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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 조금 더 정교하게 권태로울 수 있도록

by 오달

파리 어딘가의 불 꺼진 사무실. 한 남자가 맞은편 호텔을 바라보고 있다. 침착하고 싸늘함이 감도는 얼굴. 그는 킬러다.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인내하고, 임무에 돌입한 순간에도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정해놓은 직업 강령을 끊임없이 되뇐다. 숨을 고르고 정확한 한 발을 위해 조준경에 집중한다. 그리고 탕.


빗나갔다. 다른 사람이 맞았다. 미션 실패라니, 베테랑 킬러에겐 처음 겪는 일이다. 우선 복귀하고 추후 다시 상황을 보자는 상황실의 전화. 그런데 웬걸, 돌아온 은신처는 이미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다. 아끼는 사람들도 위험해졌다. 냉철한 킬러의 세계라지만, 단 한 번의 실책으로 제거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젠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고 다르게 접근할 건 없다. 자연스레 따라가면 된다. 권태로워 보일 정도로 무수히 반복했던 내면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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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원래 진부해

예측되는 이야기, 뻔한 인물, 전형적인 전개를 뜻하는 말, 클리셰(cliché). 책이나 영화에서 비슷한 장르적 장치를 발견했을 때, 대개 피로함을 호소하며 사용하는 단어다. 어원을 살펴보면 ‘딸깍 소리를 내다’, ‘클릭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클리케(Clique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기하다. 딸깍대는 소리가 어찌 진부함의 상징이 되었을까.


19세기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등장한 금속판 복제 기법은 프랑스의 활판 인쇄술을 한층 끌어올리며, 대중 인쇄물의 발전을 가져왔다. 인쇄소엔 글을 찍어내며 딸깍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금속판은 딸깍하는 판, 즉 ‘클리셰’라 불리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인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고정 틀. 듣기만 해도 편리하다. 그렇게 클리셰는 손쉽고, 빠르고, 익숙하게 일할 수 있는 효율의 산물이 되었다.


이처럼 영웅 서사에 가까운 어원임에도, 앞서 말했듯 클리셰는 더 이상 긍정어가 아니다. 오히려 생기를 잃어버린 식상함의 대명사다. 틀에 박힌 이야기는 지겹긴 하지. 고민하지 않는 쉬운 길은 왠지 매력이 없으니까. 더욱이 작가의 개성이 에너지가 되는 예술 작품이라면,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게 될 거야. 칭찬도 계속하면 듣기 싫은 법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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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킬러> 역시 이런 비판의 여지를 품고 있다. 베테랑 킬러가 목표물을 놓치고, 조직으로부터 제거 대상이 되었다가, 배신자를 하나씩 처단하는 이야기. 지극히 단순하고 흔한 플롯이다. 주인공이 칼을 가는 순간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리 섬세한 연출을 자랑하는 데이빗 핀처 감독일지라도, 자신의 걸작 <세븐>을 함께 만든 앤드류 워커 작가가 합류했다고 해도, 이야기를 타고 미리 떠나버린 관객을 막을 수 없을 터다. 이거야 뭐 다 아는 얘기니까.


"권태로움을 못 견딘다면, 이 일은 당신에게 안 맞는다"


그런데 영화는 오히려 시작과 동시에 지루함을 전면에 내세운다. 킬러란 분명 간결하고 호쾌한 액션 스타 아니었나. 자신의 임무엔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담담하게 전하는 그의 목소리. 목표물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그마저도 총구 안에 정확히 들어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야 한단다. 조급은 금물. 침착하고 꼼꼼해야 한다. 타깃이 나타났을 땐 성급할 것 없이 루틴대로 처리한다. 임무를 마치고 나면 다음 일정이 그를 기다린다.


나지막이 이어지는 그의 나레이션을 따라가니, 그저 직업인으로서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다. 불꽃 튀는 하이라이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그 역시 삶의 대부분은 무자극의 반복된 일상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감독은 킬러 이야기가 가진 태생적 뻔함을 너머, 진짜 익숙함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렇다 할 이벤트 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오늘날을 슬쩍 겹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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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가 무기가 될 때

때때로 사람들은 별거 없는 인생을 ‘노잼’이라 자조하며, 팬시한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한다. 그렇지만 이내 익숙한 인생이 평안하다는 데에 고개를 끄덕인다. 곱씹어보면, 클리셰는 검증된 장치이기도 하다. 반복된 역사가 증명하는 실패 없는 공식. 작가들이 단축키처럼 계속 빼다 쓰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란 말이지. 신선함을 원하는 관객에겐 지루할 수 있지만, 오래된 경향은 어쩌면 정수를 담고 있는 걸 테니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행동하는 순간이 아니다. 진짜 문제가 발생하는 건 일을 수행하기 며칠, 몇 시간 몇 분 전, 그리고 며칠, 몇 시간, 몇 분 후다."


