 장 사블롱, 펠릭스 마욜. 도대체 누군가 싶은데 검색해보면 하나같이 유명한 사람들이구나. 코드가 맞지 않아 난감한 제임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는데, 흥이 오르고 나니 그런 걱정은 사라진다. 플로어에 나와 하나되어 부르는 <Can't take my eyes off you>에, 감독이 원하던 축제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내려놓지 않는 것. 파티는 언제나 함께하는 것.


https://youtu.be/J36z7AnhvOM



# 서두에 언급했던 <럭키 루이>의 한 장면. 볼때마다 귀엽고, 웃기고, 생각에 잠기게 되네.

https://youtu.be/sQ3TBKDDx2U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랑이는 겁이 없지]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곤 하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