영화 <더 킬러>의 주인공 역시, 임무 성취의 동력을 권태에서 찾고 있다. 어떤 인생이든 신선함은 무뎌지고 자극에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신나는 일이 매일 있기 만무하고, 타성에 젖은 날들이 부지기수일 터다. 이에 주인공은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 진실을 인정해야 자유로울 것이라 말한다. 활력을 위해 익숙함을 벗어나려는 시도마저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숨 쉬듯 스쳐 지나왔던 하루의 균형을 놓친다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경고다.


그는 목표물이 나타나 권태를 깨는 순간을 맞이할 때마저 루틴을 유지한다. 표정을 감추고 심장박동을 지키며, 업무용 음악까지 준비하는 주인공. ‘특별할 것 없는 인간(I am the son and heir of nothing in particular)’이라고 외치는 노랫말이 그의 방아쇠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이야. 이토록 평정심을 유지하던 베테랑이 미션을 실패한다. 평생을 몸담았던 작업이고, 강박적으로 직업 강령을 외웠는데. 도움이 안 됐잖아. 영화 시작부터 지루하게 늘어놓던 인생철학은 그저 개똥철학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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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너머 당사자를 다시 바라보자. 순간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쉴 새 없이 심장박동을 확인하는 눈에는, 킬러 이전의 지극한 인간이 담겨있다. 화장실에서 급히 면도하다 목이 베이기도 하고, 인상을 남기면 안 된다면서 떡이 된 얼굴로 공항에 나타나기도 한다. "계획대로 하라,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말아라, 공감은 나약함이다"라며 수만 번 외우는 주문에는, 왠지 모를 위태로움이 보인다. 한없이 차가운 완성형 킬러인 줄만 알았는데, 순간마다 여전히 요동치는 애처로운 존재로구나.


그가 끊임없이 건조한 눈매를 유지하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저격 범행의 난점으로 비명과 폭발을 꼽았지만, 결국은 가장 우려한 건 감정의 동요일 터. 그에게 권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내면의 작은 소년을 일상에 머물게 하는 방어책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애써도 깊은 곳의 쿵쾅거림이 귓가에 들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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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내면의 목소리는 그가 무너질 때조차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그가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 영화 <더 킬러>의 시나리오 작가, 앤드류 워커


데이빗 핀처 감독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과정 역시 주인공의 모습과 닮아있다. 세계에서 손꼽는 유명감독이지만, 그가 이 영화를 연출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7년에 처음 판권을 인수한 이래로, 제작 불발과 판권 소멸, 새로운 제안을 거쳐 2019년이 되어서야 시나리오 초안이 완성됐다. 게다가 작품 파트너인 앤드류 워커 작가에게 보여줬는데, 돌아온 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혹평이었다. 그의 인생도 다를 게 없다. 글자들과 버틴 권태로운 시간. 탈고를 향한 무수한 기다림과 거절. 수많은 작품을 써낸 명장일지라도, 인생을 펼쳐놓았을 때 절대다수의 날은 되풀이되는 무색의 하루였으리라. 마치 한 발을 위해 인내하던 영화 속 킬러처럼.


워커 작가는 감독에게 원작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가 보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어떻게 킬러가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바닥에 어느새 던져져서 그 삶을 이어가는 인물. 성향과 직업이 완벽히 들어맞지 않지만, 심지어 어느 부분은 발목이 되기도 하지만 그 정체성을 인정하고 평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인물. 그렇게 인생 전체의 권태로움을 받아들이고, 오늘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라이플을 들고 할 일을 준비하는 인물. 그러고 보니 단순히 킬러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렇게 틀에 박힌 현실을 기꺼이 인정했을 때, 비로소 영화를 구현할 단서가 나타났다. 그 너머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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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범하지 않을 능력

덕분에 영화는 킬러라는 판타지 직업임에도, 관객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열어놓는다. 단서를 따라갈 때마다 불리는 그의 다양한 이름들. 웅거, 메디슨, 커닝햄, 킨케이드, 그랜트, 말론, 조지, 하틀리. 고유하면서도 어딘가엔 분명히 있을 생활 이름들이다. 목표물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도 마찬가지다. 렌터카업체, 온라인 배송, 창고임대, 공유 오피스 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생활 시설이 활용된다. 임무의 성향만 다를 뿐, 우리 사는 모습을 오롯이 투영한다. 영화 초반 그가 사용했던 공용 오피스의 이름이 ‘WeWork’인 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무래도 감독은 식상한 하루를 아무 일 없이 살아낸 우리 모두를 짚고자 한 게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 킬러와 다름없는 현장에 늘 놓여있으니.


영화 속 주인공에게 나를 투영하니 그가 읊는 모든 나레이션이 새롭게 들리기 시작한다. 모두가 나만 주목하고 있는 게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권태로운 세상. 임무의 투입과 실패에 감정이 사로잡히지 않도록 새겨야 할 인생 강령. 그중에서도 가장 귀에 남는 말은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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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의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나는 그저 나다. 난 비범하지 않다. 난 그저 다를 뿐.”


주인공은 영화 내내 자신이 실력자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를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를 마주하자마자, 인생이 여기까지인 걸 곧장 받아들일 정도인데. 겸손은 역시 뛰어난 능력자들만이 가능한 말일 거야. 하지만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힘이 있을지 모른다는 응원을 건넨다.


이야기가 슬슬 전개될 시점, 그의 여자친구 막달리는 조직의 습격을 받고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녀의 얼굴엔 킬러의 마음을 헤집는 폭행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에 그녀는 오히려 그를 위로한다. "당신을 다시 보지 못할까 봐. 그건 못 견디니까 엄청난 공격에도 끝까지 버텼다"면서. 꿰맨 자국과 부은 눈으로 보내는 그녀의 미소는, 주인공의 어떠한 실력보다도 강했다.


그녀의 단단함은 비범한 능력 때문이 아닐 터다. 주인공의 말처럼 유일한 인생길은 오직 각자가 지나온 길뿐임에도,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그 당연한 권태를 인생의 발목으로 취급한다. 셀럽이나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나날들이 이어짐에 몸서리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런 보통날을 꾸준히 살아온 것만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 당신과 함께하는 단순한 하루를 붙잡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낸 막달리의 모습에, 별일 아닌 똑같은 임무라며 매 순간 주문을 외우는 킬러의 모습에, 별안간 인생의 클리셰가 보인다. 지난 수십 년의 우리가 쉬지 않고 걸어올 수 있게 한 동력. 어제와 똑같은 내일을 살아가기. 비범하지 않게.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간 어느 순간을 돌아보며 한 번 정도는 그녀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진짜 강했어"라고. 물론 무지하게 진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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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킬러>에는 귀를 사로잡는 두 개의 삽입곡이 있다. 먼저 킬러가 타킷을 향해 총구를 겨눌 때 마음의 안정을 바라던 노래. 본문에서도 언급했던, 영국 그룹 The Smiths의 <How soon is now?>다. 지금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그 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만족하며 살아가는 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찼다. 눈 씻고 찾아봐도 권태로운 일상이 가득한데, 그렇다고 좌절할 수야 있나. 그걸 받아들이고 이겨내지 못하면 이 일과 적성이 맞지 않다는 킬러의 말이, 인생을 바라보는 자세를 다시한번 고쳐앉게 한다.


https://youtu.be/hnpILIIo9ek



# 두번째는 주인공이 은신처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습격을 받아 초토화된 거실 한가운데에 흘러나오던 노래다. 몽환적이면서도 우울한 분위기로 주인공의 다급함을 설명해주기도 하는 이 노래. 바로 영국의 트립합 밴드Portishead의 <Glory Box>. 트립합 장르에 대해선 잘 모른다. 약에 취한 힙합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락밴드의 요소도 있고, 각 요소들이 절묘하게 섞여있는 오묘한 음악이다.


가사를 들어보면 갇혀있는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태블릿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인걸로 보아, 그 집에 살고 있던 여자친구 막달리의 플레이리스트인가 싶다. 고통속에서도 혼신을 다해 일상을 지키려던 담대함을 미루어봤을 때, 진짜 해방은 익숙한 하루하루를 살아갈때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맞으면서 난 못버텨. 난 기절할래.


https://youtu.be/4qQyUi4zf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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